◇용기와 실책의 차이
한국군 1개 보병사단의 파병이 결정됐을 무렵 청룡여단은 파월부대로 선정이 안되고 맹호사단만 파월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이 해병대 출신인 김성은이었고 해병대 또한 파병에의 열의가 대단하여 결제과정에서 맹호사단 제26연대를 빼고 해병 연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채명신 또한 해병대에게도 전투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국군의 균형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 제의를 수용하였다.
청룡여단의 주력부대는 1965년 10월 9일 중부 월남의 군항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캄란항은 천연 양항으로 외국군의 침략으로 역사가 바뀔 때마다 외인부대의 대부분이 이 항구를 통하여 상륙했기 때문에 유서가 깊고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말 한반도에 풍운이 휘몰아치고 있을 때 일어났던 러일전쟁 때도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 해군과 한판 겨루기 위한 원정길에도 이곳을 경유했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동남아 침략을 시작할 때에도 역시 캄란만을 거쳐 이나라를 짓밟았다. 일본군이 패하여 프랑스군이 들어온 것도 이곳이고 미군 또한 이곳에 상륙했고 뒤이어 한국군도 캄란만에 상륙한 것이다. 우리나라 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의 역사라 할 것이다.
청룡여단은 캄란만 부근에 기지를 점령하여 자체방어를 견고히 하면서 할당된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항만시설,비행장,보급시설 등을 방호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어서 청룡여단은 캄란만에 상륙한 지 불과 1주일째 되는 날인 10월 16일을 기해 미 제101공수사단 502연대 2대대로부터 캄란 반도지역의 작전임무를 인수하였다.
첫 전장에 도착한 모든 부대가 그러하듯 해병들도 육군과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해병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적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져 희생을 입는 경우가 빈번히 생겼다.그래서 청룡들은 베트콩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여단장 이하 청룡의 모든 장병이 저 적을 단번에 없애버려야 되겠다고 칼을 갈고 있었다.
이봉출 여단장은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 방문 할 때마다 여단급 작전을 하겠다고 의욕을 과시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중대전술기지 주변의 적정 파악을 끝내고 주민들과 유대 관계가 형성된 뒤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라 본격 작전을 하라"고 제동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확실한 정보 없이 전과를 올리겠다는 의욕만으로 경쟁적으로 중대별 수색작전을 편 결과는 잦은 병력 손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베트콩은 해병의 특성을 파악한듯 가끔 기지 주변에서 얼씬거리며 약을 올리다가 도주했다. 해병은 분을 참지 못하고 경쟁적으로 뛰쳐나가 베트콩을 추격했다. 그러면 다른 베트콩이 정글에 숨어 있다가 기습사격을 가해 오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채명신 스스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작전지역에 가보기로 했다. 주변에서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부하가 싸우는 곳에 직속상관이 못갈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동행하고 있던 주월미군사령부 부사령관 하인개스 중장을 청룡여단 본부 지역에 남기고 떠나려 했지만 부득불 함께 가자고 해서 헬기를 같이 탔다.
작전지역이 가까워 오자 기관총 연발음이 계속 들려오고 간혹 폭파음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낮은 언덕을 찾아 착륙하려 했더니 순간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헬기 조종사는 헬기를 급상승시켜 위기를 넘겼다. 그렇다고 일행이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장소에 착륙했다. 그리고 일행은 헬기에서 내려 작전지역으로 디가갔다.채명신은 이때 큰 소리로 히이갠스 장군과 일행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예감이 이상해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철선이 보였던 것이다. 바로 부비트랩이었다. 일행이 지뢰 밭에 들어선 것이었다. 일행은 조심조심 오던 발자국을 따라 겨우 지뢰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후 작전지역에 접근하여 전황을 살피니 필요 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적은 정글에 몸을 감추고 있었고 청룡은 노출된 지역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피해를 입는 쪽은 우리 쪽이다. 구태어 노출되면서까지 사격전을 하는 것은 무의미 한 것이다. 채명신은 돌아오면서 이봉출 여단장에게 교전 중인 중대를 철수시키라고 지시 했다.
이와같이 베트콩들은 해병들을 갖은 방법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따라서 채명신은 청룡여단의 첫 과제는 주민을 우리 편에 끌어들이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봉출 여단장과 여러 방책을 논의 했다. 채명신은 그자리에서 "월남전은 한국전쟁과 달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고 강조하면서 잦은 기지 밖 작전을 당분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솔직히 말해서 6.25전쟁시 조국을 위해서 싸으는 전쟁과 월남에서 싸우는 전쟁과는 다르다는 것이 채명신의 생각이었다. 월남에 와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된 임무 수행과 비겁하지 않는 군인정신 범위내에서 싸우는 것이 월남전에서의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전쟁지도개념이었다. 그 개념하에 싸우는 장병은 더 한 번 생각하면서 전투에 임해야만 실책이 되풀이 되지 않는다. 용기로 실책을 범한다면 그 용기는 무의미 한것이다. 실책이 용기를 극복할 수 없지만 용기는 때때로 실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해병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는 초기 맹호가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를 향해 적으로 오인하고 사격하는 실책과. 초기의 백마처럼 물소 떼를 적으로 알고 사격하는 경우와 달리 지나친 용기로 병력의 손실을 가져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해지는 피해가 더 우리에게 손실이 크다는 면에서 그 용기는 실책이 되는 것이다.
◇빛나는 청룡 중대전술기지 승첩
◆귀신잡는 해병 짜빈동 대첩전에서 인해전술로 공격하던 적의 내장이 쏟아진 비참한 모습. (동영상에서 갭쳐한것임) |
◆짜빈동 대첩전에서 인해전술로 공격하던 적의 비참한 모습 |
전투경험이 없는 군대가 전장에 투입될 경우 첫 전투부터 잘 싸울 수는 없다. 많은 시행 착오를 교훈으로 삼았을 때 그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지만 시행착오를 무시하고 다만 상대편에 원인을 미룬다면 그 군대는 강해 질 수 없다.
우리 해병 또한 초기 전투에서 많은 대가를 치루면서 그 대가를 헛되지 않게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검정색 파자마 같이 헐렁한 옷을 입고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신고 있는 베트콩을 보면 주먹으로 때려 잡아도 힘이 남아 돌 거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귀신 잡는 해병이란 자긍심에 가득 찬 우리 해병이 그런 베트콩에게 곤욕을 치렀었다. 베트콩은 확고한 이념이 있고 지형지물에 밝아 정글을 헤쳐 나가는 데는 우리보다 더 날쌨다. 그리고 지난 세월 자라면서 많은 나라의 외세와 싸워 약을 대로 약아진 그들이다. 오로지 잔꾀로 살아간 베트콩이고 보면 그들을 무서워해서도 안되지만 깔보아도 안된다.
이제 우리 해병도 그 원리를 터득했다.
채명신은 해병대를 방문할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청룡부대를 방문할 때는 해병대의 각진 전투모를 쓰고 해병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그들과 어울렸다.
채명신은 맹호,백마,청룡 어디를 가나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어느 땐가는 꼭 우리 한국군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하여 투코 전투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를 유린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 중대전술기지가 유린되는 날에는 그동안 회의적으로 보며 못마땅해 생각하고 있던 미군 장군들이나 월남군 장군들에게 채명신의 치부를 들어내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군처럼 대부대 단위 주둔지에서 월남의 오지에 기동작전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위험성이 따른다. 솔직히 우리 한국군의 모든 장비는 그런 기동작전에 적합하지가 않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는 시험 무대가 우리 해병 청룡 지역에서 열렸다.
17도선 남방 28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청룡부대 전술책임지역 460평방Km는 월남군 제1군단 지역과 미 해병상륙군 지역 내에 있었다. 청룡의 제11중대 중대전술기지는 여단본부에서 약 6Km떨어진 짜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월맹군 제2사단 예하의 1연대 병력 약 2,000여 명과 베트콩 지방군 부대 등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1967년 2월 14일 밤, 인해전술로 11중대 중대전술기지를 유린하고 여단본부까지 공략할 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11중대의 중대전술기지는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중대전술기지 개념에 의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특히 이봉출 준장 후임으로 여단장으로 부임한 김연상 준장은 여단지역 내에서 적 병력이 증가되고 적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적 공격이 예상되는 11중대 중대전술기지에 각별한 경계와 관심을 가지고 병력과 화력을 보강하며 수색과 경계강화를 지시했다.
2월 14일은 밤 10시부터 안개가 끼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시계가 좋지 않았다. 밤 11시가 조금 지나 적 1개 소대가 접근하는 것을 초병이 발견하여 3소대장에게 보고하고 소대장의 보고를 받은 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중대의 전투배치를 끝내고 조명탄으로 적의 접근을 확인하면서 청음초 병력을 기지 내로 철수시켰다. 이어서 포병화력 지원사격요청에 대비하는 등 모든 조치를 취하였다. 이윽고 침투하는 적에게 최초 사격을 가하자 적은 1구의 시체를 버리고 큰 소리로 노래하며 퇴각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방심하지 않았다. 적의 대부대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
2월 15일 04시 경 3소대장으로부터 "적의 은밀한 침투가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즉각 포병의 조명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조명탄이 터지면서 주변이 밝아지자 적이 개미떼처럼 접근해오는 것을 확인했다. 중대장은 포병화력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포병탄이 주변 적 무리에 작렬하자 적은 갈대와 같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적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제1파 공격이 실패하면 제2파 공격이 이어지고 계속해서 3파,4파로 이어졌다. 참호에 배치된 해병들은 먼 곳은 소총으로 가까운 곳은 수류탄으로 결사 저지하고 있었다.일부 방어진지내에 잠입한 적에 대해서는 육박전으로 적을 무찔렀다.
이때 여단장은 일부 병력을 헬기로 긴급 투입하여 11중대를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중대장 정 대위는 이를 거절하였다. 지원부대가 투입되는 동안 아군 포병지원사격이 중단되면 적 공격부대가 일제히 진지내에 돌입해 올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중대장의 판단은 옳았다. 적은 계속 밀려오지만 오는 족족 아군 포병의 지원사격 포탄에 의하여 적 공격이 파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적은 물러서지 않았다. 적은 화염방사기 4문과 파괴통,수류탄 등을 장비한 특공조로 하여금 중대본부를 향해 돌진해 왔다.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적에게 접근 수류탄과 소총사격 등으로 특공조 공격을 분쇄했다.이어서 중대장 전경진 대위는 과감한 역습으로 진지 내에 잠입한 적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중대장의 진두지휘에 중대원은 사기 충천하여 마침내 진지 내의 적을 모두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결과 새벽 04시부터 08시까지 5시간여 동안의 처절한 전투에서 적 사살(포병화력 포함) 246명, 포로 2명, 기관총 2정 자동소총 17정, 소총 12정 권총 1정 등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를 통해 아군도 전사 15명, 전상 33명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전투는 월남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전쟁사의 전투 장면 중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는 혈전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11중대 전원이 1967년 3월 1일부로 일계급 특진되었다.
두코에 이은 짜빈동 승첩을 통해 중대전술기지개념의 전략적 전술적 가치의 우월성은 입증되었으며 미군과 월남군의 각급 지휘관과 참모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견학과 방문이 줄을 이었으며 우방국 군사교육기관에서도 연구차 방문해 오는 일이 빈번해 졌다.
특히 미 해병제3상륙군단장 웰트 중장은 작전 현장을 둘러보고 "월남전에서 처음 보는 전과이며 중대장 이하 모든 장병에게 경의를 표하고 중대장 정경진 대위의 지휘 능력은 우방군 전체의 귀감이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스스로 창안한 중대 전술 기지 개념이 월남전에서 과연 자기 판단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하고 늘 마음을 조여왔는데 투코 전투에 이어 짜빈동 전투에서도 승첩을 거두자 비로소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짜빈동 전투는 해병대의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 국군의 영예이며 세계군사에 찬연히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국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