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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채명신

Ⅱ부. 베트남 정글에서 제10장 주요 적전의 배경과 성과

작성자서현식|작성시간14.01.20|조회수366 목록 댓글 1

◇역사적인 오작교작전 

오작교 작전 동영상에서 갭쳐한 그림

 주월한국군의 파병 당시 남쪽 월남 사람과 북쪽 월맹 사람 양쪽 사람들은 비록 이데올로기는 달랐지만 면면히 흐르는 국민 감정은 같은 점이 많았다. 월맹 사람들은 물론이지만 월남 사람 대부분이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을 숭모하고 있었고 남쪽 월남의 대통령에게는 존경의 뜻이 없는 편이었다. 걸핏하면 장군들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북위 17도선에 의해 월남과 월맹을 갈라놓은 당시의 지도를 보면 마치 한반도의 남과 북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인도지나 반도의 지도가 변한 지금의  베트남을 보면 우리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솟는다.

 베트남의 지도를 살피면 동쪽 해변가에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뻗은 도로가 눈에 띈다. 다른 어느 도로보다 길고 곧게 뻗어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서울과 부산을 잇는 1번도로가 연상된다. 그 도로도 1번도로이다.

 채명신이 한국군 부대를 배치할 때도 그 도로를 눈 여겨 보았다. 한국전쟁시 미군이 주로 우리의 1번도로를 따라 전쟁을 해왔고 그러기를 고집했다. 채명신이 월남전 참전을 구상하면서도 월남의 1번도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1번도로를 선택한 이유와 같다. 오지를 피하고 평야지대를 선택한다면 작전의 불확실성을 훨씬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채명신의 이와 같은 속내를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주월미군사령부 당국은 한국군 전투부대를 오지로 보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채명신은 끝까지 반대했다. 채명신이 내세운 핑계는 합리성이 있었다. 미군에 의해 기동성이 뒤떨어진다. 화력도 약하다. 전투부대 통신 소통도 제한을 받는다. 보급을 위한 군수지원능력에 한계가 있다. 채명신은 얼마던지 내세울게 있었다. 그 억지로 성사시킨 것이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을 1번도로에 깔아놓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월남전의 주역은 월남과 미국이지 우리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명분과 의리를 가지고 참전했는데 오지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일방적으로 우기기만 해도 안될 성싶어 기갑연대 3대대를 투코에 보내봤던 것이다.

 채명신에게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리 한국군은 군사작전과 대민지원 및 민사작전을 일원화하고 있기 때문에 인구 밀집 지역인 1번도로변이 작전에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미군 당국도 거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당시 미군은 군사작전만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인구밀집지역에서 작전해 봐야 민원만 야기될 것이 뻔하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미군이 채명신의 주장을 받아들인 또 하나는 1번도로 주변의 평야지대가 곡창지대라는 사실이다. 그 평야에는 많은 전략촌이 있고 베트콩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평야지대에서 농산물 수확을 보장하고 식량자원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는 평정사업은 미군 전투부대가 하기 힘든 영역이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알게 된 것이었다.

 채명신은 한국군을 1번도로에 연하여 배치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1번도로를 남과 북으로 개통시커야 된다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 맹호사단과 백마사단이 월남에서 가장 중요한 1번도로의 남과 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채명신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1번도로의 개통 없이 베트남전 승리는 바랄 수 없다" 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월남정부의 키 수상 역시 " 1번도로가 아직까지 개통되지 않았다는 것은 연합군의 수치" 라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알면서 못한 것은 안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이었다. 월남군은 물론 미군도 여러번 시도했지만 완강한 적의 저항 때문에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미 제101공수사단은 투이호아 지역에 10개월 간 있으면서 기동작전을 폈지만 피해만 내고 작전을 종료했다.

 채명신은 그 작전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뜻을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에게 말하니 그는 " 그 작전 하지 마시오.피해만 입을 것이오 주변 주민들 전부가 베트콩들이오" 라며 채명신을 말렸다. 그러나 채명신의 의지는 강했다. '내가 원해서 두 사단을 1번도로에 깔아놓고 그것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두 사단을 지휘한단 말인가' 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채명신이 두 사단의 연결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백마사단이 도착했을 때부터였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라는 명칭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며 채명신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작교작전의 의의를 살피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맹호사단 주둔지역 퀴논으로부터 백마사단 북단 투이호아까지의  1번도로를 개통함으로써 한국군의 전술책임지역을 확장하여 퀴논에서 판랑에 이르기까지 약 400Km에 걸쳐 자유롭게 육로수송을 가능케한다.

   둘째, 작전지역 내의 월맹군과 베트콩을 섬멸하여 적에게 한국군의 우위를 과시함으로써 한국군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한다.

   셋째,  지역내의 주민을 보호하고 생활의 안전을 도모하게 하여 적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

   넷째,  적에게 식량을 비롯하여 각종 전쟁물자의 공급원을 봉쇄한다.

   다섯째, 1번도로에 연한 지역 일대는 월남 제일의 항만 비행장 등을 비롯한 군사시설과 산업의 중추지역으로 월남 경제의 80% 이상의 수입원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한국의 기술인력의 진출 여건을 보장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이익에 이바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1번도로의 개통은 한,미,월 3개 국 모두에게 보탬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디.

 채명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은 1967년 2월 17일 맹사단장과 백마사단장에게 작전지침을 하달하였다.

 맹호사단은 3월 15일 08시에 송카우 및 투이안 지역으로 적을 소탕하고 남으로 진격하고 백마사단은 3월 8일 07시에 투이호아 서방지역에서 적을 소탕하고 북진하여 두 사단이 연결 1번도로를 개통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맹호사단장 유병현 소장과 백마사단장 이소동 소장은 즉각 오작교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오작교작전은 작전명령에 의하여 먼저 백마사단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공중기동작전과 야간침투작전을 병행하면서 1번도로 주변의 적  전략촌을 탐색하며 북상하기 시작했다.백마사단에 뒤이어 맹호사단 또한 3월15일에 작전을 개시했다. 맹호사단은 공중기동작전과 야간침투작전을 병행하면서 1번도로 주변의 적 소탕에 들어갔다. 작전은 일정한 기한 없이 샅샅히 수색 탐색하느라 작전이 시작된지 한 달이 가까워 오는 4월 6일이 되었다. 마지막 총공격이 시작되면서 연결점에 도달하기 위해 진격의 피치를 올렸다.

 4월 18일 10시 30분. 마침내 맹호사단 제26연대가 백마사단 제28연대와 투이호아 북방 18Km지점 1번도로상에서 역사적인 연결식은 갖게 되었다. 맹호사단장 유병현 소장과 백마사단장 이소동 소장이 악수로 연결의 절정을 장식했다. 이로써 월남의 1번도로가 글자 그대로 월남인의 1번도로로 돌어오게 되었다.

 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자유세계의 유력지들은 일제히 ' 한국군을 배워라' '랑데뷰 작전의 성공' '맹호와 백마의 만남' 등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오작교작전이 종료되면서 1번도로의 400Km의 병참선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8,400평방Km의 광활한 지역을 월남의 행정관할 지역으로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복수와 복수로 이어진 홍길동작전

 맹호사단과 백마사단에 의한 오작교작전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월맹군과 베트콩이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적은 반드시 복수전을 펼 것이며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모든 지휘관은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월한국군은 적의 복수전에 대비한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특히 맹호의 투코 전투에서, 청룡의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전술기지 유린에 실패한 적은 다시 중대전술기지의 복수전을 펼 것이라는 생각을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채명신의 강력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침이 말단까지 침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란 바로 승리감에 도취하여 적을 너무 얕잡아보는 오만이었다.

 맹호사단 제26연대 1대대 2중대는 약 90미터의 낮은 언덕에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중대전술기지는 남동으로 뻗어 내린 150미터의 독립고지에서 감제되고 있었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약 700미터의 거리를 둔 딘쭝 마을이 두 곳에 깔려 있었다.

  1대대장 김성찬 중령은 2중대장 김상옥 대위를 찾아 야간 매복계획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추궁하려 하였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대장과 중대장은 중대전술기지 설치에서부터 실책을 범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감독 책임이 있고 중대장은 전술기지를 잘못 선정한데 있었다. 정상적인 판단이라면 중대전술기지를  150미터의 높은 고지에 설치해야 했다.

 중대장은 그날 따라 중대원들에게 맥주 한 병씩을 나누어 준 다음 일찍 재웠다. 평소에는 중대원들에게 야간비상훈련을 한 번씩 실시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날 따라 그만두었다. 특히 다음날 작전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야간 경계를 신병으로 편성해서 복초가 아닌 단초로 근무케 했다. 또한 이날 따라 기지 밖 청음초를 2개 초소만 설치했다.

 1967년 5월 16일 새벽 2시 20분 경 대대본부에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대본부는 뜻밖에 당한 박격포탄 공격에 혼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지에 투입되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이미 2중대 전술기지를 베트콩 제85대대 예하 2개 중대가 삼면을 포위한 뒤였다.베트콩은 저녁무렵에 은밀히 150고지에 침투하여 중대전술기지를 내려다 보면서 잠입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러나 중대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베트콩은 전원이 팬티만 입고 온 몸에 검정색칠을 해 위장하고 바구니에 수류탄을 넣고 그림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2중대에서는 그 기미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경계병은 방심한 나머지 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이 비싹 다가가 진지에 수류탄을 던지자 그 폭발음을 듣고서야 알아차렸다. 전투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으로부터 당하니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적이 던진 수류탄에 의해 3소대 1분대장 안건장 하사 외 6명이 폭사했다. 적은 혼란한 틈을 타 전술기지내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중대원들이 적을 발견하고 베트콩에게 달려들어 백병전이 벌어졌다. 약 40분간 맹호와 베트콩이 뒤엉켜 육탄전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나 베트콩은 태권도에 단련된 맹호를 이길 수가 없었다. 베트콩은 수세에 몰렸으나 퇴각하지 않고 전술기지내의 탄약고를 폭파했다. 얼마 지나자 105미리 곡사포의 조명탄이 전술기지 상공에서 터지면서 주변이 밝아지자 적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중대가 비로소 평소의 전투력을 회복하자 중대원의 역습을 받은 베트콩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날 2중대의 희생은 전사 20명, 전상 38명이었고 적은 53구의 시체를 버리고 도망갔다.적의 시체는 상당수 아군 포병화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 불행한 사건이 있은 직후, 중대장 김상옥 대위는 경계 책임을 물어 해임되고 2중대전술기지에는 1중대가 새로 투입되었다.

 채명신은  이와 같은 보고를 받고 이러한 실책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남기고 실패의 원인 분석을 사단장에게 지시했다.또한 적은 여세를 몰아 계속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공세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구상했다.

 적은 오작교작전에서 60% 이상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되었고 월맹군 제5사단 95연대 병력이 작전지역내에 투입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월맹군의 적극 지원 아래 베트콩 대대들을 계속 증편하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까지 입수하였다.

이에 채명신은 맹호,백마 두 사단장에게 소탕작전을 명령하였다.

 1967년 7월 9일 맹호사단은 작전명을 홍길동 작전으로 하는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복수와 복수로 이어진 복수전이 전개된 것이었다.

 새벽 4시부터 B52중폭격기 편대로 동수안 남쪽 22Km 지점에 있는 488고지와 504고지 일대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기갑연대와 제26연대는 헬기에 의한 공중기동작전과 지상 침투작전을 병행하면서 각각 공격을 개시하였다.

 백마사단 또한 제28연대 2개 대대, 제29연대 2개 대대, 제30연대 2개 대대를 투입함으로써 오작교작전에 이은 두 번째 군단급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 작전에서도 초기에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지만 3단계 작전에서 월맹군 제1사단의 훈련참모와 정치참모를 생포하는 등 적측의 주요 간부가 많이 사살되어 그들의 지휘체제에 큰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홍길동작전의 말미에 맹호사단은 적이 20여 년간이나 근거지로 삼아 오던 이른바 베트콩의 성역을 수복함으로써 1번도로의 안전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전에서 참전 장병에게 정글지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과 험준한 산악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갖추게 되었음은 전투력 향상에 큰 의미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백마사단의 홍길동작전은 이소동 소장에 의해 지휘되면서 투이호아 서쪽 25Km지점의 둑산과 옹남 일대의 월맹군 제95연대 5대대와 훈련소, 옹라산과 혼라산 일대의 베트콩들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백마사단을 방문하여 사단이 홍길동작전에 들어가기 직전의 작전회의에 참석한 사단장 이하 주요 지휘관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이번 작전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집중하고 우세한 기동력을 총동원하여 포위망을 형성한 후 장기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하는 적에 대해서 근접전투로 백병전을 전개한다는 것은 고려되어야 한다. 적의 발악적인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을 경우 즉각 아군 병력을 우회시켜 적진에 최대한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무모하게 병력을 희생시키는 일은 용기가 아니다. 월남전에서는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당시 청룡 여단에서는 무모한 작전으로 병력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채명신은 백마사단에게도 무모한 희생 방지를 당부한 것이었다.

 백마사단은 홍길동작전에 3개 연대에서 2개 대대씩 작전에 투입하였다. 역시 백마사단도 공중기동작전과 침투작전을 병행 실시하였다. 이 작전이 시행되는 도중 초대 이소동 소장이 임기를 마치고 7월 28일 신임 사단장 박현식 소장에게 지휘권은 넘겼다.

 백마사단에서도 초기작전에서는 적과의 접촉이 미미하였다.

 1967년 8월 26일까지 48일 간의 백마사단의 홍길동 작전은 마감되었다. 이 작전에서 월맹군 제5사단 95연대를 비롯한 베트콩 중대들의 활동을 제압하고 소탕하는 데 큰 전과를 올렸다. 그들의 조직은 와해되었고 재건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 구정공세와 미군 기갑부대 

 월남의 정치 사회상은 갈수록 혼미해져 가고 있었다. 월남의 수도 사이공은 테러가 잦아지고 있고 반정부 시위는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월맹과 베트콩의 저항은 누구러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1968년 1월 29일 18시를 기해 월남 전역에 구정 휴전이 성립됨에 따라 휴전기간에는 모든 전투 행위를 중지하고 휴전협정에 따르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이무렵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월맹군과 베트콩은 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기습적인 공세를 가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예측되었다.

 1967년 11월 초부터 1968년 1월 중순까지 서부 고원지대에 대한 공세를 취함으로써 모든 관심을 그 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기만작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휴전 기간이라고 하나 한국군은 전투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입수한 정보를 기초로 분석한 적의 동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월맹은 월남의 정,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국민의 동정을 살핀 결과 월남 국민과의 사이가 완전히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구 조밀지역인 도시에 대한 공격계획을 세웠다.

   2, 적이 장악하고 있는 요지와 동굴 등 근거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호치민 루트를 통한 병력과 보급 물자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3, 민중봉기를 유도하기 위하여 행정관서와 방송국 등 공공 시설에 대한 습격계획을 세웠다.

 이상 적의 동태를 예측할 수 있는 정보에 따라 채명신은 보다 더 높은 경계태세를 갖추도록 예하 부대장에게 지시했다.

 채명신이 예측한대로 적은 1월 29일 18시 휴전이 발효된 시간으로부터 불과 수시간이 지날 무렵 적은 야음을 이용하여 월남 전역에 걸쳐 일제히 구정공세를 촉발시켰다. 이에 따라 채명신은 1월 30일 0시를 기하여 휴전을 철회하고 각 예하 부대로 하여금 공격태세로 전환 암행어사작전을 개시하도록 명령하였다.

 수도 사이공에서의 적 출현을 한국군이 발견한 것은 우리 대사관의 경비병 들이엇다. 1월 30일 02시 30분경에 대사관 앞에 구급차 1대와 삼륜차 1대가 질주해 와 급정거했다. 이때 구급차 뒷문이 활짝 열리면서 적병 20여 명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발견한 경비병은 즉각 비상벨을 눌러 소대원을 모두 깨웠다. 신속한 동작으로 즉각 대응 사격을 가하자 놀란 베트콩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이 무리들은 대사관을 습격하러 온 것이 아니라 대사관과 인접해 있는 월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을 기습하러 온 것이었다. 이때 신속하게 대처한 경비 소대장은 박세환 중위였다. 박세환 중위의 긴급조치로 대통령 관저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채명신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고 주월한국군 사령부 경비대장으로 승격시켰다.

 사이공에 침투한 베트콩은 6개 대대로 추산되었다. 제1진 2개 대대는 탄산눗 공항,월남군총사령부,주월미군 사령부를 목표로 했고, 제2진 3개 대대는 촐론 미군 PX, 한국군과 미군 장교 숙소,주월한국군 사령부를, 제3진 1개 대대는 대통령 관저, 미 대사관,  대법원을 목표로 하여 기습해 왔다. 제2진을 3개 대대로 편성한 것은 한국군과의 격전을 예상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월한국군 사령부와 우리 대사관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다.

 주월한국군 예하 맹호 백마 청룡 지역도 적의 공세는 산발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든 한국군 부대들은 일제히 암행어사 작전에 돌입해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주월한국군의 야전사령부가 있는 나트랑에 심상치 않는 적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채명신은 즉각 전용기로 나트랑을 향했다. 비행 도중 적으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고 기체에 여러 발의 총탄이 관통되었으나 다행이 추락은 면했다.무사히 나트랑 야전사령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적을 물리치고 사태가 수습되고 있었다. 채명신이 야전사령부에 있는 동안 급보가 날아왔다. 웨스트모얼랜드 미군사령관이 급히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다시 전용기에 타고 사이공을 향했다 비행 도중 기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미군의 전차가 줄줄이 사이공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순간 사이공에 침입한 적 소탕을 위해 저 막강한 기갑부대가 투입된다면  군사적인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 미국과 미군이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왜냐하면 인구 밀집지역에 숨어있는 적을 저 전차부대가 어떻게 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민간인의 대량 희생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채명신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을 만났다. 그는 상의할 게 있다고 말하면서 기갑부대의 사이공 진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걱정스러운 얼굴빛을 하며

   "지금 기갑부대 행렬이 사이공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데 어떻게 투입할 생각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월남 대통령과 월남군총사령관 그리고 나와 3자 회담에서 미군 기갑부대 투입을 결정했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채명신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사령관께서 결정한 것에 대해 제가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갑부대 투입에 대해 제 의견을 말해도 좋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고개를 끄떡이며 좋은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사이공 인구 밀집지역에의 미군 기갑부대 투입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저 전차가 어떻게 숨어있는 적병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투가 벌어져 사격전이 벌어진다면  건물 및 시설 파괴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민간인의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렇게 일이 벌어진다면  미군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로 확대될 것이 뻔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갑부대는 사이공 외곽을 포위해 철벽같은 포위망을 구성하여 적 퇴로 차단과 빠져 나오는 적을 포착섬멸하는 역할만 맡고 수색작전은 월남군을 투입해야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3자 합의 사항이니 난처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채명신도 함께 하는 4자회담이 이루어졌고 채명신의 설득을 월남 대통령과 월남군 총사령관도 납득이 되어 채명신의 안대로 기갑부대는 사이공 외곽을 포위하고 구정공세의 적 소탕은 월남군이 맡게 되었다.사이공에 침투한 적 6개 대대는 외곽에 포진한 미군 기갑부대의 기세에 겁먹고 퇴각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태는 마무리되었다.이렇게 하여 위기를 넘긴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채명신의 예지에 고마움을 표했다.한편 월남 측도 채명신의 안이 슬기로웠다고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적의 구정공세로 적과 아군은 상호 많은 희생을 냈지만 적의 의도대로 정세장악에는 적이 실패하면서 전 지역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월남전에서 꼬리를 빼는 존슨 대통령 

 공산군의 구정공세를 겪은 미국은 월남전에 대한 정책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많은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이번 구정공세에서 월남 정부의 심장부인 사이공 도심지까지 공격해 들어오는 공산군의 공격 형태에 대해 워싱턴 당국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미군사령부가 공격을 당하고 미국 대사관이 한때 적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은 미국은 마침내 존슨 미 대통령은 3월 3일 대통령 출마 포기 선언과 함께 월맹에 대한 북폭을 사실상 중지함으로써 협상 교섭의 문을 열어놓았다.

 존슨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은
첫째로 갈수록 늪에 빠지는 듯한 아슬아슬 한 국면이 계속 되면서 군사적인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둘째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전시비가 갈수록 격화됨으로써 국론이 분열되기 시작한 점,
셋째로 월맹에 대한 북폭이 국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
넷째로 막대한 전쟁 경비를 지출함으로써 초래될 경제적 위기에 대한 압박감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더 중요한 내면적 요인은 그동안 미국은 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물량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훨씬 열세인 공산군을 상대하여 3년 간을 싸웠으나 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은 불길한 조짐을 이번 공산군의 구정공세에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은 월남전에서 입은 미군의 인명 손실은 한국전쟁 당시의 인명 손실을 훨씬 능가하였으며 50만 명이 넘는 미군 병력의 파견과 전쟁 수행을 위한 막대한 경비는 미국의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사태로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월남 전 현지 사령관들은 언제나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다. 매번 싸우면 이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기고 있던 미군이 물러나면 곧바로 다시 공산군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있는 이 형국은 가급적 외면하는 방식으로 3년을 끌어왔다.

 우선 미국은 정치적 결정 이전에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면서 군사적 우위는 계속 유지하겠다는 생각으로 덕장인 워스트모얼랜드 장관을 바꾸기로 하고 그 후임으로 에이브람스 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그는 웨스트모얼랜드 밑에서 미군 부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에이브람스  미군사령관은 부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기조로 삼고 있었던 미군의 기본 전략이었던 탐색 및 격멸(Search and Destroy) 에서 채명신 장군의 전략전술과 유사한 소탕 및 확보(Clear and Hold) 전략으로 전환하였다.그는 기갑장교 출신으로 유명한 전쟁영웅 패튼 장군과 유사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널리 알려진 맹장이었다. 에이브람스 장군은 채명신 장군처럼 미국의 탐색 및 격멸 전략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채명신 장군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한국군의 전투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군의 연전연승을 부러워 했다. 특히 미군의 중무장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한국군처럼 경무장이 정글 전에서 더 효과적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그의 생각이 적용되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다. 한국군이 미군에 의한 군제(軍制)로 창군 되었고 미군 전술교리에 의해 성장 발전해 왔지만 월남전에서 만큼은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효과적으로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장군이고 그 원인이 한국군의 독자적 전술개념을 개발하면서 발전시키고 있다는 데서 해답을 찾고 있었다.

 가령 미군은 한국군의 중대 전술기지 개념을 'Flre Base'로 채택했고 한국군의 전략전술인 '선멸과 평정'에서 'Stay' 를 'Hold' 로 바꾸어 미군의 기본전략으로 정한 것이다. 전술상 'Stay'와 'Hold' 는 같은 뜻이다. 그러나 뒤늦게 채택한 새로운 전략은 때를 놓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존슨 대통령의 출마 포기 선언과 북폭 중지 결정은 월남전에서 꼬리를 빼는 듯한 미국과 미군의 움직임에 공산군 측은 고무될 것이고 미군의 사기는 급속도로 저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월맹과 베트콩 역시 이 전쟁이 피곤하고 한없는 죽음의 연속에 지쳐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인력 충원에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전비 부담은 더 고통을 죄어갔다. 이렇게 되면서 월맹은 이 호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내 4월 3일 하노이 방송을 통하여 월맹은 존슨 대통령의 제의에 호응하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리하여 월남은 전쟁터가 아닌  대화를 통한 해결의 관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정직한 미국과 간교한 공산측의 대화를 통한 협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은 이 두 번째 라운드의 협상 전쟁에서 미국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공산주의자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긴 채 마침내 미국은 발을 빼고 자유월남은 지도에서 말살되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회담장에서도 미국은 온순했고 월맹은 날카로웠다. 벌써 회담장 분위기에서도 미국은 패색이 짙어갔다. 이 회담이 길면 길수록 월맹군과 베트콩은 훨훨 날고 있었고 미군은 마지 못해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채명신은 이때가 가장 한국군에게 중요한 시기임을 예하 지휘관에게 알렸다. 그리고 스스로 전투를 포기하는 듯한 한국군의 모습을 보이면 더 중대한 사태가 닥쳐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공격 위주의 전투로 우세를 떨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판단도 하게 되었다.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적의 저항에 강력한 응징으로 한국군은 결코 협상과는 관계없다는 의지를 보여야 된다고 판단 하였다.따라서 채명신은 주요 지휘관 회의를 통하여 이를 예하 지휘관에게 주지시키고 보다 강화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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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단 | 작성시간 14.02.03 채명신 장군의 오작교 작전의 의미를알것같읍니다.원남군의 부패와 원남군중들의 좌양속에 사이공까지 베드공이 득실거리는 마당에 아무리 무기가 좋와도 민심이 흔들리면 이킬수 없을을 월남전이 말해줍니다. 월남전의 실상을 파악해서 우리나라에의 좌빨들의 준동에 만은 교훈을 얻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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