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장과 조니워커 해프닝
▲베트남전 당시 유창훈 백마부대장(가운데 선글라스 쓴 장군)이 백마9호작전을 펼치기 위해 출동 준비를 마친 장병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
주월힌국군 사령부 사령관 실에서 채명신 장군이 집무하고 있을 때 아마1968년 10월 경일 것이다. 외교관 채널을 통해 심상치 않은 소문이 채명신에게 들려왔다. 그 내용인 즉 사이공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관 무관들이 한국군 백마사단을 방문했다가 한꺼번에 15명의 외국 무관들이 인사 불성이 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채명신은 급히 참모에게 지시하여 그 내용을 확인하도록 조치했다. 확인한 결과 그 내용은 너무나 엉뚱했기 때문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이공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관 무관일행이 백마사단을 방문했다. 인원은 16명이었다.
사단장 유창훈 소장은 '무엇인가 한국군의 기질을 보여 주겠다' 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작전을 보여줄까 생각했지만 그들이 맹호사단을 다녀오는 길이라서 아직은 백마사단이 맹호사단을 압도할 만한 작전이 없다고 보는 사단장은 작전으로 감동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술로써 백마의 기개를 보여주리라 생각하고 저녁 만찬 때 외국 무관 16명을 초대했다.
사단장 유창훈 장군에 대한 일화는 많다. 특히 두주를 불사하는 호주가 이기에 술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당시 참모장 홍경린 대령 역시 사단장에 못지 않는 호주가였다. 사단장은 참모장에게
"오늘 밤 외국 무관 16명 전원을 만찬에 초대하여 술로써 한국군의 기개를 보여 줄테니 단단히 각오하고 참석하라.그리고 조니워커는 박스로 갖다 놓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참모장은 신바람이 났다. 그동안 작전에 몰두 하느라 그 좋은 술과 멀리 했었는데 기회는 왔다며 휘파람까지 불며 본부사령에게 만찬준비를 지시했다.
저녁 7시. 사단장 공관에서 만찬이 시작되었다.장방형 테블을 중심으로 사단장이 중앙에 앉고 모두 대령급이 참석하였으므로 서열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막 시작하려 할 때 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원래 눌변이라 이런 저런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여러분이 한국군 백마사단장의 초청으로 이곳 손님으로 온 이상 한국의 풍습과 예절에 따라야 할 것을 제의합니다."
외국 무관들은 사단장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미국 무관 해리스 대령만은 그 말 뜻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국에서 두 번씩이나 근무한 바 있었으므로 이른바 '한국의 예법' 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사단장은 다짐하듯 "무관 여러분, 내 제의에 이의가 있습니까?."
하니 모두 합창하듯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사단장은 의자에 앉자마자 자기 앞에 있는 맥주 컵에 조니워커를 가득 채웠다. 외국 무관들은 무슨 마술이라도 하는 줄 알고 신기스로운 호기심으로 맥주 컵과 사단장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사단장은 촌스럽게 피식 웃더니 맥주 컵에 가득 채웠던 위스키를 단숨에 마셨다. 미국 무관 해리스 대령을 제외한 모든 무관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 여러분,이제부터 한국 예절이 시작됩니다. 윗 사람이 술을 건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마셔야 합니다."
사단장은 말을 마치자 빈 컵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앉은 영국 무관에게 컵을 건넸다. 사단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른 쪽으로 돌아가는 잔이오, 그리고 시간을 끌면 벌주라고 해서 두 잔을 연거푸 마셔야 합니다."
영국 무관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사단장은 얼굴 빛이 달라졌다.
"대령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우리가 알기에는 영국은 신사의 나라요 약속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의리의 남자만이 사는 곳인줄 알고 있는데 금방 장군에게 약속을 해놓고 이 무슨 무례한 짓이요"
정색하며 사단장이 말하니 영국 무관은 할 수 없이 사약 마시듯 꿀꺽꿀꺽 목구멍에 흘려 넣었다.다음은 참모장 홍경린 대령 차례였다. 그는 컵을 받자마자 냉수 마시듯 들이켰다. 한 술 더 떠서 그는 사단장에게 한 잔 더 청했다.
사단장은 다시 조니워커 병 마개를 따더니 그 빈 컵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홍 대령은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렇게 해서 두 바퀴를 돌고 나니 사단장과 참모장 두 사람만이 멀쩡하고 모든 무관은 인사 불성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스웨덴 무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외국 무관 가운데 미국 무관만이 한국에서 단련된 탓인지 이를 악물고 견디고 있는 상태였다.
사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자리에 남은 사람은 사단장,참모장, 미국 무관뿐이었다. 15명의 무관이 모두 사단 의무중대에 실려갔다. 사단 의무중대는 난리가 났다. 한꺼번에 15명의 외국인 대령이 들어 닥쳐 링거 주사기를 꽂으랴 토하는 오물 치우랴 법석댔다. 그 가운데 영국 무관은 상태가 심상치 않아 야전병원에 후송됐다.
이상이 다음날 아침 채명신이 보고 받은 내용이었다. 채명신은 보고를 받자 전화를 걸어 사단장을 대라고 호통쳤다.
"야, 이 무식한 주정뱅이야, 나라 망신시키고 이게 무슨 꼴이야!."
채명신과 유창훈은 육사 5기 동기생이었다. 채명신은 마음껏 욕했다. 원래 그는 변명을 안하는 성품이라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만 되풀이했다. 그후 채명신이 확인하니 영국 무관이 이틀이 지났는데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채명신은 호통치며 빨리 야전병원에 찾아가 영국 무관에게 사과하라고 지시했다.사단장은 야전병원에 찾아가 영국 무관에게 사과하고 그를 위로하는 것으로 조니워커 해프닝은 끝났다.
◇화공법 고별작전 참관
1968년 10월.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월남에 도착하여 한국군의 작전을 지휘한지도 3년이 지나고 있었다.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이 에이브람스 장군과 교체되면서 채명신 장군에 대한 교체설도 청와대와 육군의 수뇌부에서도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육군본부는 채명신 장군에게 교체를 알려왔다. 채명신은 그 통보를 받고 마지막 작전을 참관해야 되겠다고 나선 작전이 백마사단이 실시하게 되어있는 맹호9호작전이었다. 순서대로라면 9호작전이 아닌 2호작전으로 해야 했는데 보수 성향의 사단장에 의해 한국인이 좋아하는 9자와 9사단의 9자를 선호했던 것 같았다. 이작전은 채명신과 육사5기 동기생인 유창훈 장군에 의해 지휘되므로 채명신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며칠 전 사이공 주재 외국군 무관의 조니워커 해프닝이 있은 다음날 유창훈 장군에게 너무 심한 힐책을 한 것에 대해 채명신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육사 동기생이라 하여도 지나쳤다고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8년 10월 11일. 백마사단은 무려 헬기 460대를 미군으로부터 지원 받아 06시부터 24개 중대를 일제히 공격에 투입 공중기동작전과 함께 지상 침투 양면 작전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되었다. 채명신은 이 엄청난 헬기가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는 장관을 보면서 감회에 젖고 있었다. 뒤떨졌던 한국군이 현대전에 익숙해진 모습에서 감동을 느낀 탓이었다.마치 소년처럼 채명신의 가슴은 설렜다. '이제 한국군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군대가 되었다고'.
월맹군과 베트콩의 요새로 알려진 동보산은 단 한 번 미군이나 월남군이 범접하지 못한 철옹성이었다. 암석으로 뒤덥힌 동보산 요새는 B52중폭격기의 융단 폭격에도 불구하고 적은 까딱 않고 암석 동굴에 숨어있었다. 제30연대장 양창식 대령은 암석 속에 숨어있는 적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뜻밖에 화공법으로 실시하겠다고 보고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채명신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적병을 불로 태워 죽이는 것인줄 알았는데 연대장 말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적이 암석 동굴에 숨어 꼼짝하지 않기 때문에 화공법으로 그 암석동굴에서 견디지 못하게 하여 적을 나오도록 유도하여 포획하겠다는 설명이었다. 사단장은 그자리에서 양창식 연대장의 화공 작전을 승인했고 옆에 있던 채명신 엮시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를 표했다.
1차적으로 디젤 100드럼과 휘발유 100드럼을 뿌린 다음 항공기에 의한 네이팜탄 공격을 가했다. 연대장이 예상한대로 불이 훨훨 타오를 줄 알았는데 불행이도 계속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불이 붙었다가 꺼지는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연대장은 비가 그치는 것을 기다리다가 화공 작전을 펴면서 화염방사기로 공격하니 숨었던 적이 견디지 못하고 동굴밖으로 튀어나왔다. 저항하는 적은 사살되었지만 손을 들고 나오는 적은 포획했다.이 맹호9호작전에서 백마사단은 파월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려 백마사단의 용명을 떨쳤다.
채명신은 양창식 연대장의 화공법 공격이 최초의 발상이라 신기해서 그에게 내막을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다.
"삼국지의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화공으로 승세를 굳힌데에서 착안했습니다."는 것이었다.
채명신의 생각으로 월남전이야 말로 최신 현대전과 수천년 전의 옛 병학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서는 마지막 고별작전인 백마9호작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채명신은 이 작전에서 백마사단장 유창훈 소장과 제30연대장 양창식 대령의 지휘력과 전술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사이공행 헬기에 올랐다.
훗날 채명신은 그의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 467쪽에서 그날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유창훈 장군에 의해 지휘된 백마9호작전을 끝으로 내 재임기간의 주요 작전의 배경과 효과를 비롯 전략 작전 분야를 마감하려 한다. 내 휘하에서 전투에 임한 모든 장병에게 사랑과 함께 경의를 보낸다.
베트남 전에서 우리가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내 확고한 신념이다. 대한민국의 위상 제고를 비롯하여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고 우리 국군이 세계 일류화를 달성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숨진 전우들에게 머리 숙여 명복을 기원한다. 이 회고록을 영현들에게 정중히 바친다.".
◇채명신의 엉뚱한 발상
월남전에서 주월한국군이 인도주의에 입각한 평정사업이 성공하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세계를 놀라게 하는 용맹성을 과시하자. 자유 우방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다시 보게 되면서 어려웠던 차관의 길이 뚤리고 경제원조의 손길이 뻗어가기 시작했다.
이무렵 호주는 한국인의 진취성에 대해 주시하기 사작했다. 원래 호주는 백호주의(白濠主義)를 표방했던 나라였다. 백호주의란 백인 이외의 인종에 대해서는 이민과 정착을 배척하는 주의를 말한다. 그러던 것이 월남전에서의 한국군을 보고는 이민정책을 바꿨다. 한국군 월남전 참전 군인에게 이민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었다. 이로써 호주의 백호주의가 사실상 폐지되고 황색 인종에 대한 차별을 없앴다. 1960년대 초기에 호주에는 단지 한국인 6명만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려 5만여 명에 이른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주에 이민 정착한 월남전 참전 용사에게는 매월 평균 2000달러의 연금까지 준다. 한국에서는 참전 용사에 대한 연금제도 자체가 없다.
월남전에 참전 이래 우리나라의 용역 업체들이 줄줄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전투부대 파월 다음 해인 1966년 5월부터 월남에 진출하여 첫 작업을 시작한 이래 1971년까지 용업업체가 벌어들인 외화는 2억 3천만 달러에 이른다. 당시의 화폐가치는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에 당시의 달러 가치로는 굉장한 액수의 돈이다.
1966년 10개 업체가 진출한 뒤를 이어 1967년에는 25개 업체에 이르렀고 월남 붐이 피크에 올랐던 1969년에는 진출업체가 무려 56개에 달했다.
우리의 용역업체에 종사하고 있던 기술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던지 주월미군 사령부가 국방성에 제출한 한 보고서에서 '한국인 기술자들은 1달러를 지불하면 1달러 37센트의 일을 해낸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사이공, 캄란, 나트랑, 퀴논, 다낭 등 5개 병참기지 건설과 항만 준설 등 한국 건설업체들은 활발히 공사에 참여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 우리 장병들이 적극 경계에 참여함으로써 베트콩의 위협을 막아주어 한국 건설업체의 신용도가 높았다. 특히 미군 당국은 '한국 건설업체가 없었으면 미국의 월남 평정계획에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군사작전과 대민심리전 및 지원사업 외에 추가적으로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공사청부전쟁'이었다. 한국군과 관계되는 공사는 100% 우리 업체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미군 관계 공사 또한 한국 업체가 잠식해 갔다.
월남전이 시들해지면서 용역 및 건설 등이 1971년부터 퇴조하기 시작했지만 월남에서 익힌 노하우와 신용도가 담보되어 월남 현지에서 곧바로 중동지역으로 옮겨감으로써 베트남 특수가 중동 특수로 이어진 점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군 전투부대가 월남전에 참전한지 1년이 지난 1966년 10월부터 제1진 장병들이 1년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뭔가 아쉬운 점이 떠올랐다. 귀국 후 계속 복무기간이 남아있는 장병은 어쩔 수 없지만 만기가 되어 전역을 앞둔 장병 중에서 희망자에 한해 현지 전역을 시켜 월남에 있는 한국 또는 외국 업체에 취업케 하면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에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로서는 채명신의 엉뚱한 생각이었다.그러나 현지 군사령관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고국의 고위층 승인이 없으면 안되므로 우선 국방장관에게 건의서를 보내고 대통령에게 서한 형식의 취지문을 올렸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 업체나 외국 업체 특히 미국 업체에 전역 국군장병의 취업이 가능한 지를 알아보았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대환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채명신에게 친서를 보내어 채명신의 착상에 찬사를 보내면서 적극 추진해 달라고 격려했다. 이어서 김성은 국방장관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 공문이 도착했다. 채명신은 우선 급여가 높은 미국 업체와 교섭을 했다. 결과 채명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높은 급여로 합의할 수 있었다. 월 급여는 350달러에서 500달러 수준이고 특수 기술직 특히 병기장교나 공병장교 등은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1966년 현재 채명신 중장이 받는 봉급이 4만 5천원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177달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350달러 이상의 급여라면 육군중장의 두 배 이상의 고액인 것이다. 채명신은 즉각 예하 부대장에게 희망자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졌다. 한국군과 한국의 명예에 관한 사안인 만큼 능력 별 구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67년부터 현지 전역과 함께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희망 업체에 취업케 했다.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미국의 빈넬회사의 경우 1968년 초 운전,요리,기계,전기,창고,노무 등 각 직종에 따라 다섯차례에 걸쳐 무려 1,040명은 받아들였고 우리나라 한진상사는 1968년 초 세 차례에 걸쳐 주로 운전사로 107명은 취업시켰다.
계속 이어지는 외국 업체들의 취업 요청으로 채명신은 즐거운 비명을 지를 형편이 되었다.
외국 업체에 취업한 우리 장병들은 해당 업체의 베트콩 기습에 대처하는 방위병 역할까지 맡아 회사로부터 특별수당까지 받는 경우까지 생겼다.
채명신은 우리나라 업체가 되었건 외국 업체가 되었건 불문하고 우리 장병을 취업시킨 업체에 대해서는 특별 지원책을 세워주도록 지시했다.가령 해당 업체의 중장비 정비에서부터 필요하다면 외곽 경비까지 해주었다.그러자 미국의 유명한 RMK 같은 대기업도 한국군 전역장병 유치에 나섰다. 그렇게 붐이 일자 한때 인원이 모자라 전역일자가 3개월 심지어 4개월이 남은 장병까지 취업시켰다.
확실한 수는 알 수 없지만 1967년부터 업체에 보내기 시작한 전역 장병 현지 취업자수 총계가 1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이 엉뚱한 발상이 한때 비판도 받았다. '군인이 전투 외 별 생각을 다한다' 고. 그러나 채명신은 전역 후에도 그 엉뚱한 발상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술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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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단 작성시간 14.02.04 저도 술한잔을 못하는 선천적 채질의 소유자로 소시적 군의관생활을 5년을 햇읍니다. 군생활중에 가장 고통스러웟던것이 상부에서 높은 분이 내려와 회식하는 자리였읍니다 무지막대한 군대식 명령으로 술을 권하는것으로 받아 마시지 않을수없는 고역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의미에서 받아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나가 화장실에서 전부 토하고 들어와 또 마시고 또 화장실가고하는 고역을 당했던 기역이 납니다.
정말 고처야하는 저질관습이였읍니다. -
작성자최단 작성시간 14.02.04 만기도레하는 장병들에 현지 취직 알선으로 높은 급여를 받게하신 채장군님의 부하사랑 나라사랑의 정신이야말로 종경과 찬사를 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