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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강 증오와 저주, 그리고 전쟁

작성시간15.07.10|조회수137 목록 댓글 0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없앨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 이 원론적 모순에 시원한 해답이 없는 것 또한 인류가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다. 자, 다음 이야기는 그 모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한번 들어 보기로 하자.

겨우 두 살 또래의 어린 아이 둘이서 방 안에 앉아 있다.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두서너 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인지 배고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이 애들은 쌍둥이다. 어머니가 잠깐 밖으로 나간 사이에 잠에서 깨어나 먹을 것을 찾고 있는 듯했다. 이때 아이들이 먹음직한 빵 한 조각을 발견했다. 동작이 민첩한 아이가 재빨리 기어가 빵을 먼저 집었다. 그러자 뒤늦게 기어간 아이는 먼저 빵을 집은 아이에게 빵을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빵을 먼저 집은 아이는 호락호락 빵을 내줄 리 없다. 기를 쓰고 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빵을 움켜쥐고 방바닥에 엎어졌다. 빼앗으려는 아이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아이들은 빵을 뺏기 위한 싸움에 대한 것을 어머니에게서부터 배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어느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다만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에서 서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싸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아이들의 싸움은 본능의 충족을 위한 단순 행동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능에 의한 싸움이지 다른 뚜렷한 계획적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들은 빵을 두 쪽으로 나누어 각각 자기 몫을 정해 주면 싸움을 그친다. 이 또래 아이들에게는 빵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선 배가 고파서 빵을 먹고 배를 채우면 족하다.

이 아이들은 차차 커가면서 더 큰 욕심이 생겨난다. 지각이 발달하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싸움을 말리기 위한 방법이 좀 복잡해진다. 한 개의 빵을 둘로 나누어 준다고 싸움이 가라앉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자기의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목적을 충족시키려면 서로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물건을 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워 다시 싸움이 벌어진다.

더욱 장성하여 여남은 살이 되면 이 애들에게는 헤아리기 힘든 욕망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이 나이쯤 되면 욕망이 더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단순한 식욕에서부터 소유욕으로 발전하면서 무한한 욕망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이 무렵이면 식욕에서 발단하는 욕구충족보다는 오히려 식욕 외의 물건, 즉 신기하게 생긴 물건이나 어른들이 아끼고 있는 귀중품에까지 눈독을 들인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자기에게는 필요가 없으면서도 남의 물건을 빼앗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식욕에서 소유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식욕보다는 판단력이 더 필요해진다. 그러므로 이때쯤이면 무조건 싸움을 걸지 않고 잠깐 생각한 후에 결정한다. 자기에게 승산이 있을 때에 한해 덤벼들지 무작정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본능에 의한 싸움도 지각이 발달하면서 차차 저울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싸움은 본능에 의한 욕구충족의 한 방편으로 발생하는 것이가장 원천적 의미를 갖는 전쟁의 기원(起源)이다.

다음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그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도 사건으로 확대된다. 그만큼 인간 심리의 다양성은 인간이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있는 한 이야기이다.

‘하느님’인 여호와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최초의 인간은 여호와의 지시를 위반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편안한 생활대신 인간의 고된 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는 동안 아담과 이브는 성교를 하여 인간으로서의 성에 대한 쾌락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브는 인간 최초로 임신하기에 이르렀다. 달이 차자 첫아들인 카인을 낳고 해가 지난 다음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맏아들 카인은 농사꾼이 되어 밭을 갈면서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는 목자가 되었다. 때가 되어 카인은 여호와에게 곡식을 예물로 드리고 아우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여호와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몹시 반기면서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났다.

여호와가 이를 보고 카인을 나무란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그렇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을 들은 카인은 분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분함을 참지 못하여 아우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카인은 쫓기어 에덴의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인은 아내를 얻어 성교 끝에 임신하여 아들 에녹을 낳았다.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모후야엘을, 모후야엘은 모두사엘을, 모두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라멕은 두 아내를 데리고 살았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실라였다. 라멕은 두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다야, 실라야, 내 말을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를 다치게 하지 말라. 죽여 버리리라. 젊었다고 하여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말라. 죽여 버리리라. 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곱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일곱 곱절로 보복을 받으리라.”

이 이야기는 인간이 갖는 원죄로 인한 최초의 살인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증오와 저주를 몰고 온 사건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인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인간의 원죄를 암시하고 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원인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차별 때문에 생긴 시기심이지만, 그 후 카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그 사건을 잊은 것이 아니라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기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차별을 받았을 때 생기는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심으로 동생을 죽이고서도 뉘우치기는커녕 카인 이후 장장 5대를 내려오면서 증오와 저주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원인으로 인하여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투쟁 본능의 발로이다. 또한, 죽인다는 행위는 투쟁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미워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대와 전쟁을 하고 싶다는 감정이다.

상호 간에 증오하고 저주하는 상태라면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전쟁은 인간의 한없는 욕망과 함께 증오와 저주로부터 원천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인류사회에 있어서 전쟁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인류가 활동하고 발전을 향해 전진하는 이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은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징벌이지만 긍정의 측면도 가지고 있다. 가령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서 전쟁의 혜택이 작용할 수 있고, 불균형 사회에서 균형 사회로 개조하기도 한다. 한편,불평등 사회를 평등 사회로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불의를 응징하는 정의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국가 간의 생존경쟁의 방편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그래서 국가마다 군대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힘쓴다.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이 전쟁이라는 피해야 할 재해를 줄곧 달고 사는 숙명을 안고 살아야 했다. 지난 역사에서의 전쟁 말고도 내가 겪은 전쟁만 해도 6·25전쟁과 월남전쟁이 있다. 이 전쟁들은 우리들의 이념과 우리들의 잘못으로 생긴 전쟁이 아니었다. 강대국에 의해 발단된 전쟁이었고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뒤집어쓴 전쟁이었다. 바로 지정학적 불리점이 우리의 희생을 몰고 온 것이다.

지난 전쟁의 국면이 바뀌면서 지금은 동족 간에 으르렁거리는 상호 증오와 저주의 국면으로 바뀌었다. 지정학적 숙명치고는 아주 참담한 형세로의 변화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정권과 희생을 대가로 하여 쟁취한 대한민국의 결정적인 대결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흘러간 역사를 통해 볼 때에도 현 상황에서의 동족 간 증오와 저주의 형세는 불행하게도 가장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정세를 헤쳐 나갈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이다. 모든 대한민국의 리더, 특히 국군의 지휘관들은 백척간두에 서 있다. 얼마나 우리가 중요한 시기에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책무의 그림을 정중히 그려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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