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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강 역사와 전쟁에서 찾는 교훈

작성시간15.07.10|조회수127 목록 댓글 0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볼 것 같으면 전쟁은 질서의 파괴자가 아니라 질서의 결정자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왜냐하면, 어쩔 수없이 발생하는 인간에 의한 의견 대립과 이해관계의 상충은 신이 해결해 주기 전에는 하나도 결말이 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여태껏 신이 해결해 준 사실은 그 옛날 신화에서 밖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대립과 벌여 놓은 복잡한 난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유일한 해결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이라는 불행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국가마다 이익을 관철하고 이익을 도모하려면 국력에 바탕을 둔 적절한 군사력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 군사력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군사력의 위세만을 내세워 상대방을 굴복게 하여 해결하든가, 그렇지 못할 때 군사력을 직접 사용하는 전쟁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의 군사력은 그 나라의 흥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쟁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지도자에 의하여 과도한 군사력과 과도한 군사 행동으로 멸망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쟁을 두려워하거나 군사력의 확보를 주저하였을 때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멸망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사실은 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에 기록된 사실은 경험을 통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입증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적정한 군사력의 구비와 국민의 상무정신 고취는 역사상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를 보전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쳐 왔으므로 국가 보전의 측면에서 전쟁과 역사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것은 역사에서 찾아야 하는 엄숙한 교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전쟁의 의미는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명제에 당면한다. 그것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인류의 공통적인 소망에 상당한 불쾌감을 안기는 일임에 틀림이 없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을 긍정할 때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면서 지구 상에는 상당 기간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고 많은 정치가나 군사평론가들이 전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의 소망일 뿐이지 전쟁은 국부적이나마 계속되어 왔다. 그 원인은 역시 인간의 의견은 항상 대립하며 인간의 이해관계는 언제나 상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질서의 혼돈을 인간 스스로 해결하지 않는 한 그 외의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이치에 당면하게 된다.

전쟁은 때로는 정치권력의 야망에 의해 터무니없는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무모한 전쟁 속에 뛰어들게 하여 자국민이나 상대국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커다란 불행을 남겼다. 이 경우, 참으로 인류 역사상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인 중요한 과오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된 이상 역사학자는 물론 정치가나 군사 지도자에게 중요한 교훈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류에게 있어서 무모한 전쟁으로 많은 인류가 죽고 자신마저 그 멍에를 쓰고 마침내 파멸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음 지도자가 역사 속에서 배워 알게 된다면 그 교훈은 가치가 있는 역사의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으로서 임진왜란 당시와 그 후 약300년간의 근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교훈의 일면을 확인할 수있다. 때는 임진년, 일본의 침략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야욕에 눈이 어두워 마침내 한반도를 침략하기에 이른다. 그는 단숨에 조선을 제압하고 대륙의 명나라까지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임진년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곳곳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단숨에 조선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한반도에서는 별로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군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면 남쪽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북쪽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하여 중요 도읍이나 성을 점령하였는데도 조선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남쪽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때문에 왜군은 병력 보충은 물론 무기, 탄약 등 병참물자의 수송에 장애를 받아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왜군 내에서는 괴상한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신출귀몰하는 초인적인 이순신 장군에 관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조선군은 말할 것도 없고 의병과 승병, 글만 알고 있었던 유생까지도 일어서서 왜군을 괴롭혔다. 당시 왜군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본 본토 사정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침략의 최고 결정자였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원흉이 죽은 뒤 왜군은 본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의를 가다듬고 철수로를 확보하려는 왜군에게 철퇴를 가했다.

“7년을 두고 무수한 동포를 살상할 대로 살상하고, 강토를 유린할 대로 유린하다가 이제 와서 저희들이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돌아가게끔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고 선언한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장수 진인의 철수로 제공 제의를 묵살하고 더욱 왜군에게 압박을 가했다.

“보라! 우리 민족의 원수를 갚을 때는 이때다. 한 척의 배도 못돌아간다!”라고 진두지휘하면서 퇴각하는 왜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뒤 마침내 통한의 전사를 맞는다. 이 역사적 사건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일본의 새 통치기관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역대 일본의 통치자는 이 사건을 교훈으로 알고 280년간 조선의 침략을 포기하고 화친과 통상관계를 맺어 왔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한반도가 탐이 나지 않아서 침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임진왜란 7년간의 국민적 저항과 마지막 퇴각할 때까지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섬멸적 타격을 가한 이순신 장군의 위세에 눌려 조선을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는 현명함이 있었기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부는 이른바 명치 건군이후 다시 망상에 사로잡혀 한반도를 병합하고자 하는 등 침략의 마각을 드러내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젊은 혈기와 경망한 일본 군국주의가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은 것이었다.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법칙(因果法則)은 가장 명확한 결론을 제시한다.

어느 중요한 사건들이 어떤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였을 때 원인의 내막과 그 결과를 그 당시에 알아낼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사실대로 밝힐 수 없는 많은 방해 요인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 그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 되어 버렸을 때는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고 그 결과가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것이 역사의 장점이다. 그러한 이유로 역사 속에는 교훈이 충만해 있다. 따라서 리더, 특히 지휘관은 전사戰史에 한정해서 교훈을 찾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다. 전쟁을 알려면 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사 자체는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요소가 포함될 수 없다.

오히려 전쟁은 전사 쪽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정치 분야나 시대적 배경에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지휘관으로서의 전략적 식견과 탁월한 통찰력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인식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더구나 분단의 비극 속에 있는 한민족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동족 간 사상적인 승리가 최후의 승리자가될 것이다.

예부터 역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행동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시대의 옳고 그른 점을 바르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날의 사실史實을 현실에 비추어 보며 앞길을 바로잡아 좀 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자, 6·25전쟁을 되돌아보며 거기서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6·25전쟁에 대한 역사는 현시점에서 살아 있는 매뉴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휴전이 계속되고 있고 상대해야 할 적이 바로 북한군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극동에 형성될 국제간의 역학관계를 미국 나름대로 전망한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미국은 전후 동북아시아에 등장할 세력을 통일된 중국과 대일 참전의 대가로 많은 이권을 확보하게 된 소련 그리고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여 이를 거점으로 한 미국 등 3대국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같이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어디까지나 강대국 내지는 국제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은 한반도를 독점하려는 소련의 전략적 음모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미국이 동북아시아 지역을 하나의 정책 대상으로 하되 한반도 문제는 부차적 정책으로 뒤로 하고 그 주변 열강들의 이해와 역학관계만을 고려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따라서 한반도는 미국의 정책상 결정적 비중을 두는 주요지역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의 부차적 고려사항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중국이 모택동의 공산정권에 의하여 통일된 이후 미국은 한반도를 안중에 두지 않고 오로지 일본열도만을 의식하는 전략으로 바꾸면서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기에 이르렀다.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이후,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남한과 북한 간의 군사적인 불균형과 현저한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증강과 군사 원조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미국은 당시 불확실한 정세와 부정확한 정부 판단으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군을 증강하면 북진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워싱턴 당국자가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하여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외쳐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자충수(自充手)를 두고 있는 꼴이었다. 미국은 이리하여 도전적 한국 정부의 돌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공군기는 물론 전차나 야포 등 주요 군사장비의 지원을 일체 하지 않았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의 대륙 장악 이후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소련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 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견지하고 조속히 대일본 강화를 실현해 유리한 대 소련 관계를 확보함으로써 일본열도를 미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하여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 문제에 대한 불간섭과 일본열도의 확보라는 전략개념하에 설정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마침내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에 의한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선언으로 윤곽이 드러났다. 이 선언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으로 밀려나자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3자의 야합은 급속도로 성숙하여 갔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군부의 수뇌들은 그 사태에 적극 대처하지 않고 향락, 부정부패,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돈을 자초하고 있었다.

1950년 초부터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여러 요로에서 포착되었다.

북한 당국이 남파한 무장간첩들이 체포되고 인민군 귀순병에 의해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더 확실해졌지만, 미국 정부나 극동 미군사령부조차도 그 정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측의 엄살이거나 북침 준비를 위한 음모쯤으로 평가절하하였다.

전쟁 발발 보름 전에 현장 확인차 특사 자격으로 미 국무성 고문 덜레스가 방한하였다. 그는 전선을 돌아보고 한국군 수뇌와의 회담을 마친 다음, 전쟁의 징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뒤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물론 덜레스 특사는 본국에 돌아가‘ 전쟁의 징후는 없다’고 보고 하는 한편 한술 더 떠 한국군의 방어태세는 완벽하다고 덧붙였다.

5월 10일,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신기자와의 회견석상에서 “지금 항간에는 5, 6월 위기설이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군은 실지회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즉각 북진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덜레스는 신성모의 말을 확인한 결과가 된것이다. 외신기자들은 즉각 본국에 타전하여 ‘한국군 북진준비 완료’를 알렸다. 그리하여 북한 정보에 캄캄했던 미 극동군 사령부나 워싱턴 당국은 북한군의 남침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군의 북진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 해프닝 외에도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남북 교역 명태사건으로 파면되었던 채병덕이 1950년 4월 10일에 다시 육군 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부임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군의 동태에 대한 정보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북한에서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마지막 작전회의를 개최하는 6월 10일에 전방부대 주요 지휘관과 육군본부 참모진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전방에 배치한 제1사단, 제7사단, 제6사단, 제8사단 가운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을 제외한 3개 사단장이 경질되었다. 또한,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자인 강문봉 작전국장을 대기 발령하고 장창국 대령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 일련의 인사이동은 실로 큰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6월 13일부터 20일 사이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전방 사단의 2개 연대를 예속 변경했다. 이런 실책 외에도 부대 이동에 앞선 3월에는 노후화된 차량을 정비한다는 구실로 총보유차량의 35%에 해당하는 526대를 회수하여 사용할 수 없게 한강 이북에 묶어 두었다. 이어서 M1소총을 제외하고 공용화기 일체를 정비한다는 구실로 각 전투부대 보유 공용화기의 약 30%를 부평 병기창에 입고 시켰다. 6월 18일에는 전쟁 발발 시 소총중대와 보병대대에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5만 분지 1 축척의 전술지도 전량이 무조건 회수되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조치는 이적행위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이 이적 행위가 우연한 사무착오에 따른 것이었을까. 더욱 의구심은 증폭된다.

6월 위기설에 대비하여 4월 중순부터 계속된 경계 및 비상사태를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북한군 공격개시 불과 28시간 전인 6월 23일 24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농번기 휴가로 부대가 병력이 부족하여 썰렁한 마당에 육군본부는 다시 6월 24일 토요일을 기하여 외출 외박 시행을 지시했다.

이날 밤, 육군본부에서는 장교구락부 개설 축하 파티를 열어 군수뇌와 미 고문관이 자정이 넘도록 주연에 빠져 있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들이닥칠 사상 미증유의 국난에 직면할 이 위급한 시기에 군 수뇌와 이들을 지원할 미 고문관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을 시작했는데도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오전 11시까지 연락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열거한 일련의 이적행위를 잘 살핀다면, 누군가 적과 내통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즉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 그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장본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지금의 남북 대치 상황에서는 이 의문을 풀 수 없다. 그러나 먼 훗날 남북이 통일된다면, 그때 북한 당국과의 내통 여부가 밝혀질 것이다. 북쪽 깊숙한 비밀 금고에는 그것들 외에 더 깜짝 놀랄 만한 비밀문서가 쌓여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중요한 이유는 바로 1950년에 일어났던 이 기괴한 사건들이 오늘까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적의 남침을 막아내고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였는데, 여전히 상황은 계속 중이다. 이런데도 종북세력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따라서 모든 리더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내는 슬기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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