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42강 우리 민족사에 대한 이해

작성시간15.07.10|조회수128 목록 댓글 0

먼저 강의에서 리더의 국가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특히 지휘관은 부하 장병을 통솔하는 데 있어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바로 애국심의 고취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교훈을 발췌해서 교재로 삼는 것이 가장 실용적임을 밝힌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애국심을 고취하기에 알맞은 무궁무진한 자료가 내장되어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끊임없는 침탈을 견뎌낸 위대한 국난극복사가 줄이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피기 전에 우리의 역사가 수난을 당한 내역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사에는 자랑스러운 면도 있지만 불행을 겪으면서 부끄러운 면도 있었다는 파란만장한 내막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부터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 상고대사를 홀로 떠맡고 있는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건국 이전의 상고대에 대한 모든 것이 이 책에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장밖에 안 되는 간단한 문헌 속에 우리 민족의 근원부터 시작해 건국 시조인 단군에 관한 것과 당시의 신앙, 민속, 언어, 사회, 지명, 사상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담겨 있다. 또한 <삼국유사>는 단군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단군에 대한 귀중한 문헌이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단군기’와‘ 고기’, 그리고‘ 신지비사’가 당시에 있었으며, 승려일연이 <삼국유사>를 써 내려가면서 위서(魏書), 위나라 글에 함께 옛 조상의 문헌에 의하여 건국신화를 정리해 나갔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역사학자들의 일연의 사상과 추리만으로 지어냈다는 악의에 찬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일본인 학자가 주장하는 내용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삼국유사>가 일본에 언제 처음으로 흘러 들어 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것이 일본 나고야의 도쿠가와 그리고 도쿄의 그들 신전에 각각 한 권씩이 전해지고 있으며, 일본인 학자가 오래 전부터 <삼국유사>를 읽고 여러 차례 연구 내용을 발표하였으나 대부분 <삼국유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하고 악의에 찬 비판 위주의 내용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일부 종교학자들이 자기의 종교와 연관하여 엉뚱하게 ‘환인, 환웅, 환검’의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단군왕검의 출현을 예수의 출현과 동일시하여 단군의 연대를 2천 년 정도로 줄이는 따위의 허황된 학설을 주장하는 등 <삼국유사>는 지금도 많은 수난을 겪고 있다.

<삼국유사>를 가볍게 보는 학자들은 그 내용이 허망하고 괴상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 괴상하고 허망한 그 점이 바로 <삼국유사>의 생명이며, 우리가 그로 인해 민족 사상의 뿌리를 자각하고 문화 민족의 긍지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어느 나라나 건국 신화는 허망한 데서 시작하고 괴상한 내용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유대인의 구약성경이 그렇고, 훨씬 이전의 수메르인의 신화가 그렇다. 허망하지 않고 괴상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신화가 아니고 오히려 후세의 사람들이 꾸며낸 글일 것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문화가 없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상고대인에게는 무엇이든지 신비한 사건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같으면 비교가 되고 증명이 될 수 있는 사건들이지만 상고대인은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고 처음 당하는 일이기에 신비한 것으로만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5천 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도 많은 종교들이 사이비교역자를 통하여 허망함 속에서 아우성치며 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하물며 상고대인에게 있어서 신비한 내용을 보고 하늘이나 신의 조화로 느끼며 기록하는 것을 가지고 지금 이 시점에서 부정적인 비판을 가한다는 것은 바르지 못한 생각임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전하는 내용이 허망하고 괴상할수록 신화적 신비성이 있는 글이요, 전설적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보는 것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밝은 마음가짐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할 때 당시의 거룩한 민족 사상의 편린이나마 알게 될 것이고, 오늘에 와서 그 정신을 되살려 민족 사상의 근간으로 삼고 싶다.

<삼국유사>를 통하여 한민족이 인류 역사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5천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한민족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민족이 예부터 있어 왔고 언어가 따로 있으며 한반도에서 오늘까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위대한 사상은 단군이 건국하는 과정에서‘ 홍익인간’을 내세웠을 때부터 싹터 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의 신화를 웃어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단군의 건국 신화 속에서 우리 민족의 사상의 뿌리를 찾아내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민족의 수난만큼 우리의 역사도 모지고 험한 수난을 겪었다. 특히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 군국주의 일본은 줄곧 조선총독부 관리를 비롯하여 심지어 헌병과 경찰을 동원, 전국의 학교 도서관,서점, 개인의 서재, 향교, 서당 등을 비롯한 학자의 가택까지 철저히 수색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역사 서적이나 고문서를 색출하여 무려 20만여 권을 몰수하여 일부 중요한 것은 자기 나라에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삼국유사>는 기를 쓰고 찾아 없애려고 애썼다. 거기에는 한민족의 뿌리인 고대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민족의 정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이병도를 비롯하여 역사를 전공한 조선인을 동원, 조선 역사를 편수한다는 구실로 우리 역사의 구절구절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부정적인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이때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입맛에 맞는 조선사로 개작, 일본 식민지 역사관이라는 비판을 받는 치부를 낳았다.

오늘날 학계의 일각에서 <삼국유사>의 폄 하나 부정적 역사관은 대부분 이때 개작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긍정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국수주의의 잔재가 아니고 조국애와 역사의 영속성 보전을 위한 당연한 국민으로서의 책무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