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우 불행한 현실에 처해 있다. 원하지 않았던 2천여 년 전의 분열된 삼국의 판도처럼 하찮은 개념의 차이로 최악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불행한 외세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따른 남북 분단에다 신라권의 영남과 백제권의 호남의 뜻하지 않은 개념, 권력, 지역감정의 대립상은 이 시대에 사는 우리의 가장 큰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정치가는 이를 두고 신판 삼국시대로 조롱하기도 한다.
더욱이 우리 군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급과 보직에 있어 철저한 차별책을 써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도태되는 슬픈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특히 장군 진급에 있어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호남 출신 대령들이 된서리를 맞았는가 하면,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영남 출신 대령들이 불이익을 당했다.
어디 군대뿐이랴, 정권마다 특정지역을 우대하거나 거부하는 따위의 인사정책이 암적 존재로 남아 있는 실상은 개선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적폐는 대한민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의 하나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각계각층 모든 리더는 삼국의 형성과 건국을 이해하면서 어떻게 민족 화합을 통한 통일로 지향했는가를 역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리더, 특히 지휘관에게 역사 전문가가 되라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강론하겠다. 그러나 지휘관은 국가관과 사생관 정립을 필요로 하는 직능이므로 기본적인 국사는 터득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서서 역사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이 대두 되면서 지난날까지 홀대했던 역사가 다시 학계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과거 정권에서 한때 역사를 필수과목에서 빼는가 하면, 심지어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임진왜란’을‘ 7년전쟁’이라고 바꿔 교과서등에 게재했던 한심한 시절도 있었다.‘ 7년전쟁’이란 임진년부터 정유년까지의 기간을 빗댄 것인데, 이 경우야말로 패배주의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하를 통솔하면서 부하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정신교육이나 훈시를 통해서 또는 자연스러운 대담을 통해서 국사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표명하는 것은 부하에게 믿음을 얻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민족의 긍지를 찾을 수 있고 국가관에 필수적인 사실史實을 기록한 내용이 우리나라 역사 속에 충만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강론하는 내용은 이것만은 꼭 알려야되겠다는 중요 부분만을 추려 강론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정사正史인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건국 연대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즉 신라는 서기 기원전 57년에,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으로 이들 삼국이 모두 기원전에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연대에 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일부 역사학자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상당한 역사 서적에서 흔히‘ 원삼국原三國’이라는 이상한 표현의 단어를 읽을 수 있다. 그런 영향을 받게 된 근원은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통치 시 조선 역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조직된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지사관에서 연유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의 연대를 건국 연대로 볼 수 없고 고대국가로서의 모체가 되는 집단사회의 시작으로 보아 삼국의 형성 과정으로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으로 인정할 수 없어‘ 원삼국’이라는 해괴한 표현으로 얼버무렸다. 물론 당시 삼국의 건국이 지금과 같은 국가 기능이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로 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대를 부정하거나 다른 학설로 이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삼국사기>를 무시한 학자의 오만으로 보지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삼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만큼 정확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유구한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삼국사기>를 기술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역사적 기록을 어느 누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 하나하나를 다시 소생시킬 수 없는 사안임을 먼저 유념해야 한다.
삼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고대조선은 한반도와 만주의 일부에서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한제국漢帝國과 맞서 국위를 선양했음을 먼저 밝힌 바 있지만, 한제국의 침략과 고대조선의 자체 내분으로 기원전 108년에 붕괴된 후 상당한 기간 북방지역은 한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으면서도 반도의 한민족은 부족집단에 의해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여 한족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중국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50여 년 뒤에 삼국의 출현은 민족의식과 국가에의 열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꾸준한 도전과 문화면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족에 흡수되지 않고 민족의 주체성을 지켜가면서 국가를 형성하였던 당시의 슬기는 민족의 자랑인 동시에 바로 이것이 독립의 의지였음을 알게 한다.
한제국의 남진정책에도 불구하고 부족사회는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세력을 크게 나누면 그 하나는 만주의 일부를 비롯한 한반도 북부지역의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이며, 남부지역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부족사회는 많았다. <삼국유사>에는 우리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많은 부족집단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렇게 많은 부족집단들의 군웅이 할거하다가 세력의 판도가 삼등분으로 결정이 난 것이었다. 특히 고구려의 건국은 주목할 만하다.
한족에 의한 계속적인 압력과 침략을 막아내면서 고구려 부족은 저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이 당시 고구려인의 대표적 정신은 기마민족으로서의 진취성이었다. 말을 탄 고구려인이 만주 벌판을 누비고 다녔을 것을 회상하여 본다면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삼국유사> 제1권의‘ 고구려’에 의하면 서두에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졸본주재요동계(卒本州在遼東界)』, 즉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는 중요한 기록이다. 왜냐하면, 만주의 요동 일대가 고구려의 옛땅이라는 것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의 형성을 논할 때 누구든지 고구려의 힘찬 기상을 강조하는 사관(史觀)이 여기서부터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중국의 고대 역사의 페이지마다 고구려인으로부터 받은 패전 기록으로 얼룩져 있음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북방의 고구려 건국에 비하여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신라나 백제는 비교적 순탄하게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신라가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해서 성장한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신라의 모체는 사로(斯盧) 부족이라 한다. 그러나 사로 부족은 진한의 한 부족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라를 형성하게 된 부족사회는 진한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신라는 건국할 당시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였다. 그 이유는 지역적인 관계 때문이었다. 즉 중국을 비롯한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이 심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서쪽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백제의 시달림이 없었던 때였으므로 진취적인 기상이 없었다. 다만 신라의 건국 이전부터 왜인의 소규모 침략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왜인에 대한 일본인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왜인의 한반도 침략이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른 날조된 내용이다.
왜구(倭寇)는 약탈을 일삼는 왜인을 두고 일컬었던 것인데, 일본 학자들은 왜구의 출현 시기를 13세기에서 16세기 어간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인의 약탈은 기원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첫머리에 『왜인행병, 욕범변, 문시조유신덕, 내환(倭人行兵, 慾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에 주의가 필요하다. 기원전 50년에 이미 왜인들이 군사를 몰고 변방을 침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에도 침략은 계속 이어졌다.
서기 14년에 『왜인유병선백여소, 양해민호, 발육부경병이어지(倭人遺兵船百餘遡, 凉海民戶, 發六部勍兵以禦之)』, 즉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해변에 침입하여 민가를 약탈하므로 왕은 육부의 군사를 뽑아 이를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신라의 건국 시기에 즈음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은 왜인의 침략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당시 왜는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기 전이고 극도의 혼란으로 국가의 형성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백제는 마한 50부족의 하나인 백제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또한, 북쪽에서 부여족이 내려와 나라를 이룩하였다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가 형성된 지역에는 마한 일부와 변한이 강력한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변한을 형성하고 있던 12개의 부족사회도 참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변한은 지금의 낙동강 서쪽의 전라도 남쪽 지방으로서 당시에도 뚜렷한 문화를 독자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모체는 북방인 일부와 마한 일부 부족 그리고 변한의 12개 부족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대조선이 멸망한 후 78개의 부족사회 난립시대는 지나가고 부족사회의 성장에 따라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각각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의 강론을 통하여 전개될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그결과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