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와 중화사상에서 싹튼 중국인들의 야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근래 주춤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서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은밀히 추진하면서 만주에서의 한민족 색채 지우기에 그침이 없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문제로 장차 한반도 침략의 구실 축적에도 경계가 필요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도 일본 못지 않은 경계가 필요하다. 중국에 대한 경계심의 원천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힘겨운 과정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주도하는 신라 조정이 보여준 결단은 한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보여준 드라마 틱한 승리의 쾌거였음을 우리 역사에 각인시켰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자칫 신라가 방심했더라면 중국의 야망대로 한반도는 완전히 그들에 흡수되거나 중국의 복속국가로 전락할 뻔했다. 그래서 지휘관은 물론 모든 리더가 지금부터 전개되는 강론에 주의하기 바란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唐은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신라까지도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기 위해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당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백제의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대신 그리고 장군들을 납치하여 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사자지금의 부여에 주둔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백제의 영토에다 웅진, 마한, 동명, 금련,덕안 등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와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시작했다.
뒤이어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고구려의 영토와 백성을 지배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케 하는 한편, 설인귀(薛仁貴)를 도호에 임명하여 그 밑에 9개의 도독부와 42주,100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인 중에서 당에 적극 협력할 사람을 골라 도독, 자사, 현령 등 관리에 임명, 중국인과 함께 다스리게 했다. 그리하여 고구려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당의 군정하에 예속시켰다. 이때 당의 장수 이적(李勣)은 고구려의 보장왕을 비롯한 많은 대신과 장군 그리고 왕족과 귀족 등 무려 20여만 명을 중국으로 납치해 갔다.
원래 신라와 당은 연합군을 편성, 연합작전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했던 것인데 두 나라의 속셈은 서로 엄청나게 달랐다. 왜냐하면, 당은 삼국 전체를 정복 후 당에 흡수시키거나 식민 지배하려 했고,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완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간악한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은 신라를 패망국 백제와 고구려처럼 식민지 지배를 위한 행정 절차까지 밟기 시작했다. 신라에도 계림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는 한편, 평양의 안동도호부에서 삼국 내의 도독부를 모두 관장케 하여 전체 한반도를 완전히 당이 지배하고자 획책하였다. 결국, 당 고종의 음흉한 계략이 드러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신라가 알게 되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싸워 승리한 동맹국을 패전국 취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폭거가 아닐 수 없기에 분노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신라의 왕은 신하들을 모아 대비책에 대해 의논하였다. 여러 가지 의논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김유신 장군의 강경론이 우세하였다. 즉 당군 축출을 결의한 것이었다.
이때 당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는데 신라측의 강경론을 포착하고는 일단 공격을 보류하기로 했다. 당의 장수들이 신라의 강경한 기세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당장(唐將)소정방이 당으로 돌아가 많은 포로를 바치니 당 고종은 기뻐하면서 소정방의 공적을 치하하며 위로하였다. 이어 당 고종은 궁금한 얼굴빛을 띠며 소정방에게 묻는다.
“어찌 이 기회에 신라마저 치지 않았소?”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은 웃어른 섬기기를 부모같이 하고 있으니 비록 작은 나라지만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고 소정방은 변명하였다.
여하간 이 일로 해서 당 고종을 비롯한 당의 속셈이 명백히 드러났다. 삼국의 지배설이 퍼지자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 지역에서도 백성들의 울분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군을 축출하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신라, 백제, 고구려 지역의 모두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축출을 위한 반당 투쟁에 앞장선 것은 백제인이었다. 백제왕조는 비록 멸망하였으나 백제인은 당의 군정에 반대하여 각 지역에서 치열한 투쟁을 감행했다. 특히 흑치상지(黑齒常之)는 3만여 명의 의용군을 거느리고 당군을 격파하여 한때 200여성을 탈환하는 등 과격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구 왕족이던 복신과 승려 도침 등이 의용군을 조직하여 사자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사자성에는 2만여 명의 나, 당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구 백제군의 공격으로 한때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백제인의 반당 투쟁은 백제왕조의 부흥을 꾀하는 귀족 간의 내부 싸움으로 말미암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이 또한 구 왕실의 왕자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백제의 반당 투쟁은 힘을 잃고 당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지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고구려에서도 반당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와 같은 대규모 투쟁이 아니었다. 반당 투쟁보다도 만주의 동북부 지역에 모여들어 고구려 부흥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신라는 더 이상 당으로부터의 수모를 참을 길이 없어 서기 671년에 드디어 백제지역의 당군을 공격하였다. 그 기세는 맹렬하였다.
순식간에 사자성을 탈취하고 당군을 몰아냈다. 그리고는 당이 설치한 도독부 대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를 당의 군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곳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당 고종은 대로하여 신라의 문무왕을 인정하지 않고 왕의 아우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새 왕에 임명하는 한편, 675년에는 신라군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당군을 맞이한 신라군은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사기충천하여 지금의 양주 및 한강 일대에서 당군을 통쾌하게 격파하였다. 당군 축출의 기세는 계속 이어졌다. 전세는 결정적으로 신라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당 고종은 다음 해에 드디어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 고종의 반도 지배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다. 포로로 잡아간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으로 임명하고 역시 포로로 잡아간 백제 왕자 융을 웅진도독대방왕으로 임명하는 등 그들의 괴뢰정권 수립에 온갖 꾀를 다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735년에 이르러 당은 지금의 대동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은 성취되었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 고구려의 활동무대였던 반도의 북단과 요동의 넓은 땅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원래 당이 신라와 연합작전을 취한 것은 신라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신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정복한 다음 원한이 맺혀 있는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다음 신라를 쳐서 굴복시키고 반도를 당의 식민지로 지배하다가 여건이 성숙되면 완전히 병합하기로 계획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당의 음흉한 계략을 분쇄하여 통일을 이룩한 것은 곧 한민족 역사의 단절을 방지하여 민족의 명맥을 되살렸다는 커다란 의의가 있다. 비로소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둘째, 삼국으로 분립되어 있던 반도가 하나의 국토로 통합되었다는 것은 한민족의 형성을 위한 결정적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민족이 각각 강대국에 흡수되어 버린다면 오늘날 만주 일대와 대륙 변방에서 멸망한 50여 개 민족의 신세와 다를 바없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통일은 그러한 위험요소를 배제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셋째, 삼국통일은 민족문화 형성의 모체가 되었다. 한민족의 전통문화가 상징적으로 하나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의 문화적 특성이 융합되어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마침내 위대한 한민족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통합된 우리 문화가 대륙화되지 않고 독특한 민족 고유문화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끝으로,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 고종이 삼국에 각각 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민족을 식민 지배하려 했을 때 신라는 물론 백제, 고구려 등 모든 백성이 하나의 목표,즉 당군 축출에 동참하였다는 사실은 민족의 동질성을 각인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통일신라 후기에 후삼국이 출현했었지만 다시 하나의 고려로 통합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따라서 분단된 오늘 우리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정신적 근원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북한 당국이나 일부 근시안적 역사학자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짓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결여된 사람의 편협성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북한 당국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 역사관을 발전시키고 있다. 북한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비판이고, 둘째는 신라의 삼국통일로 말미암아 요동지역과 반도 북단을 잃었다는 주장, 끝으로 통일의 주체가 남한에 있어 불쾌하다는 이유에서 비판적인 역사관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먼저 강론한 삼국통일의 의의와 비교할 때 논리의 근거가 편협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 세력을 축출해서 완성한 신라의 삼국통일은 현대에도 살아있는 리더의 교훈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