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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강 김춘추와 김유신의 파트너십

작성시간15.07.15|조회수125 목록 댓글 0

앞의 강론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북한의 역사학계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북한이 철저하게 고구려 중심의 역사에 비중을 높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신라가 외세, 즉 당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핑계를 댄다. 북한 당국이 6·25 남침 시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면서 중공군의 힘으로 겨우 명맥을 이은 사실은 잊은 것과 같은 논리이다. 더구나 라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 당군이 동맹국인 신라까지 정복하려고 획책하는 것을 신라군이 분연히 일어나 당군을 공격, 당 세력을 축출한 사실에 의미를 두고 보면 외세에 의한 통일이라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한편, 신라로 인해 반도 북단과 만주 일부 지역을 잃었다는 데 그 이유를 들고 있다. 그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는 내분으로 붕괴 직전에 있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그 주장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민족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민족정기를 세운 역사적인 쾌거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에 흩어져 있던 한민족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단일 민족의 주체성이 확립되었다.

신라의 위대한 삼국통일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조건중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불타는 민족통일 의지와 함께 그 두 영웅의 파트너십에서부터 발단했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그만큼 그들의 파트너십은 대업을 성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서 이 강론을시작하고자 한다.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진한의 부족사회가 발전하여 형성된 신라는 건국 초기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와는 달리 북방세력에 의한 침략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처하기 위한 진취적인 의욕이 미약해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소외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결여되어있었다.

둘째, 당시 백제 또한 부족 간의 세력 확장에 신경을 쓰느라고 신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자제하고 있었으므로 신라 자체 부족 간에 단란한 분위기가 유지되었고 외부 지향적인면은 도외시한 채 안일한 평화주의에 빠져 있었다.

셋째, 고구려는 한족문화나 북방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고유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백제 또한 바다를 통하여 대륙과 교역이 가능했으나 신라는 어느 면에서나 문화의 전래가 차단되어 있었다. 신라는 왜국 쪽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지만 왜국의 문화는 원시적인데다 오히려 신라로부터 약탈만 일삼았을 뿐 그들로부터 얻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처럼 내부지향적인 초기 신라가 대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구려는 만주를 발판으로 하여 중국을 통일한 수隋의 대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드디어 수의 멸망까지 보게 되면서 그 기세에 힘입어 국토를 넓히면서 동북아시아 최강자로 위세를 떨치기에 이르렀다.

수가 멸망한 뒤 당唐이 등장하였다. 당으로서는 오히려 고구려가 은인인 셈이었다. 왜냐하면, 고구려 때문에 수가 멸망하였고 당태종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정책은 수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강대한 고구려의 세력은 여전히 새 왕조 당에도 큰 위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태종은 수양제와는 구별되는 황제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황제의 한 사람으로 알려질 정도다. 이러한 당태종이 고구려의 침략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 정보를 입수한 당태종은 644년에 대군을 일으켜 그 일을 구실로 삼고 고구려 침략의 길에 나섰다. 당태종의 진두지휘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굴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서 당군의 군량이 바닥이 나기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하는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는 당과 첫 대규모 전투에서의 승리를 안시성에서 이루었다. 그 뒤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받았으나 계속 물리쳐 고구려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러한 때에 한반도의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와 제휴하여 신라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의자왕 또한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다급하게 되었다. 김춘추(金春秋), 훗날 태종무열왕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청하러 들어간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로 떠나면서 김유신과 깊은 우의를 다졌다.

“나는 그대와 함께 한 몸뚱이로 나라의 팔다리가 되었는데 지금 내가 고구려에 가서 살해당하게 된다면 그대는 그대로 있겠소?”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유신은 답했다.

“공이 만일 고구려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이 나라 사람을 본단 말이오.”

김춘추는 그 말에 감격하고 기쁜 나머지 김유신과 더불어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맹세하고 난 다음 김춘추는 말했다.

“내가 60일을 계산하여 돌아올 작정이니 만약 그 날짜가 지나도 오지 않거든 다시 만날 날이 없는 것으로 아시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이후 고구려에 도착한 김춘추는 고구려 왕을 만난 다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왕은 오히려 신라에 빼앗긴 문경과 죽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말에 김춘추는 “한 나라의 땅을 신하된 자가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신은 감히 그 명령을 듣지 못하겠소.”라고 잘라 말하니 고구려왕이 노하여 김춘추를 옥에 가두었다. 김춘추는 가지고 간 청포 300필을 왕의 측근 신하 선도해(先道海)에게 남몰래 선사하니 선도해는 술상을 차려 와서 서로 마시며 술이 얼큰해지자 김춘추에게 한 꾀를 가르쳐 주어 그 말대로 고구려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글을 올렸다.

“왕이시여, 그 땅은 원래 대국(大國), 고구려를 높여 일컬음의 땅이온데 신이 본국에 돌아가는 즉시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보내드리도록 하겠소.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저 해를 두고 맹세하겠소.”

고구려 왕은 그 글을 읽고 기뻐하며 김춘추를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목숨은 건졌지만 외교적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김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지 60일이 지났으나 돌아오지 않으므로 김유신은 용사 3천 명을 뽑아 놓고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듣건대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걸고 어려움에 다다르면 돌아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의지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죽기로 나서면 백사람을 당하고 백 사람이 죽기로 나서면 만 사람을 당하는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지금 나라의 현상賢相, 김춘추를 일컬음이 타국에서 구속을 당하고 있는데 무서워만 하고 어려움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되겠느냐?”

이 훈시에 감동한 용사들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살아남는다 해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오리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왕께 청하여 떠날 기약을 정하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 첩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본국에 보고 하니 고구려 왕은 그에 앞서 김춘추의 맹세도 들은지라 곧 김춘추에게 후한 예로써 돌려보냈다. 김춘추가 돌아오자 왕은 기뻐하여 김유신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여러성을 공격하게 하니 사기가 충천해 있는지라 싸움터에 나갈 때마다 승리하였다.

김유신 장군에 대한 일화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가령 싸움에 이겨 돌아와 임금께 보고할 때까지 자기 집이 지척인데도 들르지 않았다든가, 싸움터에 나가면서 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집안사람들이 다문 밖에서 나와 떠나는 장군을 기다렸는데 장군은 돌아보지 않고 한 50보 정도 집 앞을 지난 다음 말을 멈추고 부하로 하여금 자기 집에 가서 물을 떠 오게 하여 그 물을 마시며“ 우리 집 물이 아직도 예전맛이다”라고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싸움터로 향했다고 한다. 또한 자기 애마를 칼로 벤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있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우의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한 이유는 리더의 인간관계 그리고 파트너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음을 밝힌다. 특히 지휘관은 전우애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파트너 십은 곧 전우애로 상통하기 때문이다.

상관이나 동료 또는 부하와도 전우애에 의한 협조관계를 유지한다면 전투 시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강론에서도 강조했지만 <오자병법>에 기술된 오기 장군이 부하에게 베푼 온정으로 그 부하가 목숨까지 바친 예를 보듯이 부하는 상관의 배려에 매우 민감하다. 협조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인 요구는 효과가 반감된다. 상호 주고받는 데서 신뢰가 형성되고 그 신뢰가 몇 배의 힘으로 승화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가령 상관이 하나의 사랑을 부하에게 베푼다면 그 부하는 그 양보다 두 배로 응답한다. 따라서 전투 시 명령만으로 전승을 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둔한 지휘관이 갖는 편협성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파트너십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성사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교훈 정립을 위해서는 생각해 봄직하다. 한 나라가 힘차게 뻗어 나가고 또는 분단국가가 통일을 성취하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위대한 영도자나 탁월한 장군이 출현하여 스스로 역사를 개척하여 창조해 나갈 슬기와 용기 그리고 애국심이 샘솟아야 한다. 김유신 장군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위대한 장군이요, 김춘추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실력자인 문관과 병권을 가진 무관과의 돈독한 우의로 민족의 통일성업까지 완수했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후에 있었던 두 사람 간의 파트너십과 인간관계는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던 한반도 동남쪽의 조그마한 신라가 외교에 통달한 정치가 김춘추와 장군 김유신으로 인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영토를 넓혀가며 애국심에 불을 붙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성업을 성취하니 그 힘의 근원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사심 없는 파트너십에서부터 싹텄다고 할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과의 관계를 이해하자면 먼저 당시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를 알아야 한다. 골품제는 처음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骨制)와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頭品制)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법흥왕 때 하나의 체계로 통합했다. 왕족의 골품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어 있었고, 일반 귀족의 두품제는 1두품부터 6개의 두품으로 구분했다. 즉 골품제는 진골과 성골, 6두품을 합해 8개의 신분으로 구분한 것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성골 출신이 아닌 진골 출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골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성골만이 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제도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654년 신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자식이 없이 죽자 진골로서는 처음으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일화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김유신에 의한 영향이 큰 역할이 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이 두 사람의 철석같은 파트너십의 연원을 알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태종무열왕으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의 셋째딸 지소와 김유신은 결혼했다.

인연은 더 두텁게 쌓여 있었다. 김춘추의 부인인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둘째 누이이다. 두 사람 관계는 겹사돈으로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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