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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강 김유신의 마지막 충언

작성시간15.07.15|조회수134 목록 댓글 0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와 멀리는 중국의 일각에서 민족의 웅지를 펼쳐가며 세력 다툼을 계속하던 한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일단 분쟁이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신라의 삼국통일의 결과는 너무나 벅찬 민족의 감격이었으며, 민족의 염원을 성취한 역사적 의의가 컸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의 잔존세력들의 통일신라에 대한 항쟁 명분이 퇴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인은 연개소문의 흉참부도(凶慘不道)한 악몽이 잊히지 않았으며 백제인은 의자왕의 폭정을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신라의 어진 임금인 무열왕이나 문무왕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한편, 고구려의 잔존 주력세력은 말갈족과 제휴하여 발해를 건국하였으나 지배세력의 기반을 형성하기 위하여 내부 정비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고, 당과도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당의 침략으로부터의 방어가 일차적인 과제였기 때문에 통일신라와는 현상 유지 정책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백제의 잔존세력은 초기에는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듯하였으나 신라와의 항쟁과정을 통해 노출된 자체 내의 권력투쟁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자멸하고 말았다.

둘째, 당과의 관계이다. 당은 동맹국인 신라까지 병합하려다가 뜻밖에 완강한 신라군의 강력한 저항에 쫓기어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래서 신라를 제압하기에는 군사력의 한계를 발견한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많은 출혈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차에 동맹국인 신라로부터 받은 심대한 타격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불리한 조건에 도달하여 부득이 병력을 대륙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당은 장기간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막대한 군사력을 소모하여 자체 정권의 붕괴 위험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신라를 굴복시키려다 당이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당은 이로써 자체정비와 국력 재건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내외 정세에 따라 신라는 삼국통일의 벅찬 과업을 완수하였는데도 신속하게 국가체제의 정비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짧은 시일에 걸쳐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특히 김유신장군과 더불어 통일의 야망에 불타고 있었던 김춘추는 그 후 신라 29대 무열왕(武烈王)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왕은 박 씨 모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성골(聖骨)출신이어야 하는데 김춘추는 어머니가 김 씨였으며, 부인은 김유신의 누이였다. 따라서 성골이 아닌 그 다음 계급인 진골(眞骨)의 신분으로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열왕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진골에 의해 왕위가 이어졌다.

이 난제를 풀게 된 것은 김유신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과정으로 김유신의 정치적 비중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유신 장군의 뛰어난 통일전쟁에서의 전공으로 인해 삼국통일을 성취케 한대표적인 신흥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김유신장군은 그 후 무열왕뿐만 아니라 무열왕의 장남 문무왕으로부터도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661년 무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문무왕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만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업적은 틀림없으나 문무왕의 위대한 영도력과 통찰력 그리고 통일과업 완성에 대한 그의 업적도 중요하다. 문무왕에 대한 김유신의 충성심과 문무왕의 김유신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은 우리 역사에서 왕과 충신과의 관계에 경외로움을 갖게 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

문무왕 13년673년 봄에 요망한 별이 하늘에 나타나므로 문무왕은 무척 근심하고 있었는데 김유신 장군은 이를 헤아리고 왕의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이번 변괴는 재액이 이 늙은 신하에 있는 것이지 나라의 재난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라고 왕을 위로하였다.

그 말을 들은 문무왕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빛을 흐리더니 “그렇다면 과인의 근심이 더 심하오.”

문무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더욱 슬퍼하는 기색이었다. 문무왕이 노장군 김유신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문무왕은 김유신 장군이 물러난 뒤, 곧 신하를 시켜 김유신 장군에게 재앙이 없게 기원을 드리도록 조치하였다. 임금으로서 늙은 신하에 대한 하해와 같은 사랑을 보는 감회에 젖는다.

이해 6월에 김유신 장군은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때 문무왕은 친히 병상을 찾아 문병을 하고 울면서 말하였다.

“과인에게 장군이 있는 것은 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은데 만약장군에게 불운한 일이 생긴다면 장차 이 백성은 어찌하며 이 나라는 어찌 된단 말이오.”

그 말을 들은 노장군은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대왕이시여, 신은 불초하온데 어찌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다행한 것은 현명하신 폐하를 만나게 되어 쓰실 때 의심을 안 하시고 일을 맡겨 주시어 대왕의 밝으심에 의지하여 하찮은 공을 이루게 되어 삼한을 한 집안으로 만들고 백성들은 두 마음을 먹지 않게 되었으니 보다 평온한 상태는 되었다 하겠습니다. 신이 역대의 왕조를 살펴보옵건대 처음에 잘못하는 임금이 드물고 끝에 잘하는 임금이 적어서 애써 쌓아 놓은 공적을 하루아침에 망쳐 놓는 예가 많습니다.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신이 원컨대 폐하께서는 매사가 뜻대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음을 아시옵고 나라를 지키는 일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소서. 그리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시어 조정으로 하여금 위로는 화합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에 안정되게 마련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환란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나라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은 기록에 남은 김유신 장군의 마지막 말이다. 즉 왕에 대한 충언이다. 김유신 장군은 집 안방에서 673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 79세였다. 문무왕은 그의 부음을 듣고 슬피 통곡하였다 한다.

여기에 소개한 원문은 <삼국사기> 열전 제3 김유신 하편에 기록된 내용이다. 김유신 장군의 이 충언은 1,300여 년이 훨씬 흘러간 지금에 와서도 글 한 자 버리지 않고 그대로 리더십 교훈이 될 정치철학이며 리더의 도가되는 내용이다. 노장군의 이 충언은 왕에게 결례가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글의 내용으로 보아 충성심에 의한 진정한 충언으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왕뿐만 아니라 리더, 특히 지휘관은 처음 부임 시 단단한 결심으로 부하들을 이끄는 데 심혈을 경주하지만 시일이 흐를수록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배워야 할 리더십은‘ 처음처럼 끝까지 잘해야 한다’는 것과‘ 부하를 의심하지 않고 믿는 전제 위에 다스려야 한다’는 리더십에 있다. 더 나아가 리더는 아부나 잘하는 소인배하고는 멀리 하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잘 가려서 이끌어가야 한다는 리더십을 진언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안들은 우리가 살펴야 할 리더십의 원형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보기 드문 충성스러운 장군과 위대한 영도자를 보는 감회에 젖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과오를 범하여 근대사의 페이지에 오점을 남겼던 몇몇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이 마지막 노장군의 충언을 뜻깊게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들 둘 사이의 충성심과 애국심 그리고 이를 감싸는 무한한 사랑이 삼국을 통일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무한한 교훈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고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행복한 민족임을 깨닫는 데서 지휘관을 비롯한 모든 리더에게 왜 역사 공부가 필요한가를 인식시켜 주고 싶다.

삼국통일이 군사력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진리가 바로 여기에서 강조한 내용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다.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그리고 문무왕이야말로 그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주인공임을 알게 될 때 통일을 염원하는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할 것이다.

리더는 한 조직의 책임자이다. 따라서 규모가 크고 작건 간에 각자 맡은 소임을 다하면서 불타는 애국심으로 통일에의 의지와 사명감을 가질 때 통일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무릇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충성심이란 국가나 군주에게 바치는 절대복종의 마음가짐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모든 리더는 이해해야 한다.

충성심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뜻하며, 바르고 옳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숭고한 사랑의 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한 조직의 리더는 상급 리더에게 충성을 다할 때 그 리더의 하급 리더로부터 충성을 받을 수 있다. 자기는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서 부하로부터 충성을 기대한다면 리더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교훈으로 남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신 장군의 충성심은 모든 리더의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는 늘 부정적인 역사관이 따르게 마련이다. 북한 당국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폄하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근대사의 일부 사학자 또한 북한 당국과 같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 글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신채호1880~1936가 있다.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북한 당국과 비슷한 견해로 비판하고 있다. 더구나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을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깎아 내리고 있다. 그의 역사 이론에서 취할 것도 있지만, 신라의 삼국통일과 김유신에 대한 비난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열하다.

신채호는 사학자이지만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Anarchist였다는 면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모든 정치조직이나 권력,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국가관을 부정하는 사람의 편협한 역사의식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긴다.

끝으로 역사에서 내려오는 김유신에 대한 평가를 요약해 본다. 김유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777~836에 의해서 흥무대왕으로 봉해져 내려오며 그의 후손을 왕족으로 예우했다. 경주에 가서 신라 시대의 많은 왕릉을 살피다가 김유신 장군 묘에 가보면 그 규모나 시설들이 왕릉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김유신 장군을 사후 흥무대왕으로 봉했기 때문에 왕으로 예우한 증표라 할 수 있다. 특히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당대에 모든 백성이 김유신 장군을 성신(聖神)으로 추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내려오면서 줄곧 삼국통일을 이룩한 주역으로 김유신 장군을 김춘추와 함께 우러러 기리고 있었다. 이런 평가가 바로 정사正史의 역사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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