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1966년, 나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는 동안 망해가는 자유월남의 실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장개석의 중국 국민정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가던 과정도 살필 수 있었다. 그 두 경우를 보면서 국가의 멸망과 쇠락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통제 불능의 정부기능이 직접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한다. 그 여파는 부정부패가 말단까지 미치기 전에 국가로서의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한다.
둘째, 국가를 보위할 군대가 전투 의지를 잃고 적에 대한 개념에 혼선이 온다. 예를 들면 자유월남군의 지도층은 물론 말단에 이르기까지 자국의 대통령보다 적국인 월맹의 지도자 호찌민을 존경한다고 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전투를 하면서도 목적과 목표가 분명치 않다.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군대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장개석의 국민정부군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셋째, 국가 지도층과 대중인 국민과의 괴리 현상이 극에 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국가가 멸망하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신라에 의해 삼국통일이 성취된 것도 고구려나 백제가 멸망을 자초하는 길을 걷고 있었음에 가능했다.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백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원인으로 멸망하였다. <삼국사기> 제28권에 의하면, 백제는 신라군과 당나라군에 의하여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백제는 신라보다 월등히 국력이 강하여 신라와 전쟁을 할 때마다 백제군은 승리하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로 웅용 담대하고 결단성이 있어 무왕 33년632년에 태자로 삼게 되었는데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 간에도 우애가 깊었다. 그때 사람들이 태자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고 무왕이 죽자 641년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만 해도 당나라와 백제와의 관계는 오히려 신라보다 좋은 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전체적인 국력으로 보나 신라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었던 백제가 멸망하게 된 정확한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초기에 선정을 베풀었다. 당나라와의 관계를 위하여 각별히 신경도 쓰고 지방을 순시하면서 죄수를 살펴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하는 아량을 보였다. 김유신 장군의 마지막 충언처럼‘ 처음에 잘못하는 임금이 드물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무려 40여성을 함락시키는 등 파죽지세로 국세를 확장해 나갔다.
의자왕 4년에 신라에서는 김유신 장군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빼앗긴 성을 하나 둘 되찾기 위해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이 무렵 당나라 고종은 한반도에 3국의 전쟁이 끊이지 않자, 침략만 일삼고 있는 백제에 압력을 가하여 신라로부터 빼앗은 성을 되돌려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자왕이 계속 침공하므로 당나라는 자연히 피해를 입고 있는 신라 편에 서게 되었다.
백제의 의자왕은 승승 장구하는 기세에 도취되면서 술과 여인에 깊이 빠지기 시작했다. 정사는 뒤로 미룬 채 궁녀들과 더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회를 열고 음란한 행동을 서슴지 않으니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술만 퍼 마시고 연회를 쉴 새 없이 열게 되니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의자왕의 문란한 성관계에 따라 후궁의 소생만도 41명이나 되었고, 이들에게 모두 좌평(佐平), 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주고 국고를 축내게 하였으니 나라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 갔다.
이렇게 사직이 흔들리게 되어 가도 누구하나 왕의 처사에 대해 간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좌평 성충(成忠, 605~656)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가
“임금께서 술과 여인을 멀리 하시고 후궁의 궁녀가 너무 많으니 궁녀를 줄여 주시고 정사를 돌보아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아 주시옵소서.”라고 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은 그 충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크게 노하면서
“무엄한 놈! 저놈을 당장에 옥에 가두어라. 국왕을 욕하는 좌평은 필요 없다.”고 호령하니 성충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더욱 연회는 잦아졌고 왕은 주색에 빠지면서 기력마저 쇠잔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왕에게 간하는 신하가 없게 되었다. 좌평 성충처럼 옥에 갇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옥에 갇혀 있던 성충이 몸이 쇠해지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성충은 죽기 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오직나라를 염려하면서 왕의 행실을 바로잡을 것과 큰 전쟁이 날 것을 예고하고 군사적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묵살하였다.
다음 해, 의자왕 19년에 들어서자 웬일인지 백제의 각지에서는 요사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여우가 여러 마리 궁중에 들이닥치는가 하면, 한 마리의 백여우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기도 하고, 18척이나 되는 여인의 시체가 떠내려 왔다느니, 우물 빛이 혈색으로 변했다느니 하는 해괴망측한 유언비어가 그칠 사이 없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온 나라 안이 어수선하였다. 이때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하고는 곧 땅속에 들어가므로 의자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여러 사람을 시켜 그 땅을 파게 하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가서 한 거북이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라는 글이 쓰여 있으므로 왕이 그 뜻을 몰라 무당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백제는 만월의 형상으로 앞으로 일그러질 징조이고, 신라는 초승달 형상이니 소생할 형상이라 백제가 흉하게 될 징조입니다.”고 바른 대답을 하니 왕은 대로하여 그 자리에서 무당을 죽여 버렸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정사임이 틀림없다 하겠으나 그 정확성 여부는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그 당시의 어지러운 백제 사정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의자왕 20년,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병력 13만으로 김유신 장군의 정병 5만과 함께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는 평소의 대비 없이 갑자기 당하는 것이라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 용사 5천 명의 용전분투에도 불구하고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에게 패하여 계백 장군이 전사하기에 이른다. 백제군은 패하고 당나라 군사는 궁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최후임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후회로다. 내가 성충의 충성된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7백 년 종사가 나의 대에서 끝나는구나.”하며 원통해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당나라 군사에 의하여 궁성이 점령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백제는 32대 왕, 건국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부여에 가면 이때 불타 버린 쌀 낱알을 발견할수 있고 백마강을 연하여 낙화암이 있는데 3천 궁녀가 낙화와 같이 그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은 우리나라 고대사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백제 멸망 전의 의자왕이 많은 궁녀를 거느렸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 자료는 될 것 같다.
당시 백제는 76만 호였다는 기록이 있다. 1호당 대략 5명씩 잡으면 약 380여 만의 인구였으니 그 당시로써는 큰 나라였다. 한 지도자의 잘못으로 인하여 이렇게 허무하게 백제는 멸망한 것이다. 나는 예언가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을 살펴보면서 어쩐지 백제와 고구려 멸망 직전의 집권층을 방불케 하는 정황을 보는 것 같다.
3대에 걸친 세습 정권에다 핵무기로 무장한 막강한 군사력을 구비하면서도 흐트러진 인민의 삶, 군부의 장군들과 노동당 상층부의 호사와 부패, 오로지 그들만의 정권, 굶주린 다수 인민들의 삶, 여하간 북한 현실은 시한폭탄과 같은 위태위태한 시스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럴수록 우리의 대비와 각오도 한층 고조되어야 한다. 방만하게 경계를 늦추다가는 오히려 그 시한폭탄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
지휘관은 규모가 크고 작고 간에 그 조직에서는 왕과 다를 바 없이 부하를 장악하고 통솔해야 한다. 그래서 지휘관의 슬기는 곧 왕의 슬기요, 지휘관의 용기는 곧 왕의 용기와 다를 바 없다. 한 나라가 전쟁에 승리하고 분단에서 통일을 이룩하려면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존재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상 수많은 재상과 장군이 샛별과 같이 빛을 내다가 사라져 갔지만 다만 몇 명을 제외하고는 역사적인 가치나 위치에서 볼 때 16세의 화랑 관창만도 못한 것이니, 죽음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용기는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숭고함에 빛날 것이다.
의자왕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충언으로 간한 충신 성충은 의자왕의 오만으로 뜻은 이루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했지만,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충신의 귀감으로 살아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좌평 성충은 백제의 3충신으로 기리고 있다. 백제의 3충신이란 성충, 흥수, 계백을 가리킨다. 부여에는 삼충사(三忠祠)가 있는데, 바로 이들 3충신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충신 성충의 왕에게 진언한 내용을 요약한 나의 산문시를 여기에 게재한다.
역사 산문서사시 성충의 충언 박경석 좌평 성충이 아뢰옵나이다. 왕이시어 제발 술과 계집을 멀리하소서. 나랏일을 돌보아 오시던 지난날의 어질었던 길을 다시 찾으소서. 지금 나라 안은 정사가 흐트러져 백성들이 혼란과 굶주림 속에서 허덕이고 있나이다. 탐관오리는 저마다 자기 몫 재산 늘리기에 정신이 없고 벼슬자리 하나하나는 돈으로 팔고 사는 지경에 이르러 나라의 기강이 극심하게 문란해졌나이다. 또한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 데 있어서 극한 사치를 하고 망해전을 세우는 데 국고를 탕진하여 뜻있는 벼슬아치나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왕이시어 전하께서는 지난날 영웅되고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뛰어났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숙적 신라의 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쳐부수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왕을 섬김에 효도로써 다하고 형제와 더불어 우애가 지긋하여 해동증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거늘 지금 전하께서는 불과 십여 년 전의 바른길을 외면하고 매일같이 연회만 열고 있으니 어찌하시려 하나이까. 왕이시어 또한 간신을 멀리하소서. 신은 이미 전하의 슬하를 떠난 몸이지만 전하의 주변에는 간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아뢰옵나이다. 간신들의 귀에 솔깃한 말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예부터 이르기를 입으로 충성을 외치는 자치고 거짓 충신 아닌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주변에는 충성을 내세우면서 왕의 이름을 팔아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고 있는 자가 부지기수입니다. 왕이시어 그늘에 가려 있는 충신을 골라 쓰소서. 비록 전하께 귀에 쓴 말을 한 사람이라도 학문이 깊고 슬기가 뛰어나면 중책을 맡기소서. 충신이 빛을 보지 못하고 간신이 활개 치는 세상치고 잘 되는 나라 없나이다. 지금 나라 안팎은 뒤숭숭하여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정의는 찾아볼 수 없고 불의만이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 붉은 말이 북악산의 오합사에 들어가 슬피 울면서 법당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며칠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니 말까지 원통하여 종묘사직의 안녕을 위해서 절에 가 빌다가 죽었다고 야단입니다. 왕이시어 깨달으소서. 술과 계집을 멀리하소서. 어찌하여 궁녀들로부터 출생한 서자 41명을 모조리 등용하여 좌평을 삼고 식읍을 내리시어 또다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나이까. 백성은 가뭄과 고관들의 찬탈로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왕자까지 백성을 못살게 구니 이 나라 백성은 어찌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충신은 죽는 마당에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한 말씀 더 아룁고 죽겠나이다. 신은 항상 시국을 관찰하고 고구려와 더 나아가 당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있었나이다. 그런데 이즈음 반드시 전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을 아뢰옵니다. 왜냐하면, 북쪽의 고구려가 집안싸움으로 그 힘이 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신라만은 김유신이 군사력을 정비하고 외교에 힘쓰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신흥의 기세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우리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에 대비해야만 종묘사직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시어 빨리 전쟁에 대비하소서. 무릇 용병하는 법이 반드시 그 지형을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니 먼저 유리한 곳을 찾아 방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만약에 신라군이 육로로 들이닥치면 길목인 탄현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평원광야에서는 결전을 피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나라 수군이 뱃길로 침략하면 지벌포의 언덕을 넘지 못하게 해서 백강 입구에서 적을 물리치게 하소서. 만약에 적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반드시 그 전에 막아야 됩니다. 신은 죽는 마당에 임금을 잊지 아니하여 종묘사직을 길이 보전하고자 아뢰었나이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부디 헤아려 주소서. |
위 문장은 충신 성충이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에게 올린 충언 원문을 필자가 번안하여 산문시 형식으로 고쳤음.
의자왕은 이 충언을 묵살하였으며, 백제는 멸망함. 이 글에 나오는 ‘좌평’은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며 ‘ 탄현’은 지금의 대전 식장산 길목임.‘지벌포’는 지금의 금강 하구이며,‘백강’은 지금의 금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