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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강 고구려 멸망의 교훈

작성시간15.07.15|조회수135 목록 댓글 0

동북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만행에 이은 난정과 그의 죽음으로부터 야기된 골육상쟁으로 인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리더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줄거리에서 연개소문이 죽고 세 아들과 그의 동생의 4자간 권력투쟁은 더욱이 남북분단의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2011년 김정일의 죽음과 3대 세습의 김정은 정권의 출현은 마치 고구려 멸망 과정을 연상케 하는 드라마틱한 사유세계에 빠지게 함은 나만의 망상일까? 더구나 연개소문의 세 아들 남생, 남건,남산과 김정일의 세 아들 정남, 정은, 정철 그리고 연개소문의 동생정토와 김정일의 동생 평일까지 같다. 여하간 나는 3대 세습을 21세기의 특종 웃음거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한 것처럼.

나는 지금의 정세가 통일에의 가능성에 접근해 가는 흐름으로 보고 싶다. 그 성패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부정부패 등이 자칫 우리에게 족쇄로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 각계각층 모든 리더들이여. 다음으로 전개되는 고구려의 멸망과정을 잘 살펴 나름대로의 진리의 길을 탐색해 보기로 하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한 다음 고구려 최후의 왕이 된 보장왕은 본바탕이 너그럽고 학식이 풍부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결단력이 없고 모든 것을 연개소문이 전횡하므로 왕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사실상 모든 국정은 연개소문이 홀로 맡다시피 하고 있었으니 나라의 도덕과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았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한, 고구려 백성들은 영류왕이 살해당한 다음부터는 사실상 정부의 하는 일에 대해 냉담한 눈초리로 보는 한편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아 국민의 마음은 이미 집권 층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연개소문이 왕을 죽였다는 소식에 접한 당태종은 고구려 공략을 계획하여 몇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고구려 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아야 했다.

당시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 후 그 사실을 시인한 기록은 읽어볼 만하다.

“짐이 천하의 대병력을 가지고도 조그마한 고구려에 곤욕을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당태종이 그의 심복 이정에게 물었다. 이정은 그 말을 듣고 서글퍼하며 정중히 답했다.

“이는 도종(道宗)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당태종은 그 말을 듣고

“당시에는 짐이 너무 바빠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며 긴 한숨을 쉬면서 후회하였다.

‘도종이 해야 할 일’이란 다음과 같은 내막을 가지고 있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은 까딱하지 않고 강력히 저항해 옴으로 승리할 자신을 잃어버린 당태종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장군 도종이 이러한 처참한 광경을 보다 못해 한 방책을 세워 태종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고구려가 국력을 기울여 항거하고 있으니 이곳에서의 승부는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신에게 정병 5천을 주시와 그 근거지를 부수게 하면 평양성 안에 있는 10만 군중이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할 것입니다.”고 평양으로의 우회 공격을 건의하자, 당태종은 너무나 엄청난 모험으로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당태종은 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태종은 바로 전략과 전술 면에서 연개소문을 당하지 못한 것을 시인한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당과의 싸움에 승리하자 더욱 기고만장하여 교만하고 방자해지므로 날로 백성들은 고통 속에 빠져 가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무렵 고구려에서도 민심이 소란해지면서 백제에서와 같은 괴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즉 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고,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는가 하면, 늑대 떼가 서쪽을 향하여 가되 3일 동안이나 끊어지지 않았다 한다. 또한, 갑자기 기후의 변화가 심해지면서 지진도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당태종은 고구려 정복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수양제와는 달리 오만하거나 무계획적이 아닌 치밀한 계획하에 싸움터에서 부하와 더불어 고생을 함께 하면서 민심을 얻는 비범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당태종의 행동은 부하들을 감격하게 하고 용감히 싸우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이러한 강군을 물리친 것이었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강인한 지휘력이 중요한 역할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구려 모든 국민의 단결력과 당에 대한 저항심이 강인한 데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상무정신이 뚜렷하고 국가 보위에 대한 의욕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하여 이때처럼 국민개병(國民皆兵)이 철두철미하게 실천되었던 적은 드물었다. 현대의 개념으로 볼 때에는 철저한 예비군 조직과 민방위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국민은 한결같이 누구나가 다 뛰어난 군사라 하였다. 더욱이 남녀노소가 다 같이 대항하므로 도저히 고구려를 이길 수 없었음을 자인하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는 촌락마다 대오를 짜고 있었으며, 특히 정예군의 전기가 뛰어나 도저히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에 패한 당으로서는 대국으로 자처하는 그들의 자존심에 상당히 충격을 입었을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당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가득한 가운데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죽었다. 죽기 전에 당태종은 고구려 공략을 몹시 후회하였다 한다.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 고종도 고구려를 침략하려 하였으나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행사하면서 눈부신 국력을 한껏 자랑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처럼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던 대고구려가 갑자기 쇠퇴의 길로 내닫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토도 삼국 중 가장 넓으며 군사력도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하고 백성도 철저히 단결되어 있었는데 왜 멸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까?

쇠퇴와 멸망의 시작은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로 보며, 그 이후 연개소문의 난정에 따라 백성의 마음이 집권층을 떠났고 단결력의 와해로부터 연유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는 그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서기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 멸망의 기운은 전 국토에 확산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기록되어 있고, 중국측 기록과 일본의 역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사망 원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연개소문이 죽자 막리지의 대권을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차지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막리지로 불리던 직위 명칭을 한층 높여 막리지 앞에 대자를 붙여 대막리지(大幕離支)로 부르게 하고 삼군대장군을 겸임하는 한편 자기 아버지 이상으로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보장왕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연남생은 국정을 맡아 그 위세를 자랑할 양으로 나라 안의 여러성을 순시하게 되었다. 연남생은 두 아우 남건과 남산을 남기어 놓고 뒷일을 그들 형제에게 맡겼다. 이때 누군가가 두 아우에게 접근해서 이르기를

“남생이 그대들의 직위가 자기와 가까운 것을 미워하여 머지않아 제거하려 생각하고 있으니 먼저 대비책을 세워 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처음 두 아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지방에 내려가 순시 중에 있는 대막리지 연남생에게 말하기를

“두 아우가 형이 돌아와서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염려하여 형을 가로막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고변하였다.

연남생은 궁금하여 몰래 심복 부하를 평양에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눈치를 채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두 아우가 그를 잡아놓고 심문을 하니 연남생이 보냈음을 자백하였다. 그러자 두 아우는 연남생의 음모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두 아우는 왕의 명령이라 하여 연남생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연남생이 소환에 응하지 않으니 그의 아들 현충을 죽였다.

이렇게 하여 둘째 연남건이 막리지의 직위에 올랐다. 연남생은 동생에게 잡힐까 두려워 달아나 만주의 국내성을 점령하고 글안 말갈의 군사와 함께 당에 투항, 귀순하였다. 수, 당 모두 고구려에 대한 통쾌한 승리를 한 번도 거두지 못했던 그들이었으니 고구려의 내분은 당에게 하늘이 내려 준 좋은 기회라고 좋아했다. 그리하여 귀순자 모두에게 후한 대접으로 맞이하는 한편 각 직분에 버금가는 벼슬까지 내렸다.

어디 그뿐이랴. 권력권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12성, 763호, 3,543명을 포함한 고구려의 영토 일부분을 떼어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처럼 거듭되는 집권층 반역자의 발생은 고구려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쇠잔케 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고구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고구려는 스스로 멸망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나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 이야기는 마치 옛 소설과 같은 내용이다. 대고구려에서 일어났던 집권층의 실재 이야기 같지 않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우리나라 고대 정사인 <삼국사기>‘고구려본기’제9와 제10 ‘보장왕 상·하’ 기록에서 확인한 내용이며, 중국측 기록도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중국측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띈다. 신라와 당 연합군이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당태종의 시어사(侍御使)인 가언충(賈言忠)이 명을 받고 요동 일대의 고구려와의 접경지대를 돌아보고 돌아왔다. 당 고종이 궁금하여 시어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고구려의 형편은 어떠하며, 앞으로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시어사는 답하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옛날 선제先帝, 당태종을 이름께서 고구려를 뜻대로 못하신 것은 적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이 죽었고, 그의 아들 삼형제가 자기들끼리 틈이 나서 장남 연남생은 우리에게 항복하여 우리의 앞잡이가 되어 적의 사정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의 장수는 충성스럽고 군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에서 보는 고구려의 취약점은 분명한 고구려의 허점이었다. 집권세력이 분열되어 반란을 일으켰다면 곧 백성도 전의가 흩어질 것이므로 전체 방위체계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구심점이 없어진 집단은 무력한 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내란 속에 빠져 버린 고구려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당군을 당해낼 수없었다. 순식간에 요동 일대의 많은 고구려의 성이 함락되자 패잔 고구려군은 평양으로 쫓겨 갔다.

또한, 신라군은 남쪽에서 북진하여 무풍지대를 달리듯 평양에 육박하고 있었다. 드디어 고구려의 운명은 풍전등화같이 되어 버렸다.

수도 평양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포위당하여 한 달 남짓 최후의 안간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국난을 극복 못 하고 서기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건국 이래 28대 왕, 705년간 계속되었고, 연개소문이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그의 아들 삼형제와 아우의 정권 다툼이 단초가 되어 동아시아 최강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 멸망의 징후는 첫째 연개소문에 의한 영류왕의 시해에서 시작됐다. 영류왕을 비롯하여 중신 백여 명을 한꺼번에 몰살한 사변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규모가 큰 정변이었다.

처참한 살육으로 보장왕을 허수아비로 세운 연개소문의 무자비한 독재정치는 참혹 그대로였다. 마치 지금의 북한 김정은 정권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던 동안에는 그런대로 독재철권정치로 지탱해 갔지만,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 정권은 연개소문의 아들 삼형제와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 사이의 권력 싸움이 시작되자 멸망의 길을 결정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끝으로 민심의 이반이다. 철석같던 국민개병 체제가 일시에 붕괴된 것이다. 고구려 말기를 잘 살펴보노라면 어쩐지 북한의 현실이 비슷한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아들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목이 꼭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반목과 유사하다.

근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이버 시스템의 발달로 인터넷이 민심 구석까지 침투하면 김정은 정권은 견뎌내지 못한다고 했다.

내 생각도 같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붕괴 과정에서 일어나는 받아들이는 쪽의 대비태세가 문제로 대두된다.

당시 신라처럼 김춘추, 김유신 두 영웅과 같은 민심을 등에 업은 지도자의 출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오고 있다. 즉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지도층이 이 난국을 수습할 대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군의 지휘관은 대비태세 1순위에 해당한다. 정부나 군이 통일과정을 이루어 가던 신라의 조정과 신라군처럼 대비할 수 있다면 남북통일은 우리 세대에 성취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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