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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강 독재자의 말로

작성시간15.07.15|조회수151 목록 댓글 0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는 이탈리아의 역사가이며,정치학자이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책자는 <군주론>이다. 흔히 양육 강식의 폭군 지상주의자로 낙인 찍혀 세상은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 저서 또한 부정적 의미로 인용된다.

마키아벨리가 저술활동을 하는 동안 전 유럽에는 역사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마틴 루터의 종교혁명으로 유럽은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에 빠져 이탈리아는 강대국들의 싸움터로 변했으며, 마키아벨리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 무렵에 쓰인 <군주론>은 수식어도 없이 직설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마키아벨리 자신도 팸플릿이라 할 만큼 하찮은 글이었다. 당시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문제의 <군주론>이 처음 출간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1532년이었다.

마키아벨리즘은‘ 정치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반 도덕적 비 윤리적 수단이라도 허용된다’는 주의, 파렴치한 권력정치, 추악한 현실정책, 또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주의를 가리키며, 이러한 주의를 취하여 행동하는 자를‘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취할 술책으로서 힘 있는 사자와 약은 여우의 두 역할을 해야 하며, 모든 덕성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꾸밀 필요가 있고 필요하다면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등 당시의 기독교적 윤리와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근대의 일부 정치가나 권력자에게는 성서와 같은 역할이 되어 왔다는 데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쿠데타의 주동자는 마키아벨리의 이론에 자위하며 <군주론>을 마치 쿠데타 합리화를 위한 교범으로 삼아온 결과 그 폐해가 근대 독재정치의 비극으로 나타났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의해 고무되어 자국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면서 신처럼 군림하던 세기의 독재자들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갔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이라크의 후세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는 새로운 질서로의 항진이 시작되었다.

특히 2011년에는 무려 6명의 독재자들이 처참하게 죽거나 몰락했다.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 코트디부아르의 그바그보, 예멘의 살레, 튀니지의 벤 알리, 북한의 김정일이 그들이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일부 독재자들이 국민을 노예와 같이 부려 먹으며 황제처럼 호사를 누리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이 대표적인 독재자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난 시절과 같이 안주할 수 없는 불안한 환경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버드 대학의 리더십 전문가 조지프 나이 교수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이런 현상에 대해 많은 비평을 쏟아내고 있다. 즉 그가 주장해 온하드 파워 리더십에 대한 비평이다.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리더십을 전형적인 하드파워 리더십으로 비판하면서 옛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노자나 장자의 소프트파워 리더십에 관심을 나타냈다. 바로 그 전형이 소프트파워 리더십이라는 주장이다.

조지프 나이 교수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상형 리더십에 불과하다. 가령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장자의 리더십을 살펴보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역경에서도 불만을 품지 않고, 영달을 해도 기뻐하지 않고, 실패를 해도 좌절하지 않고, 성공을 해도 자만하지 않는다.』

바람직한 리더의 조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그가 요망하는 수준의 지도자의 조건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결국, 그가 원하는 지도자상은 희망 사항에 그치고 만다.

장자는 기원전 4세기경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과 종교사상가이다. 그가 바라는 리더십이 현대에 적용될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이상형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지프 나이교수가 그 사정을 모르고 소프트파워 리더십 전형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그는 리더의 조건에 근접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 또한 그가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많은 독재자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고구려 멸망을 자초한 연개소문의 존재는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한다. 리더의 리더십과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 분단의 여파는 역사학계에도 몰아쳤다. 남한은 역사의 초점을 신라 중심으로 두고 역사를 발전시키는 한편, 북한은 고구려 중심으로 역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남한은 비교적 공정하게 평가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역사도 상당히 관심을 뒀다. 반면, 북한은 철저하게 고구려 중심의 역사를 고집하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극렬히 비판하고 부정적인 시각에서 취급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인 시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외세당나라를 업은 통일이라는 것과 신라로 말미암아 반도 북부는 물론 만주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신라의 삼국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편협한 역사관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역사적인 중요성에 있어서나 민족의 첫 단일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위대한 민족의 성업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고구려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북한이 바라는 고구려 중심의 통일은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의 고구려는 왕족, 귀족, 문과 무 등 분열과 내분에 바람 잘 날이 없는 혼란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혼란의 계기를 만든 장본인인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대인 대대로’의 고관직에 있었다.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그 뒤를 이어 고관직을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나,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의 성질이 잔인하고 횡포함을 미워하여 계승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자기 머리를 두들기며 뭇사람에게 크게 사과하면서

 “만약 제가 옳지 못한 처사가 있을 때는 비록 그 관직에서 내쫓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 한 번만 보아주십시오.”하며 머리를 숙이니 여러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기어 드디어 아버지의 관직을 가까스로 계승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는 원래 거족巨族 출신으로서 가문은 좋았다. 겨우 명예를 찾은 연개소문은 장성(長城) 구축공사의 총감역(總監役)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 약속과는 달리 사사건건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무용이 뛰어난 반면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흉잔부도(凶殘不道)하므로 대신들이 지레 겁을 먹고 영류왕에게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은밀히 상소하는 등 연개소문을 제거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을 없애자는 데 합의를 이룰 무렵, 이 기밀이 누설되면서 연개소문의 귀에 들어갔다.

연개소문은 불타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면서 은밀히 한 계책을 세웠다. 그의 부하들을 소집하여 마치 사열식을 거행하듯 준비를 하면서 술과 안주를 성대히 마련하고는 대신을 비롯한 여러 대관들에게 행사를 참관해 달라고 초청하였다. 대신과 대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신과 대관이 모두 도착하자 연개소문은 매복시켰던 부하와 함께 일제히 달려들어 이들 대신과 대관을 모두 잡아 죽이니 이때 죽은 자가 무려 백여 명에 달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연개소문은 그 길로 궁중에 달려가서 영류왕까지 살해하여 여러 동강을 내어 구렁텅이에 버리고 영류왕의 아우를 형식상의 왕으로 앉히니 그가 고구려의 마지막 비극의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수상에 해당)가 되어 나라의 모든 권력을 다 쥐고는 천하를 호령하기에 이르니 주위의 고관들은 물론 고구려의 모든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연개소문은 몸이 장대한 데다 얼굴은 무섭게 생기고 오도(五刀), 다섯자루 칼를 차고 다니니 사람들이 겁을 먹고 그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한다. 또한, 말에 오르내릴 때 귀인이건 무장이건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그가 행차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지어 앞잡이가 크게 소리를 외치게 하여 사람들이 다 달아나되 숨기를 구렁텅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았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포악무도한 독재를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구실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코자 하였으니, 때는 보장왕 3년인 서기 644년이었다. 당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면에서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방어태세를 견고히 하고 안시성,건안성, 신성 등 요동 지방의 요새를 굳게 지켰다. 특히 고구려는 안시성을 10만 대군으로 굳게 방어했다. 당군은 총력을 다하여 공격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성 안에 있는 고구려군과는 따로 편성된 고구려, 말갈 연합군 15만 병력으로 당군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쌍방 60여 일간의 교전이 이어졌지만, 당군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는 수모를 당했다. 고구려군의 대승이었다. 중국측 기록에도 안시성에서의 대패를 인정하고 있다.

을지문덕 장군과 연개소문에 의해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 국가인수와 당을 상대하여 싸울 때마다 대승을 거두고 있었으니 이 당시의 고구려는 동아시아 최강국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태종은 647년, 648년, 655년에도 거듭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에 의해 침략이 좌절되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의 옛 문헌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내용은 왕과 왕족 그리고 대신, 대관들을 죽인 포악무도한 괴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경극(京劇)이라고 일컫는 중국의 전통적 연극에서는 연개소문을 귀신으로 삼고 악한 면과 독한 면을 함께 연출하고 있다. 또한, 연개소문을 동북아 전역에 걸쳐 최악의 대역 죄인으로 묘사한다.

이런 연유로 하여 일부 우리 역사학자 가운데 연개소문의 행적을 두둔하는 듯한 학설도 더러 있다. 그들의 주장은 연개소문이 당을 대패케 하여 분한 나머지 중국 측이 의도적으로 포악한 인물로 과장하여 묘사해서 실제 이상으로 나쁜 인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과 싸워 대승을 거둔 영웅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학설은 인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의 기록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정사인 <삼국사기> 열전9(列傳九)개소문(蓋蘇文) 제2항목에 명백히 기록됐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참고로 한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 또한 중국측의 기록과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중복된 내용만 인용하였다.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에 죽자 맏아들 연남생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연남생은 아버지의 막리지 직위 앞에 한술 더 떠 대(大)자를 붙여 대막리지가 된 후 삼군대장군까지 스스로 겸직하였다. 이리하여 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보장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권을 전횡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둘째 연남건, 셋째 연남산 형제와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각각 야심을 품고 대권을 쥔 연남생에게 맞서니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바로 이들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가 멸망을 자초했기에 신라,당의 연합군이 고구려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구나 연개소문의 일방적 공적 부각도 합당하지 않다. 당과의 승리는 고구려군의 승리이지 그 공적을 연개소문에게 독점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간 대고구려는 연개소문으로 인해 흥하고 연개소문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 말기에 있어서의 연개소문은 당의 침략을 여러 번 물리친 승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원래 냉혹한 면이 있다. 선과악을 분명하게 가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역사에서 공적이 크다 해도 대역죄인이나 독재자, 쿠데타 등의 전력이 있으면 장군 호칭을 붙이지 않을 뿐더러 그 공적도 빛을 잃는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도 빛나는 업적을 성취하였음에도 늘 칭송과 비판의 대상에 오르내리는 독재자, 쿠데타 주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이 그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6·25전쟁을 현명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4·19혁명을 일으키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성취케 하는 한편 쿠데타로 집권했고 영구집권을 꾀했다. 한결같이 두 대통령은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전두환은 12·12 쿠데타의 앞잡이면서 독재자였으나 뚜렷한 공도 없이‘ 광주의 한’과 국군 및 장군의 명예를 더럽힌 후과만 남겼다. 이제 한민족은 북한의 김정은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할 일이다.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동안 인류는 눈을 떴다. 물론 아직 남은 몇몇 눈먼 국가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20세기와는 분명히 다른 의식세계로 지향할 것이다. 선동적인 정치가에 의해 맹목적으로 동물처럼 추종하는 일은 차츰 정리될 것이다.

지도자는, 리더는 눈 뜬 대중을 의식하는 리더십으로 마음을 정해야 한다. 이제 서서히 선동과 속임수가 먹혀 들지 않은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류가 바라는 이상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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