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자기 성찰과 함께 국가관 확립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국가관은 사생관(死生觀)으로 뒷받침될 때 더욱 리더의 빛나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더구나 군대의 지휘관은 사생관 확립 없이 그 자격을 형성할 수 없다. 모든 리더에게 묻고 싶다. 국가는 누가 지키느냐고, 어떻게 하여야 지킬 수 있느냐고. 나는 전장에서 야전지휘관으로서 겪은 그 경험에서 추출해낸 앞의 질문에 가장 알맞은 대답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알리고 싶다. 전장에서 전우가 죽어갈 때 생각했고 전장에서 부하가 전상으로 신음할 때마다 다시 생각나는 것이 이 의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모든 리더와 함께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싶다.
조국은 나의 것도 아니고, 너의 것도 아닌 우리들의 것이기에 위기에 당면하면 모든 리더가 홀연히 일어나 조국 수호의 선도자로서 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역사를 통하여 국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의 조상들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단결하여 국난극복의 역할을 다하였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사생관이 뚜렷하게 서 있는 국민이 많은 국가는 어떠한 국가적 시련도 극복할 수 있으며,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생존할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인의 죽음을 말할 때, 가장 돋보이고 빛나는 것은 역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생전에 이룩한 위대한 인물도 그 죽음이 빛나지 않으면 후대의 사람들에게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의 사생관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평소 죽음에 대한 개념이다. 그는 늘 인생필유사 사생필유명(人生必有死 死生必有命)이라는 사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죽고 사는 일에는 반드시 천명天命, 타고난 수명이 있다는 신념이었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둘째는 싸움에 임해서의 사생관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即死 必死即生), 즉 싸움에 임해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기로 마음먹고 싸우면 산다는 각오였다. 이 두 사생관의 개념은 지휘관은 물론 모든 리더가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본분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인류 역사를 통해 회고해 볼 때, 이순신 장군처럼 뚜렷한 사생관으로 살다가 그 신념을 따라 전투지휘의 승전 끝자락에서 전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순국은 어떤 죽음보다도 귀감의 으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용기의 결핍이기 때문에 큰일을 성공시킬 수 없을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용기의 표출이기 때문에 만사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7년간의 기나긴 전쟁에서 우리 겨레가 왜병에 굴복함이 없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 사생관으로 무장한 애국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죽음으로 인하여 역사에서 더욱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가 있었는데도 자기의 소신을 다 밝히고 악법이지만 자기 나라 국법이라며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무조건 국가에 대한 권위를 존중한 것을 감명 깊게 받아들이면서 학문적으로 국가관을 논할 때는 꼭인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였음에도 한 마리의 모기에 의해 말라리아로 하찮은 죽음을 당하여 그의 업적은 별로 빛을 보지 못한다. 명장 한니발은 위대한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자살로써 생을 마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더욱 감명을 준다. 살았을 때의 위대한 공훈을 간직하면서 싸움에서 이기고 패전 직전의 일본 수군을 바라보면서 죽어갔다.
전 대통령 노무현은 검찰의 조사를 받던 중 충격적인 자살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부 국민의 추모 열기가 상상을 초월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자에 대해서는 그 동기가 어떻든 비통함 속에서 장례가 냉정하게 치러진다. 정치적 견해가 현저히 다른 집권층의 반대세력이 추모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곳곳에서 이상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기이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그 원인을 단정할 수 없으나 훗날 밝혀지리라고 본다. 여하간 일어나서는 안 될 불행한 자살 사고였다. 분명한 것은 자살자는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선조 31년서기 1598년 8월 18일.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후시미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단숨에 조선을 정복하고 명나라까지 넘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생각과는 달리 조선 정복마저 난관에 처하자 시름시름 앓다가 화병으로 죽은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기에 전쟁이 있었던 것이지, 그가 없으면 전쟁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일본인들 가운데 조선 침략군 왜적들의 전의가 차츰 식어가고 있을 때 본국에서 왜군에게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철수에도 좋아하지 않고 더욱 결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7년을 두고 무수한 백성이 살상되고 강토를 유린할 대로 유린하다가 이제 와서 저희들이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돌아가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는 힘주어 말하면서 계속 부하 장령에게 결전을 다짐했다. 한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철수준비에 바빴지만 이순신이 대진하니 철수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자체방어를 강화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장 고니시는 시종 싸울 것을 회피하면서 도주로 확보에 혈안이 되었으나 이순신의 결전태세때문에 겁먹고 있었다.
왜장 고니시는 할 수 없이 명나라 장수 진인을 뇌물로써 매수하여 도주로 확보를 꾀했다. 뇌물을 받은 명장明將 진인은 이순신에게 왜군이 요청하는 대로 강화를 허락해 주라고 명령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명장 진인의 작전 통제하에 있었다.
“대장은 강화에 대해 말할 수 없소. 또한 원수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소.”라고 분명하게 명장 진인에게 말하자, 진인도 양심은 있는지라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장 고니시는 갖은 방법을 다써가며 이순신이 마음을 돌리도록 시도했지만 이순신은 까딱 않고 결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정유년 11월 17일 저녁. 순천에 있는 왜장 고니시의 진에서는 이상한 횃불이 높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때 고성에 있는 왜장 다치바나, 사천에 있는 왜장 시마즈, 남해에 있는 왜장 무네 등의 왜적들이 모두 노량 바다로 집결하여 왜장 고니시를 구출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순신은 그들의 횃불을 보았다. 곧 부하 장령들과 작전계획을 세웠다. 명장 진인과도 의논한 후 11월 18일 밤이 어둡기를 기다려 왜교 앞바다를 떠나 노량을 향해 은밀하게 항해해 나갔다. 이순신은 자정이 되자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손을 씻은 뒤 몸을 단정히 하고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하늘에 기원을 올렸다. 그는 하늘에 빌고 난 후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11월 19일 새벽. 이순신 최후의 날이자 임진왜란 7년전쟁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천에 웅거하고 있던 왜적의 배는 300여 척이 넘었다.
그 함대가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에 이르는 사이의 광주양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우리 수군이 매복해 있다가 좌우에서 번개처럼 나타나 일시에 포격을 가하니 이에 당황하다가 겨우 전열을 정비한 다음 우리 수군에 대항해 왔다. 그러자 우리 수군은 왜선에 바싹 붙어 불붙은 장작을 마구 던져 왜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왜적은 날이 새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노량 서쪽에는 반월도를 비롯하여 수많은 섬들이 깔려 있어 대도군도라고 하는데 바로 이 바다에서 싸우다가 남해 관음포로 쫓겨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는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곳이라 왜적은 뒤돌아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막다른 상황이 벌어지자 이순신은 뱃머리에서 손수 북을 치며
“이때를 놓치지 말라, 돌격하라!”고 호령하면서 왜선으로 돌진했다.
이를 본 왜적은 이순신이 탄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은 순간 위태로웠다. 이를 목격한 명장 진인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다. 참으로 아슬아슬 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한때 왜장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강화를 주장한 진인이었으나 일단 싸움에 임해서는 장수의 기량과 전우애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위기에서 벗어난 이순신은 계속해서 격렬한 전투의지로 적에게 압박을 가했다. 이미 적선은 무려 200여 척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왜적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 앞바다를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선 한 척도 돌려보낼 수 없다고 결의를 다지며 스스로 앞장서서 달아나는 적선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친히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들기며 부하들의 전의를 독려했다. 바로 이때 어디 선지적의 총탄이 날아와 이순신의 왼편 겨드랑이 부위를 관통했다. 심장근처의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이순신은 급히 명령하여 방패로 자기 앞을 가리게 했다. 그것은 적이 행여나 자기의 죽음을 볼까 걱정해서였다. 맏아들 회와 맏형 의신의 넷째아들 완은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여 당황하였으나 곧 진정하고는 이순신을 부축하여 선실 안으로 옮겨 놓았다. 이들은 흐르는 눈물을 참으면서 차츰차츰 기력이 다해 가는 이순신을 옆에서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순신은 숨을 거두면서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그는 이 말을 최후의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세상풍파를 54세로 끝마친 것이다.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죽었으나 유언대로 일체 딴 배에 알리지 않고 적선을 향하여 공격을 계속하니 적선은 불에 타고 적병은 물에 빠지고 목잘려 죽는 일본 수군의 처절한 모습이 오래도록 노량 해상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왜장 시마즈 등은 겨우 남은 병선 50여 척을 이끌고 달아났으며 왜장 고니시 또한 이 틈을 이용하여 묘도 서쪽 해협으로 도망하여 겨우 빠져나갔다.
싸움이 끝나자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 모두가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을 알고 두 진영 군대가 모두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5,000년 민족사상 이순신 장군의 죽음만큼 위대한 죽음은 그 유례를 찾을 길이 없으며, 이것은 바로 한국인의 지고한 정신을 대표하는 죽음이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른 뒤 숙종은 현충사 제문에서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이고 나라 살린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라고 이순신 장군의 공덕에 대해 고개 숙였다.
어디 우리나라뿐이랴. 이순신에 의해 전멸한 일본 수군의 후예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일본 해군 함대사령관으로 러시아 해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뒤 그의 승전을 축하하는 피로연 행사장에서 자기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빗대어 찬양하는 축사를 듣고 답사로서 말하되
“나를 넬슨에게 빗대는 것은 가하나 조선의 이순신에게 빗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솔직하게 이순신 장군의 위덕을 찬양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곧 한국인의 죽음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생관은 그의 좌우명에서 밝힌 것처럼‘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으로 요약된다. 모든 국민은 그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그의 거룩한 조국애에 대해 길이길이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이처럼 뚜렷한 사생관으로 한 생애를 일관한 인물은 아마 동서고금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이순신 장군이 돋보이고 그 공훈이 찬란히 빛나는 것은 그가 생전에는 죽음을 초월하는 자세를 가졌고,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후세에 산 교훈을 남긴 데 있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의 순국과 더불어 부하 장령의 눈앞에 전개되는 일본 수군의 패주와 임진왜란 7년의 종막이 승리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숭고한 의미를 겨레의 가슴에 각인했다.
모든 지휘관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사생관을 마음속 거울에 비추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내 경우를 비추어보면 사생관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과거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6·25전쟁 발발로 북한군의 남침에 따라 정규 육사생도 신분으로 계급도 군번도 없이 포천 전투에 투입된 당시는 사생관은커녕 죽음이 두려워 공포에서 헤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아픈 과거가 있었다. 전쟁이 이어지자 바로 그 해 만17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소위로 임관,당시는 소모품으로 빗대던 소총소대장으로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던 나는 역시 삶에 급급한 나머지 중상을 입고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던 부끄러웠던 과거가 있다.
사생관의 확립, 즉 죽음의 가치를 깨달은 것은 훨씬 훗날 32세의 육군중령 시절이었다. 월남전 참전의 명령을 받고 제1사단 제15연대 2대대장에 이어 두 번째 맹호사단 제1연대 대대장 직을 수행할 때였다.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월남전 대비 전투훈련을 할 무렵 내 부하 중대장 강재구 대위의 순직을 보면서 뒤늦게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죽음의 현장에서‘ 너 박경석은 강재구 대위처럼 부하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가?’를 자문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해답은 명료했다.‘나는 대신 죽을 수 없다’라고 답하고 있었다. 강재구 대위의 순직은 늘 내 가슴에서 자책의 부담으로 맴돌았다.
그해 대대가 월남 땅에 상륙, 최초의 주둔지를 향해 정글을 누비고 진출할 무렵, 대대의 선두 첨병이 공포에 질려 멈칫하고 있었다. 보고에 접한 나는 다시 강재구 대위를 상기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배속 부대까지 합쳐 천 명이 넘는 병력 가운데 전투경험자는 나 한 사람뿐임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비호처럼 대대 천명 앞으로 다가가 정글을 헤쳐가며 진출하여 첫 주둔지역을 점령했다. 바로 이때 비로소 내 사생관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사생관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공익 또는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깨달을 때 확립된다. 선천적인 죽음에 대한 의미는 생명 보존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다. 따라서 학습효과나 어떤 충격으로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월남전 대대장 시절 죽음을 각오한 여러 장면에서 나는 죽지 않았다. 부하를 위해, 조국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결심한 후에는 세상에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대대장이 결심이 섰을 때, 중대장과 소대장은 나를 따랐고 병들은 우리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