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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강 열린 조직과 닫힌 조직

작성시간15.07.15|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세상에는 열린 조직이 있는 한편 닫힌 조직도 있다. 열린 조직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스템이 될 것이고, 닫힌 조직은 지난 시절 소련권 공산주의 국가가 해당된다.

물론 지금의 북한 체제는 현대에 있어서 대표적인 닫힌 조직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조직의 성격에 따라 리더십도 하늘과 땅만큼 적용 방법의 차이가 있다. 가령 닫힌 체제의 군대 조직에서는 강압 일변도의 리더십이 먹혀 들어가지만 열린 군대에 있어서는 곧장 벽에 부딪히고 만다. 닫힌 군대의 조직 구성원은 강압에서 벗어날 만한 환경이 못 되어 오직 생존을 위해 개인의 사유(思惟)와 행위를 억누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조직에서 거역은 곧 죽음이다.

열린 체제하의 군대 조직은 지휘 선상에 비밀이 유지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상급자의 비행이나 부당한 일들은 곧 밝혀지고 만다. 그런 현상이 조직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느냐 하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조직의 리더 자신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따라서 현명한 리더는 조직 구성원을 위해 극기克己하거나 선행의 길을 따라야 하며 명백 투명한 지휘를 할 수밖에 없다.

근대사를 살펴보면 열린 군대나 닫힌 군대의 패배 또는 그로 말미암아 국가의 멸망이 초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열린 군대의 대표적인 패배 또는 조직의 와해는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국민 정부군과 자유월남군을 예로 들 수 있다. 닫힌 군대의 멸망은 공산주의 소련군과 동독군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군을 예로 들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합당한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나 조직의 와해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는 열린 군대의 와해를 눈여겨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중국에 가서 역사 속의 기념물에 접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하나는 ‘물망국치(勿忘國恥)’이고, 다른 하나는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이다. 앞글은‘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이고, 두 번째 글은‘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로 풀이된다.

중국은 근대사를 통하여 많은 치욕을 당하면서 길고 긴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예를 들면,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통한 패배로 홍콩을 빼앗긴 치욕,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중국에 대한 침략과 난징(南京)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중국인 30여만 명 대학살의 상처 등이다. 침략과 패배를 안긴 근대사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굴욕의 연속이었으므로 다시는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한 각오가 절실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그 글귀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해석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바로 중국 내전 당시의 상황에서 교훈을 찾아야 된다는 기운이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장개석의 국부군과 동북 군벌이 망한데서 연유했다는 해석이다.

흔히 농담으로 허약한 군대를‘당나라 군대’ 또는 ‘장개석 군대’라고 한다. 당나라 군대는 이름만 군대이지 군율도 군기도 엉망인 군대를 빗댄 것이고, 장개석 군대는 부패군대의 대명사였다. 위에서 아래까지 부패가 번져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져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도망가야했다. 이러한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시진핑 현 중국의 국가주석이 부패 척결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물망국치’,‘전사후망후사지사’는 바로 장개석 군대의 치욕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겠다는 신조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열린 조직의 국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국군은 열린 군대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조직을 강화하고 북한군보다 절대우위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바로 중국인의 신조처럼‘물망국치’,‘전사후망후사지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치욕과 6·25전쟁 초전에서의 패배 등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강력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독도 침탈의 꼬투리를 잡고 벌써 훗날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근간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방위산업 분야의 부패에 관한 것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 퇴역 해군 장성들이 관련되었다는 방위산업 관련 비리는 심각한 것이다. 전쟁에 사용할 함정들과 관련이 있는 비리라면 이적행위로 다스려야 한다. 이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옛 치욕이 되풀이될 수 있다. 어디 거기뿐이겠는가. 온 나라 안의 부정부패 정도는 특단의 조치 없이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다.

자유월남의 패망과 장개석 국부군의 치욕과 같이 우리도 그런 치욕을 맞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방위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조직에 대한 개혁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 차례는 리더십의 확립이다. 근간 발생하고 있는 군내 사건 사고 역시 발본색원해야 할 당면 과제이다.

싸워 이길 수 있는 군대로 지향하기 위해서는 채찍보다 감성으로 부하가 따라오게 하는 솔선수범의 리더십이 확립되어야 한다. 전우애로 표현되는 새로운 리더십으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부패척결을 하드파워 리더십으로 해결한다면, 부하의 통솔은 소프트파워 리더십으로 난제를 풀어야 한다. 소프트파워 리더십의 개념은 전우애가 전제되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결국 전우애처럼 효과적인 정신전력에 미치는 요소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첫날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육사생도로 계급과 군번도 없이 포천 전투에 투입되어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330명 동기생 가운데 86명이 전사하는 치욕의 전장에서 후퇴명령이 내려지자 모교 태릉 육군사관학교를 향해 숨 가쁘게 뛰어가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악몽으로 이어져 왔다.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한민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육사 생도가 되었던 나로서는 청천벽력을 맞는 충격이었다.

6·25전쟁은 계속되었고 그해 부산 동래에서 단기교육훈련만으로 임관되는 불행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소총소대장으로 죽음의 전장에 배치되었다. 하루도 쉴 날 없이 이어진 전투에서 중상을 당해 적의 포로가 되는 치욕과 불명예를 겪어야 했다.

휴전된 이후에도 야전근무는 계속되었다. 강원도 문등리 계곡, 사태리 계곡 등 DMZ 내에서 대북 공작원을 투입하는 HID 공작장교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영관으로 진급하자 철원 휴전선 제1보병사단 GOP 대대장을 마친 뒤 베트남전 제1진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장과 야전에서 거의 모든 젊음을 불태웠다. 월남전선에서 귀국 후에는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장으로 보직되어 미군 제2보병사단으로부터 전선을 인수한 후 서울 북방 GOP연대장 근무로 이어졌다.

어디 위관과 영관 시절 뿐이랴. 1975년 1월 1일부로 장군 승진과 함께 철원 북방 제6사단 DMZ 내 철원땅굴개척특수임무부대장으로 배치되어 6개월간 DMZ 내 탑차에서 기거하면서 땅굴 탐색을 지휘했다. 그때 발견한 땅굴이 제2땅굴이다.

6·25전쟁에서는 17세의 소총소대장으로 실패와 실수를 거듭, 한때 인민군의 포로까지 되는 치욕의 불명예를 겪기도 했지만, 그 후의 이어진 전투에서는 많은 공훈을 세워 초기의 불명예를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 이러는 동안 얻어진 리더십 교훈이 곧 전우애의 위력이었다. 전우애는 상호 간 감동을 안기며, 그 감동이 전투력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진리의 발견이다.

전장에서는 조국과 자유수호라는 대의大義보다 바로 상하 인간관계가 승리의 열쇠가 되어주었다. 물론 닫힌 군대에서도 전우애의 효과는 인정된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열린 군대에서 극대화된다는 것이 나의 전투경험에서 얻은 귀중한 진리였다. 이 점은 채명신 장군의‘ 골육지정骨肉之情’ 리더십과 맥을 같이 한다.

이 글 51강은 <박경석의 뉴리더십 특강>의 종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내가 겪은 전우애와 연관된 성공사례를 요약해서 설명하겠다.

다만, 그 내용이 필자의 자랑이 아니고 교훈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월남전 파병 첫 보병대대장으로 선발되어 강원도 홍천에서 재편성과 함께 정글전 대비를 위한 맹훈련이 시작되는 과정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월남전 대대장으로 선발되기 이전에 이미 제1보병사단 제15연대 제2대대장 직을 마친 상태였으므로 2차 대대장 근무에 대해서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고 기계적인 임무수행에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우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젊은 혈기와 의욕만으로 리더십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나의 지휘하에 있는 맹호사단 제1연대 3대대 10중대장 강재구(姜在求) 대위의 수류탄 훈련장에서의 순직은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강재구 대위의 죽음은 나에게 리더십의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게 하였다. 당시 그 수류탄 훈련장에서 나였더라면 날아오는 수류탄을 피해 죽음을 모면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재구 대위로 인하여 비로소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강재구 대위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한 직후 문학성을 가미한 논픽션 보고서를 작성, 연대장과 사단장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그결과 박정희 대통령의 감동까지 유발하여 대대 명칭이 강재구의 이름을 딴 재구대대(在求大隊)로 명명되는 영예와 함께 거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러 대대 장병의 사기앙양과 정신무장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에서 대대장 이하 모든 장병이 전우애의 의미를 가슴에 각인하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아마 이때의 감동이 원천적 요인이 되어 월남전에서 신화창조의 주역으로 제1진 재구대대가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재구대대는 일단 임무가 주어지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난관의 임무도 차질없이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기적을 만들어 갔다. 그 주역은 4개 중대장과 대대 참모들이다. 대대장의 독전이나 간섭 없이 모든 어려운 문제가 순탄하게 해결되었으며, 빛나는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재구대대 제1진의 월남전 1년간의 임무수행 내역을 간단히 요약하면 가장 적은 희생장교 김무석 중위 외 18명으로 대대단위 최고의 전과를 올려 가장 많은 무공훈장 수훈을 기록했다. 특히 대적 심리전과 대민구호를 통해 싸우지 않고 121명의 베트콩을 귀순케 한 업적은 월남전에서 가장 빛나는 기록으로 남는다. 당시 대대장의 지휘지침은‘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였다.

적 사살보다 포로 획득을 위한 피나는 노력은 중대장을 비롯한 대대 장병의 공적의 으뜸이었다. 무려 264명의 포로를 획득하여 이 점에서도 신화창조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불과 12개월 만에 중화기 23문과 각종 소총 202정의 노획은 국내외 유명 매스컴에서 재구대대를 빛냈고, 미국 국회 하원 의사록 기록에까지 재구대대의 이름을 남겨 최고 수훈임을 만방에 과시하는 데 기여했다.

초기의 실책과 실패가 성공의 중요한 교훈이 된다는 진리를 체험한 나는 후배와 후대를 위해 이 리더십 강좌를 개설했음을 여기 종강에서 밝힌다. 나는 많은 전장을 누비고 피를 흘리며 전상의 아픔을 달래가며 절규한 내 신조(信條)를 남기며 이 글을 맺는다. 아마 이신조는 내 목숨을 다한 후 대전현충원 장군묘역 박경석 묘비에 새겨질 것이다.

조국(祖國)
COUNTRY

정의(正義)
JUSTICE

진리(眞理)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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