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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작성시간15.07.24|조회수168 목록 댓글 0

정규 육사 생도의 처참한 몰골이 책 앞쪽에 저자 박경석의 묘지 사진이 게재되어 독자는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묘지의 박경석 소위는 바로 나다. 나는 멀쩡히살아 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사연을 공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 여기에 적는다.

오래전에 어느 지상파 TV 소속 PD라고 하면서 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내용인즉 국립서울현충원에 박경석 소위의 묘가 있는데 혹시 박 장군과 관련이 있는 묘가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숨김없이

“그렇다. 바로 그 묘는 나 박경석의 묘다.”라고 답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 사연을 밝히기 위한 다큐 제작을 제의했다. 나는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다음 기회에 공개할 예정이니 얼마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몹시 아쉬워하면서 전화를 끊었다.그 전화를 받고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그 PD에게 ‘얼마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20여 년이 흘렀으니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이글에서나마 미안하다는 내 심정을 전하고 싶다.64년 전 그러니까 1950년 10월 23일, 나는 원하지 않았던 17세의 나이에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특이한 경우라 좀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1950년 6월 1일에 대한민국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하여 청운의 꿈을 간직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 지 불과 25일만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 인민군이 새벽 4시에 공격해 왔다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이나 다름없는 생도들은 그 소식에 놀라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일요일이었는데도 비상 나팔이 울렸다. 이어서 스피커에서는 “모든 생도는 전원 전투준비를 하고 완전군장으로 화랑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절규하듯 외쳐대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완전군장으로 갖춘 다음 연병장으로 뛰어가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수류탄과 M1소총 실탄을 나누어 주면서 전선으로 출동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생도들은 군인의 기본기는커녕 실탄사격도 끝내지 않은 맹물들이었다. 겨우 어제까지 3발의 0점 조준사격을 끝냈을 뿐이었다. 더구나 M1소총은 8발 실탄 클립을 장전해야 사격할 수 있는데 0점 사격 시조교가 한 발 한 발 장전해 준 탓으로 장전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서울에서 징발한 민간 트럭에 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포천전선으로 인민군과 싸우러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2년제로 입교한 선배 생도가 분대장으로 편성되어 트럭 위에서 이것저것 싸우는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얼마간 트럭이 달리더니 어느 나지막한 능선에 도착하자 하차 지시가 내려졌다. 일제히 차에서 내리자 멀리서 쿵쿵거리는 포성이 들려왔다. 생도들은 선배생도 분대장이 지시하는 대로 땅을 팠다. 개인호를 파라는 것인데 개인호가 뭔지도 모르는 맹물들이 제대로 팔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졌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포성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뜬눈으로 새우고 먼동이 틀 무렵 갑자기 벼락 때리는 굉음이 들려오더니 듣도 보도 못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겁만먹고 있어서 애국심이라든가 싸워야 한다는 명분 같은 것이 생각나지 않고 떨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니 더욱 포탄 작렬음이 더 격렬해지면서 화약 냄새와 흙먼지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전상을 입고 신음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귀를 때렸다. 나는 그순간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기관총 발사음과 함께 어디선가“ 사격개시”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구덩이에서 목을 빼 전방을 살폈다. 멀리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바로 적병이라고 직감했다. 나는 선배 생도가 일러준 대로 8발 실탄 클립을 M1소총에 장전하고 무조건 쏘아댔다. 적병에게 맞을 리 있겠는가. 그래도 계속 사격했다.

얼마간 격전이 이어진 후 전장 소음을 뚫고 어떤 명령이 내려졌다.

자세히 듣기 위해 목을 빼고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화랑대로 후퇴하라. 화랑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겨우 알아듣고 구덩이에서 나와 무조건 남쪽을 향해 뛰었다. 처참한 몰골이 아닌가. 육사 입교 후 군대 첫 입문이 패잔병이라니.이 전투에서 동기생 86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사라져 갔다.

 

소모품 육군소위로 임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화랑대에 돌아와 보니 옛 자취는 온데간데 없고 많은 건물들이 박살 나 있었다. 인민군의 포탄에 의해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흙투성이가 된 장교가 나를 보더니 빨리 광나루 쪽으로 뛰어가라고 했다. 거기 가면 트럭이 기다리고 있으니 트럭을 타고 수원 도가니공장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포성음은 내 걸음 뒤를 쫓아 계속 내 귀를 때렸다. ‘아, 이런 팔자가 어디 있는가.’

충남에서 대전중학교라면 명문 학교로 소문나 있었다. 나는 조치원읍에서 태어나 교동초등학교를 나와 대전중학교에 합격할 때만 해도 세상에서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우쭐댔다. 초등학교 우등생도 합격이 힘든 충청권 제1의 중학교에 입학했으니 뽐낼 만도 했다.

1950년 학제 변경에 따라 6년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바뀌어 나는 중학교 5학년에서 대전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보는 동아일보 하단에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모집이라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나는 성격이 외향적이고 앞장서기를 좋아해 군대 지휘관이 되는 것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그것을 읽어 보니 더 호기심이 솟았다. 졸업 후 육군소위 임관과 함께 이학사 학위가 수여된다는 것이었다. 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응시 조건이었지만 재학생을 위해 예비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규 육사 생도가 되고 싶다고 사정하면서 상경해 예비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육사를 지원한다는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군인은 네 형만으로 족하다.”고 말하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때 형 영석榮錫은 육사 5기로 임관, 육군대위로 시흥보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에는 틀렸다고 생각한 나는 새벽녘 아버지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 챙긴 후 무조건상경했다. 본시험 장소는 용산고등학교였고, 예비시험 장소는 건너편 수도여고였다. 나는 예비시험을 치르고 난 다음 시흥 형 하숙집신세를 지고 합격 여부를 기다렸다. 며칠 후 합격 소식이 오면서 용산고등학교에서 본시험을 치르라는 통보가 왔다.

용산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조치원 집에 오니 난리가 났다.

아버지에게 처음 매를 맞는 곤욕을 치렀다. 아무리 아버지가 반대해도 나는 장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1차 학과시험 발표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나는 실망하고 마음속으로 내년을 기약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조치원역에서 출발하는 통학열차를 타고 대전고등학교로 갔다. 나를 본 담임인 장기성 선생님이 나를 심하게 꾸짖고 뺨까지 때렸다. 보름 동안이나 무단결석을 했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 봉변이었다.

그런데 불합격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이변이 일어났다. 장기성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빨리 육군사관학교로 가보라고 했다. 학교에 합격 통보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곧장 태릉 화랑대로 향했다.

그리고 6월 1일 정식으로 입교식에 참석했다.

그 후에 알려졌지만 내가 불합격된 것은 시험성적이 아니라 연령 미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만 19세에 두 살이 모자라 불합격 통보를 했었는데 추가 합격 이면이 희한했다.

당시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운 실력자인데 그의 장남이 배재고등학교 2학년이고 나이도 나와 동갑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용덕 장군이 압력을 넣어 규정을 무시하고 그의 아들 원창희를 합격시켰다는 것이다. 더구나 원창희는 학과시험 성적이 미달이었다. 일부 교수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감히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의 청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한편, 박경석은 합격권인데 다만 연령 때문에 불합격 조치했다면서 박경석을 합격시켜야 된다는 교수들의 의견이 제기되었다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구제되었다는 내막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정규 육사 생도가 된 내가 도망만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여하간 수원에서 다시 몇 번의 전투에서 죽지 않고 목숨을 붙여 살아남은 대열에 끼어 부산으로 집결, 동래에 개설된 전시 단기 육사인 육군종합학교에 입교 후 맹훈련에 들어갔다. 스파르타식 교육훈련이었다. 단기 교육을 마치고 졸업하여 17세의 육군소위가 되었다.

당시 육군소위의 별칭이 소모품이었다. 전투시 소대장 직분인 육군소위 희생이 제일 많아 육군소위를 보며 동정하는 뜻에서 빗댔다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육군소위로 임관한 동기생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창설되는 제9보병사단 소대장 요원으로 발령되었다. 이른바 소모품 소위계급장을 달고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기생 가운데 육군본부로 발령 난 1명은 누구였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모두 궁금해했다.

알고 보니 원창희 소위였다. 원창희 소위의 아버지는 당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의 핵심인 원용덕 장군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 신임하는 헌병총사령관이다. 육군본부로 명령 난 직후 원창희 소위는 보병에서 헌병으로 전과 되어 부산역 헌병파견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나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맥이 확 풀리는 것과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동기생 모두가 소모품 소위 계급장을 달고 전선으로 투입되는데 권력자의 아들만 생명이 보장되는 헌병 장교로 발령을 내다니. 17세의 어린 가슴속에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시 항간에서는 이런 풍조가 만연될 때였다. 장군뿐만 아니라 장관,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 등의 직계 가족은 물론 사돈에 팔촌까지 병역에서 빠지는 실상이었다. 그래서 흔히 전장에서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두기 직전 ‘빽’하고 소리치며 죽는다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었다. 빽이 없어 억울하게 죽는다는 풍자였다.

우리 동기생이 임관한 1950년 10월 23일경의 전선 사정은 국군과 미군 모두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한 인민군들은 거의 조직이 와해된 채 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어 한참 승리감에 들떠있었다. 모든 동기생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남북통일의 희망찬 감상에 젖고 있을 때여서 원창희 소위의 헌병 발령은 그대로 묻혀 버렸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이 문제만은 꼭 남겨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옛 일을 들추게 되었다. 고인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프랑스어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일반적으로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로 이해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바로‘특권층의 솔선수범’을 말한다. 오늘날 열린 세계에 있어서 리더의 솔선수범은 조직 성공의 필수 요건이다.

우리나라가 격동의 독재정권 시대를 겪어 오다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출발한 지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특권층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 머나먼 옛날 로마 시대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서구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기본 질서로 자리잡고 있는 나라들과 교류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원용덕 장군의 특권시대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어원 상으로 보면 noblesse는 닭의 볏을 의미하고 oblige는 달걀의 노른자를 뜻한다고 한다. 즉‘ 닭의 사명이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다’는 것을 특권층의 도덕률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회고해 보면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병역기피자임이 분명하다. 본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 핑계가 유치하고 석연치 않다. 지금도 그런 핑계로 무장한 장·차관, 국회의원, 기타 고위직 면면들이 도사리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가 어찌 선진국으로 당당히 진입할 수 있겠는가. 6·25전쟁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을 비롯하여 아이젠하워 장군, 클라크 장군 등 미군 장성들의 자제 139명이 솔선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특히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대위는 그리스에서 해외 근무를 마치고 본토 근무로 발령이 났지만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본국에서 근무할 수있겠는가.”라며 자원하여 참전, 폭격기 조종사로 적진을 공격 중 전사했다.

어디 그뿐인가. 당시 우리의 적국인 중공군의 최고사령관인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까지 전선에 투입, 참전 중 목숨을 자신의 조국에 바쳤다. 우리나라의 경우 병역의무는 가장 중요한 도덕적 값을 지니고 있다. 통일 이전이며 적과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많은 원로 장군들의 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한결같이 자신들의 실패나 잘못을 단 한 자도 못쓰게 했다. 그래서 나 또한 그 우를 범할까 봐 회고록을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이 글에서 한 맺힌 소원을 조국에 남기고 싶은 충정으로 이 글을 올렸다.



육군소위 박경석의 묘

육군소위 임관 후 무거운 마음으로 창설 중인 제9사단으로 향했다. 많은 병력들이 모인 곳에는 각각 다른 여러 명칭의 소속 장병들을 편성하느라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군대의 기강이있어 차츰 질서가 잡히면서 나는 제30연대 제3대대 10중대 3소대장의 보직을 받았다. 서울-충주를 거쳐 내가 일시 정착한 곳은 예천읍내 예천여자중학교였다. 이곳에서 장비를 수령해 전투태세를 갖춘전투부대의 면모로 일신했다.

내가 지휘하게 된 3소대 병력은 약 40명 정도였다. 확실한 숫자는 기억할 수 없다. 수시로 인원이 보충되고 전투 중 사상자가 발생하면 후송되기 때문이었다. 소대원 전원이 나보다 연장자였고 선임하사는 무려 열 살이나 위였다. 그러니 나는 허수아비 꼴이 되어 소대원에게 소대장의 지시가 먹혀들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17세라고 하지만 남달리 앳된 얼굴이라 소년티가 나니 소대원들의 조롱감이 되기 일쑤였다.

심지어 선임하사는 나에게 반말로 대했다.“어이, 박 소위” 소대선임하사가 직속상관인 소대장을 부르는 호칭이 그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때릴 수도 없었다. 그의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경우는 장개석 군대에도 없었을 것이라며 분하게 생각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면서 여기서 헤쳐나가야 할 방도를 찾기 위해 모진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나 스스로 앞장서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서서 해결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전황은 우리 국군이 파죽지세로북상 중에 있었지만, 미리 도피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태백산을 비롯하여 강원도 곳곳에서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후방 사정도 전방 못지않게 불안했다. 태백산 자락의 험한 지세를 극복하며 곳곳을 수색해야 하는 임무이고 보면, 맨 앞에서 개척하는 첨병이 되기를 소대원이 좋아할 리 없었다. 서로 회피하는 것을 본 나는 바로 이때다 하는 생각으로 내가 첨병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앞장서가며 진출하였다. 그랬더니 소대원도 내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더 고된 일은 내가 처리했다. 차츰 소대원과 소대장의 거북하던 관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강원도 사창리에 이르러 어느 할머니의 신고를 받게 되었다. 인민군들이 국군 포로 두 사람을 데리고 자기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의 눈빛을 보고 뭔가 확신이 서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 선임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즉각 출동했다. 은밀히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할머니가 가리키는 가옥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구성하고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당시 우리가 분배받은 화기는 미국에서 갓 수입한 새 장비였다. 비록 M1소총이지만 반자동이었고 분대당 1정의 자동소총은 놀라운 성능을 발휘했다.

이때 인민군 3명이 손을 들고 나왔다. 이어서 가옥 일대를 수색하다가 마루 밑에 숨어 있는 국군 포로 2명도 찾아냈다. 몇 구의 시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보잘것없는 작전에서의 전과였지만 창설 제9사단의 첫 전과라고 하며 의미를 크게 부여하는 바람에 나는 동기생 가운데 첫 무공훈장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이때 받은 훈장이 은성화랑무공훈장이다.

사창리에서 다시 새로운 작전명령에 의하여 제3대대는 정선지구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무렵 전황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북통일 직전의 국군과 미군이 치명타를 입고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다 망해 가던 인민군이 되살아나 중공군과 함께 남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 내려진 명령에 따라 제3대대는 평창 북방 1077고지 공격작전에 투입하게 되었다. 이 전투 경과에 대한 내용은 이 책‘ 12강 독단활용이 긴요했던 전투’에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

나는 1077고지 전투에서 인민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중상을 입고 쓰러져 눈 속에 파묻혔다. 인민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장정리를 시작했다. 흔히 전투 중 전장정리라 하면 상대방의 적 부상병을 확인사살하는 경우를 말한다. 적 부상병까지 후송할 수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비인간적 조치이다. 아군 역시 예외가 없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들이 중상을 입은 나를 발견하여 확인사살하려고 하던 차에 너무나 귀여운 애송이가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어 신기해 사살하지 않고 치료소로 후송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 모두 내가 깨어난 다음 인민군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나는 인민군 덕택에 겨우 살아났다. 치료가 대충 끝나 눈을 뜨자 내 앞에 인민군 사단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훑어보고 있었다.

“해방군관 동무 나이가 몇이오?”

그들은 국군 장교 포로를 해방군관이라고 부른다. 자기들이 미제하에서 해방시켰다는 논리였다.

“17세입니다.”

“아니, 남조선 군대는 어린애도 군관이 될 수 있는가?”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4년후에 육군소위가 되기 위해 첫 4년제 육사 생도가 되었는데 인민군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임관이 되었다고.

내 말을 들은 뒤 인민군 사단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훗날, 이 순간을 회고한 일이지만 이때 인민군의 남침 사실이 확인되고 북침이 아니라는 증거가 형성된 의미 있는 대화였다고 생각했다. 바꾸어 말하면 인민군 사단장이 남침을 시인한 셈이다.

그 후 나는 인민군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이 곱이곱이 이야기는 이미 여러 곳에 발표한 바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내가 귀환할 때, 가족은 모두 부산 동래에 피난 중이었다. 형 박영석 소령이 부산 동래 육군보병학교 교관으로 근무 중이라 그곳에 모든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거지꼴을 하고 한밤중에 나타나니 모든 가족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나를 귀신 바라보듯 의아해했다. 이미 전사 통보를 받고 장례까지 치렀다고 했다. 한동안 울고불고 소란을 피웠다.

그 후 동작동 국군묘지에는 내 시체 대신 임관 직후 손톱과 머리카락으로 준비한 유물 봉투로 매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정식으로 그 묘지에 대한 사유를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묘지를 그대로 두면 내 마음을 가다듬는 역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 정치군인들에 의한 핍박, 차별, 진급 훼방 등 계속되는 불이익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내 묘소를 찾았다.

“이미 박경석은 죽었다. 하늘이 도와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 더이상 바랄 게 있느냐.”

육군소위 박경석의 묘는 내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방황하는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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