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부록 1>국방대학교 6·25전쟁 60주년 특집 명장 인터뷰

작성시간15.07.24|조회수247 목록 댓글 0

국방대학교 리더십개발원

2010년은 6·25전쟁 60주년의 의미 깊은 해이다. 군 고급제대 리더들에게 리더십 전문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분기별로 제작, 배부되는‘ 국방리더십저널’은 우리 군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리더십 교양지이다. 편집실에서는 6·25전쟁 60주년 특집 특별 대담으로 우리 군의 원로로서 후배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는 박경석 장군과의 대담을 통해 어려운 전장 환경 속에서도 특별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우리 조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경험담을 들어보기로 하였다. 인터뷰는 국방리더십개발원의 최병운,탁관로, 임여진 전문위원이 실시하였다.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으로 국군의 위용을 세계 만방에 과시

진정한 참군인, 역전의 지장 박 경 석 장군

  • 장군님께서는 1950년 청운의 뜻을 품고 약관의 17세 나이에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로 입교하셨으나, 입교한 지 25일 만에 6·25전쟁에 참전하시어 당시 소대장·중대장의 초급지휘관으로 수없는 사선을 넘나드시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시어 풍전등화의 어려운 시기에 조국의 운명을 구하셨습니다. 오늘은 특히,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在求大隊長) 시절 우리 국군의 위용을 세계 만방에 과시 신화창조의 주역으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전투상황과 그 당시 장군님을 부하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어떻게 노력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베트남전 제1진으로 빈딩성 퀴논항에 상륙한 맹호사단 제1연대 재구대대는 1번 도로와 19번도로가 교차하는 요충도시 퀴논 교외 정글에 첫 주둔지를 잡았습니다. 주변이 황량하고 가끔 총성이 울려 전장 분위기로 감싸고 있었지만 나는 맨 처음 전투보다 대적 심리전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적 사살보다 민사 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으로 베트콩을 귀순시키는 방법이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대대 정보관 권준택 대위육사 15기, 소장 예편가 미 육군심리전학교를 졸업했으므로 그에게 대대장의 복안을 설명하자 그도 공감하게 되어 우선 주둔지 근처부터 대민 심리전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즉 재구대대는 첫 전투가 심리전인 셈이죠. 대대 군의관 박재구 중위에게 지시하여 대대 주변 부락의 환자진료부터 시작했습니다. 물론 삼엄한 경계와 수색 정찰, 매복 등은 필수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주둔지 도착 후 하루 만에 재구대대 제9중대 이현태 하사가 수색 정찰 중 베트남전 군사작전 첫 베트콩 포로를 획득하는 첫 전과를 올리자 맹호사단장 채명신 소장이 사이공에서 헬기로 날아와 인헌무공훈장을 이현태 하사에게 수여하는 축제가 벌어져 재구대대는 처음 스타트부터 쾌조를 이루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라는 내 지휘지침이 마침내 채명신 맹호사단장의 공감을 얻어 주월한국군사령관의 훈령으로 격상되었습니다. 당시 채명신 소장은 맹호사단장과 함께 주월한국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선 제9중대 중대장 용영일 대위육사 16기, 중장 예편 지휘하에 황폐한 부락을 새로 건설하는 임무를 부여하어 주민의 주택과 초등학교 건설에 착수케 했습니다. 이러한 대민지원 활동은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베트남 농민들이 적극 협력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작은 부락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감동한 빈딩성 성장우리나라 도지사에 해당은 그 작은 부락을 행정명령으로‘ 재구촌’으로 명명, 그 유명한 베트남 유일의 한국명 부락으로 탄생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재구대대 첫 전투의 전모입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대대의 대민 구호활동에 감동한 나머지 20여 명의 베트콩이 귀순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즉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행운을 얻은 셈이죠.
    이 초기 주둔 기간 대대작전관 이중형 대위육사 16기, 소장 예편의 작전 지도 또한 특기할 만한 공로를 남겼음을 밝힙니다.
    내 대대장 임기1965년 9월~1966년 11월 가운데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최대의 전공을 성취할 수 있었던 곳 또한 이 푸캇과 푸미 지역이었습니다. 이 TAOR평정작전은 베트남전 한국군 전 작전 중 가장 치열하고 가장 획기적인 전공을 전사에 기록한 유명한 작전으로 한국군의 명예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여 한국군을 명실공히 세계 제1급 군대로 각인케 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 베트남전 당시에 있어서의 리더십의 취약점은 무엇이며, 전장 리더십에 있어서 핵심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일본군식 리더십에서 오늘날 비판받는 것은 장수, 즉 고급제대 지휘관은 거의 신성불가침의 권역에서 여하한 경우에도 하급자로부터 비판받을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옛 일본군의 훌륭한 장수는 정의와 정도를 걷고 부하에게 존경을 받는 경우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군의 고급 제대 지휘관은 일본군의 악습만 좇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부정부패가 만연되었고 일방적 강압 리더십으로 곳곳에서 하극상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 일본군 출신 보병 제28사단장을 지휘 현장에서 미 육군보병학교 OBC를 졸업한바 있는 대대장 정구헌 중령이 사살한 사건을 들 수 있고, 육사 8기생 김종필 중령의 하극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곳곳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무렵 미국군사학교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장교가 늘면서 일본군식 리더십과 미국식 리더십의 상충 현상이 뚜렷해졌습니다.

    그런 리더십 상충의 극성기에 군의 엘리트로 새롭게 편성된 맹호사단 제1진지휘 시스템의 미국식 리더십은 새로운 국군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령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과 사단급 이상 고급 참모 전원이 미국의 지휘 및 참모대학이나 육군보병학교 OAC 또는 OBC 졸업자들로 선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대장 이하 소대장들 또한 전군에서 선발한 우수 자원으로 충당되었습니다.

    특히 채명신 소장은 미 육군보병학교 OAC와 미 지휘 및 참모대학을 졸업한 6·25전쟁 영웅으로 새 개념의 리더십 개척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식 리더십에다 한국형 리더십의 경험적 접합으로 새로운 리더십이 산출된 것입니다. 제1진 베트남전 지휘 시스템에 의한 리더십의 핵심은 한마디로 지휘관의 솔선수범과 건전한 부하 의견의 존중에 있습니다. 물론 곳곳에서 일본군식 리더십의 잔재가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세는 새로운 리더십에 귀일하는 현상이 뚜렷했습니다. 즉 새로운 리더십이 형성되는 과정이 전투 중에 형성되어 갔습니다. 파병 전 한국에서는 군사지식이나 일반학문 분야에서 상급자가 하급자보다 열등한 경우가 허다했는데 베트남전에서는 상급 지휘관, 즉 대대장급 이상이 하급 장교보다 군사지식과 학식이 월등히우위에 있었으므로 하급 장교의 순종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면서 빛나는 성과를 성취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 장군님께서는 평소 리더의 책임에 대해 많이 고민하시고 계시고‘ 베트남 참전과 국군의 발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격동기 때에는 대통령 전기 작가로 지명되고도 집필을 거부하셨다는 일도 저희 후배들에게는 유명한 일화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런 장군님의 모습을 보면서 리더로서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 주셨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장군님께서 평소 갖고 계신 고급 지휘관의 리더십을 표현하신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지요?
  • 진리, 진실은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고급 제대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진실로 다가설 때 부하들은 감동합니다. 그감동이 바로 군대에 있어서는 정신전력의 기초가 됩니다. 전투시 발휘하는 부하들의 전투력은 국가, 민족, 애국심 등 대의가 아니라 상하 인간관계에서 분출하는 뜨거운 전우애가 상승작용을 합니다. 전장에서 사선을 돌파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보다 리더십이 작용한다는 진리입니다. 내가 군 복무할 때 PX 운영은 대대장이나 연대장들이 직접 운영하던 체제였습니다. 그때는 모두 가난했고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대로라면 내가 PX를 직접 운영하여 돈을 챙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떳떳한 지휘관이 되기 위해 부대대장, 부연대장 등 부지휘관에게 운영을 넘겼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사소한 일들이 하나 둘 쌓이면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야전에서 또는 전장에서 눈물겨운 전우애로 이어지는 감동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끝으로 남기고 싶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공적인 리더십의 결정체는 독서를 통한 학습의 효과’입니다. 군 리더는 꾸준한 독서를 통한 자기학습을 계속해야 됩니다. 독서는 인품을 함양하는 핵심이며 올바른 상황판단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부하들이 군사부문 이외의 이슈에 대해 지휘관이 명쾌한 결론을 내릴 때 받는 감성은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고 존경심으로 남습니다. 물론 군사학 또는 리더십 관련 서적도 중요하지만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도 권장합니다.
  • 장군님께서는 6·25전쟁 및 베트남전을 실제로 경험하셨고, 전쟁속에서 안보의식의 중요성을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를 미래전쟁의 유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현재 안보의식의 불감증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며, 그리고 미래전쟁 양상의 전망에 따른 우리의 준비 자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나는 1950년 6월 1일 우리나라 첫 정규 4년제 육사에 17세의 최연소 나이로 입교하였습니다. 입교 후 군대예절과 제식교련, M1소총 기계훈련과 영점 조준사격을 끝내고 자격사격 직전에 6·25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청천벽력이었죠. 청소년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육군본부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으로 포천전투에 투입되어 86명의 전사자를 내는 비극 속에서 첫 전투를 치렀습니다. 계속되는 한강선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많은 희생을 낸 다음에야 부산으로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부산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되어 단기 교육을 받고 그해 10월 23일에 임관, 최연소 육군소위가 되어 보병 제9사단 창설요원으로 배치, 소총소대장이 되어 강원도 대화, 사창리, 평창전투에 투입되어 만신창이가 되어 실책을 거듭하는 못난 소대장 근무를 했습니다. 중상을 입기도 하고 인민군에게 포로도 되는 치욕의 연속 속에서 적 치하를 탈출, 다시 중대장 대리근무로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실책을 거듭하는 무능하고 경험이 일천한 소대장이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운좋게 적을 무찔러 화랑무공훈장을 동기생 가운데 제일 먼저 수훈하는 행운도 있었습니다.
    그 무능했던 소대장 근무시절의 실책이 내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여기서 밝힙니다‘. 실패는 성공의 모태’라는 교훈을 직접 체득한 전투경험이었습니다.
    거기서 얻은 경험 가운데 값진 것은 조직에 있어서 골육지정의 부하사랑이 사기의 원천이 되어 전승을 기할 수 있다는 진리였습니다. 전투 중 정신적 힘의 바탕에는 항상 전우애, 부하사랑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국가, 민족, 애국등의 미사여구는 한낱 명분에 지나지 않고 전장에서의 위기 극복의 힘은 오직상호 신뢰와 전우애였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이 그 후 보병 제1사단에서의 대대장 시절이나 베트남 전선에서의 맹호사단 재구대대장 근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베트남 전선에서 귀국 후 대령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1사단 제12연대장으로 근무시에도 실패에서 익힌 귀중한 체험식 리더십으로 미 제2사단과 서울 북방지역 방어선을 인수 교대하여 역시 빛나는 지휘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 장군님께서는 1980년~1982년까지 전 육군 장교들에게 리더십 강좌를 개설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리더십 강좌는 전 육군 장교들에게‘ 참모총장 서명관 부관감’ 명의로 하달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육군 최초의‘ 야전훈보(野戰訓報)’였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훈보(訓報)를 근간으로 지휘관들에게 리더십을 남긴 저서가 2009년 가을에 <박경석 리더십 84강좌>로 출판되었습니다. 장군님께서 생각하시는 리더십의 최고 가치와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나는 지난 시절, 일본의 군사사상을 연구하면서 일본의 대학에서 주최하는 학술회의에 참석하기도 했고 거기에서 리더십 특강도 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일본군의 리더십도 아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 일본군 <통수참고서>의 제1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장수지휘관는 지휘의 중심이며, 원동력이다. 과거 전사를 통해서 볼 때, 군의 승패는 그 군대보다 오히려 장수지휘관에게 달린 바가 크다. 전승은 장수지휘관가 승리를 확신하는 데서 비롯되고 패전은 장수지휘관가 패전을 자인하는 데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전쟁전투의 최종 결정은 장수지휘관에게 달려 있다.』이어서 다음 글에서도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장수지휘관의 책무는 모든 상황을 좌우하고 전승을 획득함에 있다. 그러므로 장수지휘관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은 장수지휘관로서의 책임감과 부단한 연찬수양에서부터 나온다. 장수지휘관의 가치는 이러한 책임감과 신념이 상실되는 순간 소멸된다.』
    여기서 장수라 함은 장군을 지칭하고 있지만 나는 지휘관의 덕목으로 원용하고 있었습니다. 단위 지휘관이 그 부대의 성패에 대한 모든 책임이 있다는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덕목은 리더십의 골간입니다. 내가 초급장교 시절한국전쟁에서 실패한 원인도 바로‘ 책임질 줄 아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합니다.
    그 후 나는 다시 태어난 지휘관으로 일관했습니다. 바로 당당한 지휘관이 되어 솔선수범과 모든 성패의 책임은 나에게 있고 부하를 사랑하는 새 리더십으로 베트남전쟁에서, 첫 서울 북방 휴전선 GOP 연대장으로, 장군이 되어 철원 제2땅굴 특수임무 부대장으로 이른바‘ 신화창조의 기수’로 국군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 장군님께서는 육군준장의 계급으로 명예롭게 스스로 전역을 선택하셨고, 그 후에는 문학의 길과 군사평론의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시고 계십니다. 장군님의 이러한 모습은 저희 후배들에게는 참 군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시고 계시며, 우리 후배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군인의 정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신 분으로 널리 칭송받으며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6·25 60주년의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끝으로 후배 장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무엇인지요?
  • 올해 2010년 6월 25일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역사상 국가와 민족이 가장 혹독한 상처를 입은 동족상잔의 참극이었습니다. 우리는 북한 당국의 거짓과 잔인함 그리고 이어지는 흉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군 장병, 특히 고급제대 장교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그들의 적화 야욕을 직시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후배 장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첫째는 북한 당국의 거짓과 기만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이 거짓과 기만을 일삼고 있는지는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도 우리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북한을‘ 조폭국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장래의 대한민국은 여러후배 장교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두번째로 해주고 싶은 말은 군인의 정도正道를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곁눈질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우리 국군은 두 번의 쿠데타를 겪은 치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육군의 치명적 병폐였던 사조직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조직 구성원이 특진과 특별 보직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때 묵묵히 정도를 걷는 성실한 많은 장교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살펴야 합니다. 정의는 꼭 구현되며 불의는 꼭 응징을 받는다는 진리를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군 시절 31년간을 평탄한 불의의 길을 외면하면서 험준한 정의의 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묵묵히 걸어 왔습니다. 그 인고의 덕택에 나는 지금 무한히 흡족합니다. 더구나 세계에 우뚝 선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을 염원했던 천국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보람에 더 없는 행복에 젖습니다.
    <국방리더십저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