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장엄한 발자취, 월남전
주월한국군이 베트남전을 통하여 세계 만방에 한국군의 용맹성을 과시하면서 국위를 떨친데 대해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 육군은 베트남전에서 익힌 소부대 전술을 한국방어에 적용함으로써 얻은 역사적 전환점은 길이 교훈으로 빛낼만 하다. 한국군이 독자 개발하여 성공적인 성과를 올린 중대전술기지 개념과 야간침투작전은 세계 군사학계는 물론 일반 지식인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다. 이렇게 독자적인 전술로 한국군이 성공적인 베트남전을 수행하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본과 자유 중국이었다. 일본의 신문은 특히 맹호사단의 활약상을 크게 보도하며 월맹군과 베트콩이 무서워 하는 것은 오직 한국군 맹호 뿐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무렵 자유중국(현재의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어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개발한 독자적 전술전기를 전수해 줄것'을 요청해 왔다. 아울러 한국군 교수단 초청 서한도 함께 보내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육군본부에 한국군 교수단 자유 중국 파견을 지시했다.
1968년 3월 육군본부는 자유 중국에 파견할 교수단을 구성. 맹호사단 초대 참모장을 역임한 최영구 준장을 단장으로 하여 투코 전투의 당시 대대장 최병수 대령과 야간침투작전의 당시 대대장 박경석 대령(필자)으로 정하고 자유 중국에 파견하였다.아마 한국군이 독자 개발한 전술을 외국군에게 전수한 경우는 건군 이후 최초라고 생각한다.
자유 중국에 도착한 교수단은 3군 대학을 비롯하여 전체 자유 중국군 영관급 및 장관급 장교에게 강의했다.수강 대상의 전체 고급장교들은 단 한 사람도 결강하지 않았다고 당시 장경국 국방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필자는 이때 얼마나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임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는지 강의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광의 빛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베트남전 한국군 참전이 중반을 넘어서자 차츰 기강이 해이되면서 첫 전투부대 파병시의 당당한 기상은 빛바래기 시작하였다.더구나 미군이 곳곳에서 수세로 몰리는 현상이 생기면서 우리도 철수의 날만 손꼽고 있었다.더구나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이 귀국하고 새 사령관이 부임하자 모든 형태의 부대 운영과 리더십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무렴 맹호사단 기갑연대의 안캐패스(Ankhe Pass)전투는 치열한 전투로 확대되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치욕을 맞았다.안케패스란 빈딩성의 성도인 퀴논에서 크메르 국경까지 관통하는 19번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고개를 일컫는다.
이 일대의 주요지형은 안캐패스 정상인 638고지를 비롯하여 553고지 544고지 등의 높고 낮은 고지군을 형성했다.638고지는 안캐패스 일대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지로서 19번도로의 안전확보를 위해서는 절대적인 역할을 해왔다. 기갑연대 1중대는 중대전술기지를 이 고지에 설치하지 않고 그 하단부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에 설치했다.이게 큰 화근을 불렀다.더구나 놀라운 것은 중대기지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전 무려 1개월 전부터 중대전술기지 바로 눈앞 638고지 정상에 월맹군이 완강한 진지를 구축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동안 단 한번도 수색정찰을 하지않았다는 증거였다 공격을 받자 연대와 사단에서는 증원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이 건제를 무시하고 병력을 축차투입하면서 실패한 공격 축선상으로 재공격을 시도하는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적을 격퇴하여 19번도로를 개통시켰지만 너무나 많은 희생을 당하여 결코 전승을 뽐낼만한 작전이 아니었다.이 단일 전투에서 입은 맹호의 손실은 베트남 파병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컸다.
백마사단에서도 철수를 앞두고 긴장이 해이한 틈을 탄 베트콩의 기습으로 봉로만 사고라는 치욕을 남겼다. 맹호와 백마가 남긴 이 치욕이 베트남 파병 전 기간 중 가장 부끄러웠더 사건임을 그림자로 남긴다. 어느 나라 어느 군대나 전투에서 단 한번의 패배없이 전승을 기할수는 없다.그러나 실패를 교훈삼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대비가 현명한 리더십의 첩경이다.그런데 전쟁기념관 베트넘전 전시장에는 이 안캐패스 전투를 자랑삼아 내놓고 있다.관계자의 무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기록되고 후대에 자랑스러운 파병임을 각인시키기 의해서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역사가 긍정적이며 정확하게 이해되도록 노력해야 한다.한편 학문적인 토대 또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 32만여 명은 우리 육군을 세계 1급 군대를 성취시키는데 기여한 영웅들이며 국위를 만방에 떨치고 경제발전의 초석이된 애국자임이 분명하다.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용병도 아니며 결코 양민 학살의 주범도 아니다.맨 처음 언급한 것처럼 강정구,한홍그 두 교수에게 천명한 필자의 기조연설로 일단은 파병에 대한 모독을 잠재웠지만 앞으로 다시 모함할 수 있는 세력은 살아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당시 발표한 기조연설의 핵심 부분을 여기에 게재함으로써 반론의 토대로 남기고자 한다.
학술회의시 발표한 나의 기조연설문(요지)
전쟁과 국제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그러므로 전쟁규칙과 전쟁에 관한 각종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러 "침략전쟁이다" "청부전쟁 용병이다" "양민학살이다"를 정의 내리는 행위는 마치 돌파리 의사가 암 환자 수술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각종 통계에 따르면 세계 여러 전쟁,특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이나 월남군에 비해 민간인 희생이 가장 적었다는 것이 연합군이 공유한 공식 통계라는 것을 참작하기 바란다. 세계대전을 비롯 6.25한국전쟁을 포함한 모든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이 전투 당사자인 군인의 희생보다 월등 많다.그러나 주월한국군은 그 통계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공인되었다.그 요인은 이자리에 참석하신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훈령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에 충실했던 휘하 장병의 인도주의 실천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지휘했던 제1진 맹호 재구대대도 수많은 전투를 겪는 동안 민간인 희생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포탄이나 총탄을 군인만 죽이도록 고안된 기발한 발명품이 나오지 않는 한 민간인 희생을 막을 방법이 없다.그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학살이 아니다.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싶은 것은 전쟁이란 응징과 보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그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어쩔수 없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해 무고한 시민 수십만을 죽였다.그래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의 오래 전부터의 숙원이 아닌가.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일본이 양민학살이라고 미국에게 항의하지 않았던 그 이유와 배경을 살펴야 한다.그 희생된 수십만으로 하여 수백만이 더 희생될지 모를 전쟁을 종식시킬수 있었다는 데 의미와 명분을 둔 것이다
베트남전에서의 적은 월맹군과 배트콩이었는데 베트콩은 그들이 주장하는 양민이다.노인도 있고 여자도 있고 어린이도 있다.전장에서 상대가 적대행위를 할 경우 그 상대를 사살하는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합법적이다.베트남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에서 더욱이 피눈물을 흘려가며 양민보호에 임했던 나와 내 전우들을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모는 행위는 분명 이적행위이다.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강정구,한홍구 두 교수는 각성하기 비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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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관장 작성시간 24.04.13 박 장군님께서
언제나의 당시에 기록은 역시의
정갈하신 페이지에 감동입니다
軍의 작전 능력은 우리나라가
참 많은 굴레에 촛점이 있음이죠
월남 참전 前에는
동부전선 백두산 부대에서
복무의 추억이 새롭기도 하지요
추운 겨울이 한장일 때에
1.21 사태로 엄청난 군대 생활에도
군 지휘관님들은 작전의 수행에
만전을 기하는 거룩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입대하여 최전방의
생활은 무척이나 춥고 배가 고파서
고생의 나날이 많았음이죠
歲月따라 일병 상병 병장의 順에
만기전역의 병적증명이지요
저는 회사 운영을 했던 시절에는
아무리 명문 대학 나오고 똑똑했어도
병역미필자는 입사를 안 시켰죠
지금도 국회의원이나 공무원들
병역의무 필하지 않은 사람은
좋아하질 않음이라서 성격의 탓으로
돌리고는 햐지요!
이 저곳을 다닐 때에 장병들이나
軍차량을 보면 마음의 뿌듯함을
느끼며 격려의 손을 흔들곤 합니다
봄날의 꽃향이 좋은 계절에
박 장군님의 건안을 기원드립니다! 이미지 확대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14
좋은 글입니다,
동감입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자유게시판에 연재를 제의합니다.
요즈음은 내가 혼자 빈 칸을 메꾸고 있습니다.
쓴 글을 모으면 한 권의 책이 됩니다, -
작성자장태순 작성시간 24.10.06
진보진영 학자들에게
양민학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일은 통쾌했습니다.
오작교작전 때 20여 일간
베트콩 커녕 민간인 구경도
못했는데 양민 학살 이해 어렵고,
닌호아 사태 때 양민 보호를
위해 한국군이 많은 피해를
본 사실은 기록이 없습니다.
안캐 패스 작전 실패는
지휘관들의 실책이라고
지적하신 장군님의 지적을
동의합니다.
두코작전 참전 위해
안캐 고개를 넘을 때는
628고지에 진지를 구축
했었습니다.
수치스런 참패를 하고서도
근래에 현역 사단장을 참석시켜
추모 행사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기록이 참전병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끝없는 노력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