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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在求大隊 탄생과 강재구 대위 육군장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4.21|조회수173 목록 댓글 3
  4 재구대대 탄생과 강재구 대위 육군장
 
쓸쓸한 장례식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완전히 뜬눈으로 밤을 새워 본적이 많지 않다.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 뿐이리라. 그 가운데 자괴의 슬픈 일로 또한 위대한 살신성인의 귀감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에 의한  밤새움은 1965년 10월 4일 밤과 10월 5일 새벽일 것이다.
 새벽 3시가 되자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도하는 바른 자세로 정성들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 첫머리에 강재구 대위의 수류탄 사고에 지휘 책임을 지고 예비역 편입을 자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수류탄 훈련장 선정의 책임이 대대장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사고 현장 첫 감상을 세밀하게 썼다. 강재구 대위의 죽음을 사고사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강재구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위대한 군인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내가 현장에서 발견한 것은 내가 만일 강재구 였다면 어떻게 행동 했을까를 상상 해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만일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이 날아온다면 탄착점 반대방햫에서 엎드렸을 것이라고 생각이 미치자 강재구 대위야말로 살신성인의 귀감으로 영원히 국군사에  그 정신을 기려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즉 이번 사고는 위대한 군인정신의 구현이라는 국면에서 종결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본인 박경석은 군에서 물러나지만 강재구 대위만은 위대한 귀감으로 빛내달라고 간곡히 청원했다.
 내 청원서한은 사단 헌병참모를 통해 사단장 채명신 소장에게 전달되었다. 바로 다음날 제2이동외과병원에서 강재구 대위 장례식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언론은 지금처럼 민활하지 못한 탓인지 일간 신문 사회란 구석에 강재구 대위 사고사 기사가 조그맣게 게재되었을 뿐이었다.
 예정대로 제2이동외과 병원에서 간소하게 장례식이 열렸다. 가족으로는 강재구 대위 부인 온영순 씨가 참석했다. 나는 죄인처럼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너무나 간소한 장례식이었다. 물론 조화도 보이지 않았다. 
 
채명신 사단장 현장 방문
 
 다음날 채명신 사단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일 강재구 대위 순직 현장을 방문 할테니 대대장이 사고 내용을 설명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브리핑 준비를 마치고 순직 현장에 달려갔다. 현장에 여러 흔적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선의 병사 위치, 수류탄을 잘못 던진 박해천 일병의 위치, 수류탄이 날아가는 방향과 탄착점, 중대 병력의 위치 등이었다. 이어서 연대장 김정운 대령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고 내일 그 자리에 참석해줄 것을 건의했다. 연대장 김정운 대령은 육사 7기로 6.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바 있는 과묵한 성격의 지휘관이었다. 이번 사고에 대해서도 일체 말이 없어 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약정된 시간에 연대장을 비롯해 연대, 대대 참모, 중대장 일동이 모두 수류탄 사고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브리핑 차트를 준비해 놓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집차에서 내린 사단장은 내 앞에 다가서더니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박 중령, 군복 벗을 필요 없어" 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야전 의자에 앉았다. 
 
 재구대대 탄생
 
 대대장은 현장에 브리핑 차트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죄인인 양 몸 둘 바를 모르고 어려워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속으로 몹시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손을 놓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이윽고 대대장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그 내용인즉 이번 순직 사건은 위대한 부하사랑으로 육군사에 영원히 남길 살신성인의 역사적 순간임을 강조한 뒤, 그러나 대대장의 위치에서는 수류탄훈련장의 잘못 선정한 책임이 있음으로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뜻밖의 제안을 하여 나와 연대장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지휘하는 '제1연대 제3대대를 오늘부터 재구대대(在求大隊)로 선언하여 영원히 고 강재구 대위의 부하사랑의 정신과 살신성인의 거룩함을 육군사에 남기겠다' 고 했다.
 연대장, 사단장 직속상관 앞에서 자기 대대를 멋대로 이름 지어 선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대대장의 유창한 브리핑을 계속 듣다 보니 대대장이 밉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녀석 쓸만한 녀석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차츰 상했던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육군대학에서의 강의와 국방대학원의 특강에서 명성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과연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말미에 가서 나와 연대장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눈치챘는지 "저의 재구대대 선언은 오로지 대대장인 자신의 마음 속의 메아리일 뿐 그 공식화는 여기 계신 존경하는 사단장 각하의 영단에 달려 있습니다" 고 했다.
 명쾌한 대대장의 브리핑과 빛나는 눈동자에서 나는 마음이 움직였다. 이때 대대장 박경석 중령의 생각과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대대장을 가볍게 안았다. 그리고 오른 손의 지휘봉을 왼쪽으로 옮겨 잡고 오른손으로 대대장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래 경석아, 오늘 이 시간부터 네 대대는 재구대대로 탄생했다. 뒷일은 나에게 맡겨라'
 나는 대대장에 이어 두 번째 재구대대 선언에 가담한 격이 되었다. 연대장 김정운 대령은 어리둥절해 서 있었고 대대장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사단사령부로 돌아와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과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한 후 재구대대 명명을 구두 승인 받았다. 이후 국방부는 일반명령으로 수도사단 보병제1연대 제3대대를 재구대대로 명명했다
                                                               [ 베트남전쟁과 나 ] 채명신 회고록125.126.127P 발췌-
  
육군장,일계급 특진,태극무공훈장 추서
 
 제2이동외과병원에서의 쓸쓸한 장례식이 끝난 이틀 후인 1965년 10월 8일 우리나라 모든 조간신문에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의 순직 사실이 공개되면서 육군본부 광장(현 전쟁기녑관 터) 에서 고 육군소령 강재구의육군장이 거행된다는 소식이 일제히 발표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강재구 대위의 일계급 특진과 함께 군인 최고의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이번 장례식이 국군 역사상 첫 위관 장교의 육군장임을 공개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채명신 장군의 서한 형식의 사실보고에 접하고 크게 감동하여 고인에 대한 장례 예우 하나하나를 직접 지시했음이 알려졌다. 한편 채명신 장군의 서한과 함께 '박경석 대대장의 청원서'도 함께 전달되었음이 그 후에 확인되었다.
 이처럼 신속히 절차가 진행된 이면에는 육군의 정식 행정 절차에 의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과 채명신 장군의 개인 친분관계에 의한 채명신 장군의 직보 때문임이 알려졌다. 그 두 분 사이는 5.16 거사에서 동지 관계였다. 5.16 전야 제5사단장 재직시 일부 병력을 이끌고 서울 근교까지 진출, 거사 지지 성명을 발표해 어려웠던 국면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 후 채명신 장군은 혁명정부 감찰위원장(현 감사원장)으로 임명되어 부패 척결에 앞장 서 뜻을 이룬 다음 혁명공약대로 원대복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계 진출을 적극 권했지만 채명신은 '군인으로 생을 마감하겠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육군에 복귀했다.
 
상상을 초월한 거국적 추모 열기
 
 고 강재구 소령의 육군장이 끝난 다음날, 거의 모든 보도 매체는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찬양 하느라 다른 뉴스들은 숨죽인 상태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홍천의 맹호사단사령부와 1연대 3대대 숙영지는 시민과 기자들로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전 참전 반대론은 자취를 감추고 참전 장병은 승전 용사처럼 대우가 격상돼 어린 학생들의 태극기 축복 속에 자랑스러워했다.
 한동안 부모의 반대때문에 탈영병으로 속앓이 하던 출정 부대들은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따라 탈영병이 멎어버렸다.
 강재구 소령의 출신 육사를 비롯하여 모교 서울고등학교에서는 제빠르게 동상 건립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는가 하면 홍천군에서는 순직 현장에 기념공원 건립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추모 열기가 기쁘지만은 않았다. 내 사랑하는 직속 부하가 죽었고 그 책임의 일단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체 기자와의 접촉을 피하고 참선하는 자세로 다음과 같은 '소령 강재구'의 시를 눈물을 흘리며 써서 내 진중일기에 올렸다. 
훗날, 이 시 '소령 강재구' 는 홍천 강재구 기념관에 헌정되고 학교 교재에 게재되는가 하면 한국문단에서는 한국의 명시로 선정되었다.
 
  
                              아, 강재구
 
                                                 박경석
 
                       참사랑 하늘을 울린다
                       의로운 기개 강산에 메아리친다
                       옛 화랑 충절 빛낸 것처럼
                       강재구 그대는
                       오늘의 화랑이었노라
 
                       목숨 잦는 아픔
                       뉘 모를까마는
                       부하 사랑 때문에
                       한 줌 재로 자진하는 숭고함에
                       우리 모두 고개 숙이도다
 
                       아, 강재구 소령
                       그대 죽음의 길 택했을지라도
                       모든 전우와
                       뒤따르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의미
                       심어 주었도다
 
                       그대는 살아 있으리
                       그 숨결
                       그 정신
                       살신성인의 귀감 되어
                       만세에 길이길이 보전되리라
                                   
                                           1966년 10월 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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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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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4.21 박 장군님
    재구대대의
    탄생에 마음이 아프군요
    부하의 전우애는
    이렇게 훗날까지도 여운이 있습니다
    산화하신 젊은 넋에
    언제나의 충성의 拜를 올리고 싶네요
    일요일 다녀갑니다
    언제나 박 장군님의 건안을
    기원드리겠습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1
    격려의 글, 고맙습니다.
  • 작성자장태순 | 작성시간 24.10.07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 정신은
    군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속 상관을 잘 만났기
    때문에 빛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군님께서 대대장 직을 걸고
    영웅을 탄생 시킨 것입니다.
    다른 대대장이 가능 했을가요?
    부하를 극진히 아끼는 상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글 여러 곳에서 부하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사자는 말이 없겠지요.
    장군님께서는 맡은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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