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재구의 유산 '신화 창조'
재구의 유산
『맹호사단 제1진 재구대대는 베트남에서 잘 싸워 대대단위 최고의무공훈장 수훈을 기록했다. 불과 1년 사이 고 강재구 소령의 태극무공훈장에 이어 대대장 박경석 중령 두 개의 을지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중대장 용영일 대위, 소대장 김무석 중위, 소대장 김길부 중위 등 다섯 개의 을지무공훈장과 15개의 충무무공훈장, 32개의 화랑무공훈장, 인헌무공훈장이 재구대대 장병들에게 수여되었다. 나는 그때의 재구대대 명명을 되돌아 보며 당시의 재구대대 명명을 잘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전쟁과 나] 채명신 회고록 127p 발췌-
맹호 사단장 채명신 장군의 회고담에서 밝힌 재구대대의 성공 요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강재구 대위 순직 후 거국적으로 벌어진 추모 열기로 재구대대 장병이 책임감과 함께 고도의 자랑스로운 긍지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대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이 강재구가 된 것처럼 극도로 긴장하면서 출진하게 되었다. 가령 부산항 제1부두에서 맹호 전투부대 주력이 출진하는 환송 행사에서도 많은 국민들의 눈에는 오직 재구대대만 의식하며 '재구대대' 를 연호하는 환송식처럼 열광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기 충천의 의미를 '재구의 유산'으로 이름 붙이게 되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 열기는 임무 수행 고비고비마다 직접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재구대대 장병이 일치단결하여 임무수행 하면서 대대장 이하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채명신 사단장의 작전 개념과 전략 전술 의도를 100% 복종하면서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특히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국군사는 물론 세계 전사에서도 찾을 수 없는 특별한 것으로 이의 실행을 미군 당국자는 물론 맹호 참전 단위부대 지후ㅏ관까지 회의하는 가운데 재구대대는 그 개념을 철저히 준수했다. 이 개념의 선택은 대대장만의 의지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중대 단위 전술이기 때문에 중대장의 수용 태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더구나 3명의 소총 중대장 모두가 고 강재구 소령과 육사16기 동기생이었던 점에서 중대장의 결속력이 성공할 수 있도록 작용했다.
그 문제의 중대전술기지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어지는 다음 글에 주목하기 바란다.
채명신의 중대전술기지 개념
베트남전에 맨 먼저 상륙한 한국군 전투부대 제1진은 맹호사단 제1연대와 기갑연대 등 2개 연대와 해병 청룡 1개 연대를 합한 1개 보병 사단 규모였다. 당시 이 전투부대는 무늬만 한국군이지 군제(軍制-military system)를 비롯한 전술 교리 등 모든 것이 미군껏이었다. 당시 육군대학을 비롯해 모든 군사학교의 교재는 미군의 번역본이었다.
한국군에서 계발한 전술 교리는 물론 기초학문 교재는 단 한 건도 없었고 모두가 미군 메뉴얼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뜻 있는 장교라면 그 문제를 고민 하며 한국학 계발의 필요성을 절감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발이 1965년 파월 제1진의 엘리뜨 장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첫 선구자가 채명신 소장이었다. 당시 미군의 베트남전 평정 전략은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그 지역에 폭격 등 많은 화력을 퍼붓고 헬기를 이용한 공중기동작전으로 강습, 적을 소탕하는 개념이었다. 그 전략은 목표지역의 적을 격멸하는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미군이 떠나가면 바로 베트콩 지역으로 원상태 회복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미군과 배트콩 간의 베트남전 양상은 술래잡기를 되풀이 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적 지역을 점령해 평정지역을 넓혀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 저항만 더 키워가는 미군의 전략과 전술에 채명신은 주목했다.
미군의 월남전 전략은 '탐색과 섬멸-search and destroy'이었다. 그러나 탐색하고 섬멸하는데까지는 좋은데 미군이 철수하면 전과 다름없는 그들의 세상으로 돌어온다. 이런 형상을 보아온 채명신은 미군의 전략과 전술을 따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특한 대책 계발에 몰두 했다.
채명신은 적을 치고 눌러앉아 그 지역이 평정될 때까지 주민과 함께 한다는 전략이었다. 영문으로 표현한다면 ' hit and stay'가 될 것이다.
채명신은 이미 작전지휘권은 확보했겠다 자신이 마음껏 월남전을 수행하기 위해 미군의 전략과 전혀 다른 중대전술기지개념을 창안했다. 이 중대전술기지개념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엉뚱한 것이었다.
중대전술기지개념은 다음과 같다.
사단에 할당된 광할한 전술책임지역(TAOR)이 있다. 사단의 전술책인지역을 대대별로 다시 할당 한 후, 그 지역에 목표를 정해 공중기동작전으로 강습 점령한 다음 복귀하는 전술에서 벗어나. 사단의 모든 중대를 광할한 전술책임지역에 중대별로 깔아놓는다. 그 중대는 각각 사단 포병화력의 지원 사격을 받을수 있도록 사단 포병을 연대 또는 대대에 분할 배치한다.
중대전술기지는 중대장 책임하에 원형의 사주방어진지를 구축해 적의 공격에 대전할 수 있도록 48시간 전투에 소요되는 탄약 등 전투물자를 확보한다. 중대는 48시간 적과 교전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그 중대전술기지에 침투하는 적을 격멸한다음 또는 격퇴한 뒤 지역이 완전히 평정되면 공중기동작전으로 다음 목표지역으로 공격, 중대전술기지를 설치 다시 차기 작전에 들어간다.
채명신은 적 지배지역이 많은 베트남 작전지역에서 평정지역을 넓혀갈려면 이렇게 중대를 분산 배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의 명령에 의해 파월 제1진 한국군은 일제히 광활한 전술책임지역 일대에 중대전술기지 설치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엄청난 공사판을 확인하게된 미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적을 공격하기 위해 온 것이아니라 방어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커갔지만 이미 작전지휘권이 채명신 소장에게 넘어갔으니 뭐라고 간섭할 수도 없고 냉가슴만 앓고 있을뿐이었다. 월남군도 놀랐고 적인 베트콩을 비롯 월맹군 당국도 회의의 눈초리로 한국군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사면초가가 된 채명신은 그러나 눈 하나 까딱 않고 중대별 전술기지 공사를 강행시켰다. 다행이 한국군은 충분한 보급지원을 미군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단의 전술책임지역내에는 중대전술기지가 예상보다 빨리 완성 될 수 있었다.
이 중대전술기지 설치로 가장 곤궁에 빠지게 된 쪽은 베트콩이었다. 맹호사단의 전술책임지역은 월남 중부의 최대 곡창지대인 고보이 평야 였다. 여기에 맹호 중대들이 느닷없이 들어닥쳐 중대별로 공사판을 벌리고 물러날 생각을 안하니 베트콩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고보이 평야를 잃게 되어 졸지에 밥줄이 끊어진 것이다. 그 광활한 고보이 평야에서 2부작 또는 3부작을 해서 식량을 조달했는데 난감하게 된 것이다.
베트콩은 얄금얄금 기어들어와 중대전술기지를 하나하나 공격해 축출하기 위해 야음을 이용, 침투공격을 시도했지만 공격과 동시에 포병 화력의 날벼락을 맞아 곳곳에서 주검만 남기고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 채명신에 의해 모든 중대전술기지가 사단 포병으로부터 보호 받게한 지원책에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 일각에서는 언젠가는 중대전술기지가 베트콩이나 월맹군으로 부터 유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미군은 대대나 연대도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채명신은 중대전술기지를 순회하면서 포병화력지원에 보호 받고 있는지, 48시간 싸울수 있는 탄약 등 보급물자를 비축하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다녔다.
채명신의 생각으로는 사단 포병의 지원권 안에서 보호 받는 상태 하에서 중대원이 48시간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면 중대전술기지를 적이 유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재구의 신화 창조
재구대대 제1진 각 중대는 내가 지휘한 베트남전 13개월 동안 중대전술기지에서 단 한 차례 적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았고 침투를 시도한 적은 모두 진전에서 사살되었다. 이를 빗대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은 '재구의 신화 창조' 로 이름 지었다.
재구의 유산으로 기록될 자랑스러운 이 신화는 적 사살보다 귀순병을 포함한 포로 264명에게 있다. 싸우지 않고 대적 선무공작과 대민 지원사업을 통한 재구대대 제1진의 전과 가운데 귀순병의 수는 맹호사단 전체 귀순병의 숫자보다 많았다는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