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밤을 되찾은 재구대대
밤은 월맹군과 베트콩의 세상
채명신 장군의 리더십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자료로 새롭고 유익한 창안을 완성하는 방법이 있다. 그 대표적인 창안이 중대전술기지 개념이었다.
두 번째 리더십의 특징은 채명신 자신이 방안을 제시하여 예하 지휘관으로 하여금 창안으로 유도케 하는 방안이다. 그 대표적인 전술개념은 바로 야간침투공격작전이었다.
채명신은 6.25전쟁에서 야간을 활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지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할 때 늘 야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채명신 장군이 가장 놀란 것은 미군이나 월남군이 야간작전을 기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월남전선의 야간은 100% 베트콩과 월맹군의 전유물이 되어 있었다.
미군과 월남군은 밤이 되면 거의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기지 방어에만 신경을 썼다. 더구나 전쟁 기피 현상이 뚜렷했던 월남군은 야음은 공포의 세상으로 여기고 있었고 야간 작전은 생각하지도 않은 별개의 세계로 이질시했다.
한국군이 되찾은 베트남의 밤
채명신 장군은 작전회의를 통해 예하 지휘관으로 하여금 야간작전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야간작전은 명령에 의해 실시케 하는 것보다 예하 지휘관이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 자발적으로 시행해야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명신 장군이 야간작전에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첫 반응은 맹호사단 내가 지휘하는 재구대대(在求大隊)에서 나타났다.
나는 6.25전쟁 시 소총소대장으로 야간작전 경험이 있었고 화랑무공훈장까지 수훈해 누구보다 야간작전에 대한 효용성을 잘 알고 있었다. 사단장의 야간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전회의를 마친 후 나는 야간침투공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미군이나 모든 군대의 야간작전 메뉴얼은 있었지만 대대장인 나는 보다 실용적이고 완전한 야간침투공격을 구상하기 시작 했다.
우선 첫단계 조치로 대대 일과시간표를 변경해 점심 후 오후는 전원 취침케 하고 석식 후 야음을 이용한 수색 매복 등 야음에 익숙하도록 대대 장병을 길들여 갔다.
재구대대 9중대장 용영일 대위와 11중대장 이재태 대위는 직접 야음을 이용해 방법 하나하나를 시험하면서 야간침투공격작전에 익숙하도록 훈련을 쌓아갔다. 재구대대장인 나를 비롯해 중대장들과 합의해 실행에 옮긴 야간침투작전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적 공격목표를 정한 뒤 그 지형을 익힌다. 특히 목표 후방지역의 적병 도주로에 대해 좌표를 확인한다.
2. 목표에 도달하는 침투루트를 상세히 파악하고 우회 정찰하면서 적을 기만한다.
3. 목표 후방 지형 가은데 목표를 제압할 수 있는 지형을 정찰, 공격개시 전에 침투 확보계획 수립한다.
4. 포병화력지원계획을 수립하되 적으로부터 발견되기 전까지는 화력사용을 보류 대기한다.
5. 목표지역에 대한 조명계획을 세워두되 목표 접근전까지 대기하다가 돌격개시와 동시에 조명 실시한다.
6. 끝으로 적 도주 예상 경로에 대한 포병사격은 돌격개시와 동시에 실시한다.
이 기본개념에 의한 예행연습을 실시한 재구대대 9중대와 11중대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했다. 연대를 거쳐 사단의 작전승인을 얻은 재구대대는 10중대를 예비로 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은 은밀히 침투로를 따라 침투시켜 1개 소대씩 목표 후방 고지에 배치가 완료되고 공격 소대가 목표지점에 도착과 동시 포병화력으로 목표지역을 강타했다. 이어서 목표 후방 도주로에 대한 제압사격을 실시 돌격을 감행하자 단숨에 적을 제압함으로써 9중대와 10중대의 목표를 각각 탈취,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베트콩의 전유물인 밤을 우리 한국군이 되찾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 대대 단위 야간침투공격작전은 규모를 봐서나 월남전에 미치는 영향으로 볼때 획기적인 승첩은 아니였지만 결과는 예상 외로 크게 관심을 끌었다. 한,미,월 연합군 첫 야간작전에의 승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맹호사단, 뒤늦게 베트남전에 투입된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은 한결같이 야간작전을 관용전술(慣用戰術)로 사용함으로써 월남전에서의 야간작전의 주도권을 한국군이 갖게 되었다.
자유중국 영관 장교와 장군에게 강의
재구대대의 야간침투공격작전의 성공은 그후 국내외에 널리 보도되는 한편 이 작전을 종군 취재한 시카고트리븐지 체슬리 맨리 기자가 작성한 종군기 기사는 미국 하원 의사록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한국군 최초의 독자적 중대전술기지 개념과 함께 야간침투공격작전 교리가 탄생한 것이다. 외신은 일제히 한국군이 계발한 이 두 전술교리와 작전 성공을 놀라워 했다.
외신이 이 성공적인 여간침투작전을 대서특필하자 이 소식에 접한 자유중국(현재의 대만) 장개석 총통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중대전술기지개념과 야간침투공격작전의 한국군 교리 특강을 요청해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즉각 교수단 파견에 동의한다는 서한을 자유중국 장개석 총통에 보내고 국방부에 교수단 파견을 지시했다.
국방부는 이 서한에 따라 교수 요원 추천을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요청했다. 채명신 장군은 이미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승첩 당사자를 다음과 같이 교수 요원으로 추천했다.
교수단장 최영구 육군준장 (당시 맹호사단 파월 제1진 초대 참모장)
전임교수 박경석 육군대령 (당시 초대 재구대대장 - 대대 야간침투공격 담당)
전임교수 최병수 육군대령 (당시 기갑연대 3대대장 - 중대 전술기지 두코전투 담당)
전임통역 안수성 육군대령 ( 중국 황포군관학교 졸업, 중국군 중위 역임)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교수단 요원에 대해 육군본부는 적격자임을 확인하고 1968년 7월 자유중국에 파견했다. 그 후 이 교수단은 자유 중국군 전 장군과 영관급 장교들에게 주월한국군에서 계발한 한국군 독자 전술교리를 강의했다.
강의는 군단급 부대 단위로 이루어졌다. 멀리 금문도까지 가서 강의를 했다. 이때의 강의가 자유중국군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중국군도 기존 교리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들 강의를 듣고 새로운 전술 계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전까지는 모든 군사학문이 전적으로 미 육군 군사교리에 의존했으나 베트남전을 통해 창안된 새로운 전술개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군사학문 한국학이 탄생하였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이관장 작성시간 24.04.24
오늘의 주신 박 장군님에
글 속에는 채명신 사령관님의 경험
°우리 박경석 장군님°과
함께하신 전우애는 존경의 마음입니다!
이 사진은 채명신 사령관님과
박 장군님의 모습이심이네요!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24 위 사진은 채명신 장군이 본인에게 을지무공훈장 약장을 달아주는 장면입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24 1965년 진해 육군대학에서 군단 방어를 강의 하면서 한국군 최초로 한국전쟁을 심층 연구했습니다.
그후 월남전에 참전, 채명신 장군 부하 경험을 통해 이순신 이후 한국군의 최고 전쟁 영웅임을 확인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