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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4장 신화창조의 전장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5.02|조회수123 목록 댓글 1

 제4장. 신화창조의 전장

 

 맹호사단장 채명신 소장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월남공화국 수도인 사이공에 주월한국군사령부를 개설하였다.이 내용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나 매우 깊은 의미가 숨어있다.

 

 애당초 미군 당국은  한국군 전투부대가 도착하면 주월 미군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려고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한국군 독자적인 사령부 개설은 미군 당국에서 바라지 않았다.만일 사령부를 개설하더라도 맹호사단이 있는 빈딩성 퀴논에 개설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그러나 채명신 소장은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사이공에 설치하자 미군 당국은 당황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독립국가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지휘하겠다고 강제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한국군을 지휘하겠다고 나선데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파월 전 서울에서 한미 두 군 관계관이 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구두로나마 한국군이 베트남에 도착하면 미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으로 양해되었었다.심지어 한국군 대표인 합참 작전국장 손희선 소장은 회의 석상에서 "한국군이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까지 너스레를 떨었기 때문에 미군측에서는 한국군의 작전 배속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채명신 소장의 의중은 분명했다. 베트남에서의 전투는 미군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한국군 독자적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이미 서울에서 출발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라에서 채명신 소장은 휘하 부대를 직접 작전지휘하겠다는 결의를 다졌고 그 문제에 관한 한 박정희 대통령은 채명신 소장에게 위임되었다.

 

 채명신 소장이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가져야 되겠다는 이유는 매우 진취적이며 타당성이 인정되었다.

 

 

 

 

 첫째, 당시 한국의 일부 야당측에서나 공산권에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달러벌이 용병이라고 모략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자존을 위해서도 독자적 지휘권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베트남전의 양상이 불확실하므로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다면 우리 한국군이 미군들이 가지못하는 위험지역에만 투입될 수 있고 그렇게 됨으로써 걷잡을수 없는 많은 희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군 독자적 교리를 창안하고 실험하면서 발전적인 전투 경험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끝으로 베트남전에서 당사국인 월남군이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같은 독립 국가의 군대인 한국군만이 미군 사령관 작전지휘하에 둔다면 공산권에서 주장하는 청부전쟁 용병임을 자처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미군 당국자들에게 채명신 소장이 한국군 독자적 작전지휘권 화보의 당위성을 설파한 연설문은 유명하다. 그 연설을 경청한 웨스트모얼랜드 주월미군사령관 이하 참석 장성들은 그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마침내 한국군 독자적 작전지휘권이 양해되었다.

 

 그 연설문의 요지는 한국의 처한 어려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미국과 미군에 의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이 자칫 한국군이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달러벌이 용병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제시했다.또한 공산권의 모략 중상을 기정사실화 할 수 있음도 지적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의 전통적 우의와 긴밀한 협조로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작전 지휘권 문제가 일단락되자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다.채명신 소장은 한국군이 부여받은 전술책임지역(TAOR)내에서 미군과 월남군 방식과 전혀 다른 중대단위로 분산 각각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근본적으로 미군의 작전개념과 달랐다.미군의 작전개념은 일명 수색격멸전략(Search and Destroy Strategy)이라는 기동작전이었다.주로 전투단 단위로 주둔하면서 적을 찾아 신속한 기동으로 적을 포착섬멸하는 정규전 방식이었다.

 

 채명신 소장의 중대전술개념은 전술책임지역 내에 중대별로 산개하여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하고 48시간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지역 평정이 달성되면 전술책임지역을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미군과 월남군 당국은 회의의 눈초리로 중대전술기지를 보고 있었다. 미군이나 월남군은 대부대도 기습을 당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데 중대쯤은 베트콩의 먹이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나 월남군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음이 입증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바로 멩호의 두코와 청룡의 짜빈동에서 두 전술기지의 중대가 각각 연대급 월맹군과 베트콩을 섬멸한 것이다.베트남은 물론 자유세계 주요 매스컴은 이 중대급 한국군의 대첩을 특집기사로 보도하면서 한국군의 이룬 기적에 대해 극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바로 이때부터 한국군은 세계 1급 군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이 대첩에 이어진 맹호의 야간침투작전의 성공으로 '맹호는 베트콩의 전유물인 밤을 되찾았다'고 세계 군사학계를 놀라게 하는 신화를 창조했다.

 

 이렇게 성과가 이어지자 미군당국의 한국군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이어서 전체 한국군에게 대망의 M16소총을 비롯한 공용화기 무전기 등 미군과 동등한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필자는 이때부터 우리 육군이 명실상부한 세계 1급 군대로 도약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우리 육군의 변화가 베트남전에서만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바로 한국의 155마일 휴전선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육군이 파병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휴전선은 북한군의 훈련장이라고 빗댈 정도로 DMZ주도권을 북한군이 행사하고 있었다.그러다가 배트남전에서 귀국한 소대장 분대장들이 휴전선에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DMZ에서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1967년부터 그 효과가 극대화되기 시작하면서 공비의 지상침투가 완전히 봉쇄되어 침투하는 쪽쪽 우리 장병에게 사살되었다. 북한당국은 마침내 지상침투를 포기하고 해상 침투로 전환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베트남전은 우리 육군에게 현대전의 운영까지 터득하게 했다.1965년 11월부터 시작한 맹호사단의 모든 기동작전에서 미군측은 미군에 못지 않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헬기 뿐만 아니었다. 근접항공지원은 물론 B52중폭격기에 이르기까지 보병대대장이 요청하면 요청지역 하늘에 나타나 폭탄을 퍼붓고 갔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군은 현대전 장비를 남용하지 않았다.바로 한국전에 필요한 전기전술을 개발하고 익히기 위해서였다.

 

 주로 야간침투작전,수색정찰,매복,유인전술 등 재래식 전기를 발전시켜 한국방어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그 결과 현대전 방식의 전술 적용시 보다 재래식 전술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을 압도하는기적과 같은 전과를 올렸다.

 

 

 

 

 지금은 그당시 신화창조의 주역인 전사들이 우리 육군을 떠나 모두 노병이 되었지만 한결같이 육군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노병들이 기대한 것보다 더 멋지고 씩씩힌 후배를 보는 눈은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영롱하다.

 

 필자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육군에 몸을 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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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박경석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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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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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5.02 신화창조의
    주월사령부의 위상은
    사이공에서 더욱 빛나는 전력에
    많음이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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