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개입과 통일의 좌절, '천추의 한'을 남기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에 있어서 파죽지세(破竹之勢)라 할 정도로 승승장구 속전속결(速戰速決)의 여러 기록을 세웠다.
9월23일 이후 전선에서 북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서부 전선에서는 유엔군이 경부 축선과 호남 우회로를 따라 진격했고, 국군은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중앙선 축선과 동해안로를 따라 진격하였다.
주공인 미 제1군단은 진격개시 3일만인 9월26일 22시에 오산 북방에서 인천상륙부대인 미 제7사단, 제31연대와 연결하였고 다음날인 9월27일에는 인천 상륙부대가 서울을 탈환하고 한국 해병대의 한 소대장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한편 동해안으로 북상한 육군 제1군단은 반격을 개시한지 14일만에 9월30일에 강릉을 지나 38선에 도달하였으며, 육군 제2군단은 이날 원주를 점령하고 38선을 향해 북상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신속한 기동작전으로 혼비백산한 인민군은 그들의 퇴로가 차단된 채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어 2만3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전투조직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일부 부대와 패잔병들이 지리산,오대산,태백산 등 산악지역으로 도피 잠입하여 그 후 게릴라전을 전개하게 됨으로써 후방지역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38선 이남을 완전히 회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을 시작으로 38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총진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의 기동계획은 미 제1군단이 주공으로서 서부의 사리원-황주를 경유하여 평양을 목표로 진격하고, 국군 제1군단은 중동부 전선 및 동해안 지역에서 원산 방향으로 진격하며, 국군 제2군단은 중부에서 평강-양덕을 경유하여 청천강선으로 진격하고,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 후 그 일부를 서진시켜 서부전선의 미 제8군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북한군은 서해안 방어 사령부와 전선사령부가 38선 북방에 방어선을 설정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면서 그들 철수부대를 수습하고 있었으나 그 저지력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한지역 진격은 북한 인민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진했던 속도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무풍지대를 질주하여 10월23일에는 청천강선인 회천까지 도달했다.
청천강선에 도달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4일 한·만 국경선을 향해 총진격전을 개시하였다. 이 진격은 작전이라기 보다 부대 이동에 가까울 정도로 순탄하게 이루어졌으며 모두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10월 25일, 국군과 유엔군이 박천-울산-온정리 회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불의에 중공군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국군은 물론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미군의 군사정보 기관에서도 중공군 개입에 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한국전쟁 발발 최초의 상황처럼 전혀 캄캄한 상태였다.
일부에서 소련이나 중공의 군사개입을 염려하는 소리도 가끔 있었지만 미군 당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 대부대는 울산, 온정리, 회천 방면으로부터 은밀히 침투하여 국군 및 유엔군 공격부대를 후방에서 차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10월26일에는 육군 제6사단의 전투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였으며 서부 지역의 미 제1군단 예하 미 제24사단은 11월1일에 신의주 남방 27km 지점인 정거동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는 개의치 않고 후방 깊숙이 침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그들의 관용전술 (慣用戰術:usage tactics)인 「후방 치단 후 포위하여 뒤통수를 치는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 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공세가 좌절된 것은 물론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막대하였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흥분에 들떠 있던 국군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생전 듣지도 못한 이상 야릇한 피리소리와 함께 징, 꽹과리, 북 등을 치며 사방에서 공포심과 함께 혼을 빼는 소란을 피워가며 포위망을 좁혔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야기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자 중공군 지역에 대한 공중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후방으로부터 미 제9사단을 청천강선에 추가로 투입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11월24일을 기하여 다시 총공세를 폈다. 이때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규모와 그들의 기도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중공군을 과소평가하여 국지적인 전투임무를 띤 제한된 병력으로 오산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판단과는 달리 중공군의 규모는 추정수의 10배가 넘는 6개 군단 18개 사단 규모의 1차 투입병력에다 추가로 12개 사단이 증강되는 등 무려 30개 사단, 42만명의 대병력이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는 무참히 꺾이고 11월30일을 고비로 철수가 가속화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2월 중순에는 38선 근처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중공군의 기세는 갈수록 강화되었다. 다음해인 1951년1월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중공군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1월7일에 평택-삼척선으로 후퇴, 새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중공군도 병참선이 멀어지고 유엔 공군기의 집요한 공격으로 피해가 늘어감에 전력이 약해지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간과한 국군과 유엔군은 1월25일을 기하여 수원-강릉선에서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한강남안-횡선선에 이르렀을 때 다시 중공군에 반격에 부딪쳐 한때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3월15일을 기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이후 70일 만에 서울 재탈환에 성공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국군과 유엔군은 전진을 계속하여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다.
중공군은 다시 다섯번째의 공세가 되는 소위 춘계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였다.당시 중공군의 병력은 4개 병단,16개 군단,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쌍방간 서울 공방에 초점을 두고 실시된 작전이었으나, 중공군의 서울 탈환은 성공하지 못한 채 피아 공히 막대한 손실을 내고 막을 내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6월15일에는 문산-철원-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지역을 점령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중공군도 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유엔군이 공격을 중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이유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유리한 상태에 있으나 전쟁 전의 원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으며, 중공군이 수세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춘계공세 이래 연이은 치명적 손실로 인하여 공격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부터 전선은 교착상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에서 피아 소모전만 반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국측은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왜냐하면 국토통일의 기회를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측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한편,국군만의 북진 결행으로 사태를 반전시키겠다고 위협했지만 미국의 국익과 세계 여론이라는 두 장벽에 부딪쳐 우리의 염원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에 있어서 비극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 겨레를 해방시켜 조국을 찾게하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에 의한 적화통일 직전의 위기에서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게 해준 절대적 맹방이지만 한편, 미국은 38선을 그어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케 한 것과 중공군 개입을 자초, 국토통일 직전에서 미국의 이익과 그에 따른 정책에 희생되어 남북통일의 호기를 놓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대한민국이 약소국이기 때문에 국력의 한계와 대륙세력 해양세력의 틈에 낀 지정학적 운명 탓으로 또다시 길고 긴 비극의 터널에 들어섰다.
원래 역사에서는 '가정'이 무의미하다.그러나 가정을 통해서 '사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맥아더 장군의 퇴진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와 연관해 두 가지 가정을 할수 있다. 하나는 맥아더 장군의 전략개념에 의해 만주폭격을 감행하면서 확전으로 갔다면 한반도 통일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둘째는 만약 확전을 했다면 소련까지 개입해 세계3차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가정.이 두 가지 가정 가운데 어떤 것이 적중 할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결국 'key'를 쥐고 있는 트루먼 대통령 판단에 좌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힘을 키워야 된다는 문제에 도달한다.
현 우리나라 정세는 태평을 구가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불확실성의 김정은이 건재하고 북한 인민군 100여 만명이 DMZ북단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한 위기는 언제나 올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 국력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문제가 따른다.그러므로 미국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한미동맹을 곤고히 하고 북한당국의 야욕을 경계해야 한다. 중국이 항미원조 (抗美援朝)의 혈맹이라는 구실로 북한을 동맹국으로 돕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중국 또한 잠재적 경계 대상국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