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훈장
1. 정부의 책임
김영삼 정부 시절, 원로작가 황순원은 문화의 달을 맞아 정부가 주는 은관문화훈장을 거부한다고 문화체육부에 통보했다. 그는 훈장 거부 이유에 대하여 특별한 이유는 없으며 개인적으로 받기 싫은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 짤막한 거부 의사는, 언론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이슈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뜻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훈장거부사례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효재 교수도 5공 인사와 함께 훈장을 받을 수 없다며 국민훈장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례는 별것 아닌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내면적 요인이 잠재해 있다. 왜냐하면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이란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뚜렷한 업적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수여하는 명예의 표증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훈장은 곧 국가권위의 상징이며 명예의 표상이다. 국가가 충성을 다한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인 것이다.
전장에서 훈장을 받기 위하여 무공을 세우려다 숨진 군인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수없이 많다. 훈장은 개인이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국가가 공인한 표증이므로, 훈장 수여야말로 국민에게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시혜가 된다.
그러나 훈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훈장의 가치나 효용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훈장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불찰과 불공정한 처사에서 발생한다.
훈장을 탈 만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훈장을 주었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공적심사 과정에서 훈장을 받을 만한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또는 훈장을 받을 수 없는 도덕적 결함이 있거나 과거 행적에서 결정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에게 훈장수여가 결정된다면 바로 국가의 훈장은 시비의 대상이 되고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국가가 오히려 훈장을 주지 않는 것만도 못한 불행이 초래된다. 결국 훈장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제 가치를 보유하게 된다.
1903년, 퀴리 부부가 노벨상을 받자 프랑스 정부가 그 부부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피에르 퀴리는 “내게 훈장을 주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학자인 내가 훈장을 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내뱉으며 훈장 받기를 거부했다. 레종도뇌르 훈장은 뛰어난 공적을 쌓은 사람에게 주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이다.
그가 수훈을 거부한 확실한 이유는, 그의 거부의 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렵지만 그의 프랑스 정부에 대한 좋지 않은 심정의 표출인 것 같다. 여태껏 자기들에게 무관심하다가 노벨상이 주어지니 뒷북을 치는 정부 당국자가 미웠는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훈장의 거부는 정부 또는 정부 당국자에 대한 반발의 표출로 인식되는 것도 알고 보면 훈장의 양면성 때문이다. 훈장은 정확히 받을만한 사람을 공정하게 가려내어 주었을 때는 국가의 권위와 능률을 상승시켜 주는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불공정하거나 받아서는 안 될 사람에게 잘못 주어졌을 때는 오히려 반목과 비능률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국가의 권위가 추락하는 데까지 그 폐해가 이어진다.
나폴레옹은 비교적 공정한 방법으로 훈장을 관리했지만 너무나 많은 훈장을 남발하는 바람에 많은 비판 여론에 때때로 당혹해 하였다. '나폴레옹이 달아주는 훈장은 쇠붙이나 장난감'이라고 혹평하는 비평가들을 향해 나폴레옹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훈장을 어른들의 장난감이라고 부르든 말든 그것은 당신네 자유다. 그렇지만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장난감이다.”
훈장이 국가 최고의 영예의 표증인가, 혹은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거나 어른들의 장난감인가의 여부는 결국 정부 당국자의 공적 심사 결과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훈장의 공정한 관리는 정부의 책임이다.
훈장의 수여는 헌법과 상훈법에 의거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상훈의 운영은 대통령의 통치 영역 가운데 주요 부분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