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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던져진 육사 생도2기 전사자 86명,추서 임관 성공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7.23|조회수956 목록 댓글 4
      내던져진 육사 생도2기 전사자 86명, 추서 임관 성공

                                                                                                                         
                                                                                         박경석



육사 생도2기 첫 4년제 생도 기간은 1950년 6월 1일부터 육군종합학교 임관 날짜 1950년 10월 23일까지 불과 5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육사 해산 명령은  임관 후 발령되었기 때문에 육군종합학교 2기 후보생 시절에는 육사 생도 신분으로 교육 훈련에 임했다.

육사 생도2기 시절 전사자와 소위 임관 후 전사자까지 합산하면 거의 반수가 희생되어 육사 출신 가운데 가장 희생이 많은 죽음의 기로 불리운다. 그 탓으로 살아남은 육사 생도2기생의 응집력은 어느 육사 출신에 비해 강하다. 따라서 육사 생도2기의 동기회는  입교한 6월 1일을 기념해 6.1회로 정했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은 현역 예비역 가리지 않고 불타오르는 한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전사 생도 2기생이 방치돼 있어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둘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첫 정규 사관생도를 엉뚱한 종합학교 출신으로 분류한 처사에 대해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
같은 처지인 1950년 해사 공사 출신은 그대로 기수가 인정된 것을 확인한 동기생 일동의 불만이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이 한을 풀기 위해 내가 나섰다. 물론 전역 후 한참 지난 후 내가 동기 회장 되면서부터 이야기다. 나는 동기회를 소집 후 안건을 1. 생도 신분으로 전사한 동기생 추서 임관.  2. 생도2기 명예 졸업을 관철해 육사 기수에 편입. 이 안건은 만장 일치로 채택 되었다. 당시 육사와 육군본부, 국방부는 우리의 움직임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지난일을 공연히 들추어 내서 귀찮다는 이유에서 였다. 특히 전두환을 비롯해 그들 주력세력 하나회 회원들이 집권중이어서 자기들의 4년제 첫 주자 위치가 손상될 것 같은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론에서의 생도2기 동정론을 묵살하는 태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후 1991년 6월 1일. 동기회 이름으로 1차적으로 동기생 전사자 추서임관 건의서를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앞으로 작성 제출하였다. 그러나 곧 돌아온 회신은 냉담하였다. 전사자 유해가 없었고 전사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단념할 6.1동기회가 아니었다. 계속 공문을 보내는 한편 각자 연고를 따라 영향을 미칠 관계 부서에 시위성 탄원을 계속했다.
일간 신문을 통해 또는 다른 언론을 이용해 전파된 육사 생도2기 전사자 실상이 보도되자 비로소 국방부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은 하나회 출신 노태우였는데 노태우는 그 소식에 접한 후 동정의 언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약한 다른 하나회 출신과 달리 노태우는 비교적 인정이 많은 편이었고 베트남전 맹호 재구대대장 내 다음다음 3대 대대장을 역임한 관계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훗날 들었다.


내가 작성한 공문을 접수한 국벙부는 동기생 전사자를 전투중 확인한 동기생이 증언서류를 구비하면 가능하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 공문을 받고 그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전투중 함께 하면서 전사장면을 보거나 전상 당한 생도의 현장에 있었던 경우, 짝을 지어 그대로 확인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나도 바로 옆 호에서 포탄에의해 비참히 잔해로 변한 동기생 이름을 적어낸 결과 1992년 10월 15일자 국방부 인사명령 제 335호로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전사자 생도 86명의 추서임관이 확정됐다. 이어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위패 봉안실에 육사 생도2기 전사자 86명의 위패가 육군소위 임관 계급으로 정중히 봉안되었다. 전두환 소령, 유학성 준장에 의해 말소되었던 육사 생도2기가 비로소 소생, 육사의 바른 역사가 영구 기록됐다.

동기생 일동은 동기회에서 만세까지 부르며 기뻐했다. 피로 맺은 전우애의 승리였다. 이제 다음 작전은 육사 생도2기생의 명예졸업과 육사 기수에 편입되어 당당한 육사인으로 남는 일이었다. 이미 86명의 생도2기 전사자가 육사인의 이름으로 추서 입관이 실현된 이상 생도2기 생존자의 명예 졸업과 육사 기수에의 편입은 가능성이 더 명료해졌다. 국방부는 내가 생각해낸 유인책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 경우 유인책은 내가 생각해낸 성공을 위한 전술이었다.
그후 생존 생도2기생 전원에게 명예 졸업장이 주어졌고 육사 기수에 정식 편입되었다. 특히 육사 총동창회에서는 생도2기 전원에게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이 수여되었다. 이 경우 단체 수여는 유일한 경우로 알려졌다.


KBS !TV 포천전투 참전 육사 생도의 처참한 軍史
https://youtu.be/JLOXRt9UfO0?si=Tl9lz5MhbNj_4FJH


KBS 1TV 야욕에 잊혀진 사람들
https://youtu.be/I1oDKn-EdQY?si=aY1tDLsmWhX3R


KBS 1TV 생도들의 '그날''
https://youtu.be/i5Hf2bkfzJ0?si=3hBM6DX_p-LgZX8v


                   육사 박경석 시비 생도송 앞에서




생 도 송

生徒頌
                            박경석

여기 화랑대 평화로운 생도의 요람
이 들과 언덕에 여름꽃 필 무렵
부푼 꿈 유월의 소망 가슴에 묻고
조국의 부름에 구국전선으로 달려간 생도

오 영롱한 젊음의 충정이여
그것은 정녕 타오르는 나라 사랑
정의와 자유 화랑도의 부활이어라

생도의 충절 온 누리에 떨쳐
선열의 얼 빛낸 숭엄한 발자취
그 거룩한 장거 어찌 잊으랴

이제 그날의 위훈 멀어져가고
역사의 저편에 시라진 영웅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 흐르는가


새벽이면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처럼
영겁으로 이어갈 새 생도들이여
누만 년 국운 짊어질 아기별들이여






참전 생도상 건립, <생도송> 헌정
명예 졸업식이 끝난 후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거룩한 생도의 참전 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남겨질 기념비 건립 문제가 대두되었다. 생도2기 동기회에서는 그 제의에 감사를 표하고 생도2기생 자신의 모금으로 건립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제의해 동의를 얻은 후 모금, 공사에 착수 '참전 생도상'으로 명명하고 2년 후 준공했다. 그 기념비에는 박경석의 시 '생도송'이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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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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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7.23
    육군본부 인사관리처장 유학성 준장과 하나회 수괴 전두환 소령에 의헤 내던져진 생도를 구출했다.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7.23 박 장군님의
    차분하신 열정으로 기사회생의
    결과는 빚을 찾음이라 생각하네요
    수 많은 歲月 엄청난 도전에
    오늘날의 역사는 인정에 이룸이죠
    육사의 화랑로에 살고 있음이라
    더욱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7.23
    격려의 글 고맙습니다.
    한때 공릉동 주공 아파트에서 살었죠.
    그리고 우리도 검사 집안입니다.
    3형제인데 맏형이 검사였습니다.
    고시 2회 박규석 검사. 깐깐한 성품.^^
  • 작성자장태순 | 작성시간 24.10.17 진실을 밝히는 일이
    너무 힘 드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성공 하셨으니
    축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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