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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부 2장 13. 선진 육군 시대의 출발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8.07|조회수70 목록 댓글 1

제1부

2장

13.선진 육군 시대의 출발

 

 수도보병사단의 제1보병연대와 기갑연대의 베트남전 파병이 확정되자 육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올랐다.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투부대의 파병이 갖는 역사적 충격과 함께 3류 군대급의 육군의 전투장비를 1류급 군대의 장비로 현대화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더구나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하에서 전투경험을 통한 우위의 전투력 확보가 당면 과제였다.

 

 1965년 당시 우리 육군의 군제(軍制 - millitary system)는 미군의 군제를 따르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군식의 리더십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그 원인은 철저한 인사적체 때문이었다.

 

 그 한 예로서 육군의 지휘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세계 군사상 유례없는 95% 이상의 장군 진급을 기록한 군 초창기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군들은 장기간 계속해서 참모총장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일반 군사학교의 1개 기수에 해당하는 군사영어학교 출신 이응준 준장이 초대 총장을 맡았고 2대 채병덕 준장에 이어지고 장장 20년간 18대 김계원 대장까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총장직을 독점하고 있었다.이들 모두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군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채병덕을 비롯한 정일권 백선엽 등은 각각 두번씩 총장직을 연임하였다.그러한 전근대적 인사 적체는 곳곳에서 하극상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그 대표적인 사건은 육사 8기 김종필 중령이 주도한 하극상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제28사단장을 휘하 보병대대장이 권총으로 사살한 끔찍한 사건이었다.8기생의 하극상 사건은 인사 적체에 따른 불만 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제28사단장 사살 사건은 리더십에 관한 복잡한 문제가 얽히고 있었다.

 

 사단장은 일본군 출신으로 철저한 일본군 리더십을 고수하고 있었다.일본군 리더십의 특징은 절대 복종과 일방적 명령 이행의 강압에 있다.부하는 무조건 상관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고 건의와 의견 제시는 묵살되었다.

 

 대대장 정구헌 중령은 미국 육군보병학교 OBC과정을 이수한 엘리트 장교였다.일방적이고 폭행을 불사하는 사단장에게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장에서 권총으로 사살 한 것이다.이 사건에 있어서 추호도 정구헌 중령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다만 일본군식 리더십과 현대적 개념의 리다십의 상충에서 온 불행한 사건이므로 교훈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깊이 관조해야 한다.

 

 필자가 보는 당시의 육군은 장비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휘체제나 리더십에 있어서도 선진국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군대였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누적된 폐단을 인식한 혁명정부는 먼저 군 인사법을 제정하여 정년제를 통한 인사 적체의 병폐를 없애는 준비를 서둘렀다.이러한 시기에 수도보병사단의 파병을 위한 재편성은 많은 장교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새로 임명되는 사단장과 주요 지휘관 선발에 많은 이목이 쏠렸다.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군 출신 장군도 사단장에 선발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재직중인 채명신 소장을 파병 수도보병사단장에 임명했다. 채명신 소장은 육사 5기생이며 미국 육군보병학교 OAC와 미국 지휘 및 참모대학을 졸업한 현대적 개념의 리더십을 소유한 탁월한 장군이다. 특히 한국전쟁시 적 후방에서 활약한 백골병단을 지휘했던 비정규전 전문가다.

 

 많은 장교들은 채명신 소장의 파병 책임자로 임명한데 대해 크게 환영했다.이어서 연대장,대대장 등 주요 지휘관의 선발과정에 들어갔다.기본 지침은 해당 지휘관의 직위를 성공적으로 역임한 경험자 가운데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졸업한 한국전쟁 경험자로 정했다.이리하여 제1진 주요 지휘관은 단 한 사람 예외 없이 그 기준에 적합한 지휘관으로 선발했다.

 

 최초 주요 지휘관 선발 기준에는  미국 군사학교 졸업자격이 없었는데도 공교롭게도 선발하다 보니 주요 지휘관 전원이 미국 지휘 및 참모대학이나 보병학교 졸업자였다.

 

 

 

 제1진에 선발된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제1보병영대장 김정운 대령. 제1대대장 배정도 중령. 제2대대장 이필조 중령. 제3대대장 박경석 중령(필자)

 

        기갑연대장 신현수 대령. 제1대대장 박한영 중령. 제2대대장 김용진 중령 .제3대대장 최병수 중령

 

 

 

 수도보병사단은 주요 지휘관은 물론이고 중대장, 소대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원 교체되어 재편성 되었다.편성이 완료되자 강원도 홍천 주둔지에서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비정규전 대비 훈련이 시작되었다.이무렵 모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파병 사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이때부터 수도보병사단은 맹호부대로 불리워지기 시작했으며 '맹호는 간다'의 국민 가요가 제정, 유행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그 노래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훈련을 마친 맹호부대 장병은 국민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으며 부산항을 통해 베트남 전지로 향했다.

 

 필자는 이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더욱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전사할지도 모를 전지에 출진하면서도 감격과 환희의 밝은 장병들의 모습은 눈물없이 볼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었다.우울하다거나 후회하는 단 한명의 장병이 없는 이 순수한 부하들을 지휘하며 전장으로 향하는 필자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부산항을 떠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부산항 출항과 더불어 선진 육군의 서막이 올랐다고 회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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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박경석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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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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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8.07 박 장군님
    주신 글 속에는 파월 당시의
    역사의 page가 거의 있음이기에
    적나라한 당시의 현황을 알게 됨이죠
    흐르는 세월에 역사는 보존 될 것입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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