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심고

작성자포덕|작성시간06.02.23|조회수47 목록 댓글 0
글쓴이: 옥계산인
2006(포덕147년)/2/20(월)
기도와 심고  

기도란 나의 안에 모신 하늘님께 대하여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것의 성취를 기원하는 마음과 행동을 통한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기도를 나누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기도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안녕>, <도인 가정의 평화>, <병환이 있는 교인의 질병 치료>, <깨달음이나 믿음의 향상>, <사업의 성공>,  <불안한 마음의 평화> , <가족과 친지의 화목>, <집단 특별연성> 등 그 어떤 것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가 있으며 기도의 목적이 분명하여야 한다.

둘째, 기도는 마음과 몸의 총체적인 행위이다.
기도는 그 실행의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는  심고, 주문수련, 청수봉전등이 일부 또는 전부가 포함될 수가 있다. 또한 생선, 고기, 술, 담배를 끊고 목욕재계하는 것과 같은 행위도 포함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천도에서의 기도는 다만 마음이나 말로만 하늘님께 비는 것이 기도의 모두가 아니라 기도의 목적 달성을 위한 실천 행위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넓게 보면 믿음과 공경과 정성이라는 세가지 도리를 가지고 모신 하늘님을 봉양하면서 하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모든 사물을 공경하는 삼경의 사상을 실천하는 모든 행위도 기도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보통 기도라고  하면 대부분 특별기도를 말한다.  기도의 목적과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특별 연성도 특별기도에 해당한다. 도력의 증진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1회성 기도 역시 기도이다.

동학 천도에서의 기도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개인이나 집단의 불안정한 마음을 안정시켜서 확고하게 하면서 개인의  인격적인 통일이나 집단통합의 역할을 한다.

위에서 말한 내용이 기도와 심고를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가 있다. 심고는 말 그대로 내 안에 모신 하늘님께 고하는 행위이다.  소리를 내어서 고하든 마음속으로만 고하든 하늘님께 고하는 모든 행위가 곧 심고이다.

그런데 고하는 내용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분명한 목적과 기원의 내용이 있다면 심고이면서 동시에 기도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기도가 아닌 심고도 있으며 심고가 기도 속에 포함될 수도 있다.

특별기도를 할 경우에 청수를 모시고 심고문을 낭송하고 주문을 수련하는 일체의 행위를 기도라고 할 수가 있으므로 기도는 심고 보다 외면적으로 보아서는 범위가 넓다.

그러나  심고는 내면적으로 무한하여 그 범위가 없으며 정성과 공경에서 그 한계가 없다. 그렇다고 기도와 심고가 별개인 것은 아니다. 심고를 통하여 기도를 하며 기도를 통하여 심고를 하기도 한다.

봉암장님, 제가 대교당 시일식 집행에 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집례자가 "심고하겠습니다." 라고 사용하는 용어 문제에 대하여 서울교구내에서도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번 임기때 교화부에서 집례자의 용어를 통일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심고드리겠습니다."라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해서 제가 집례를 볼
때는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구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장님과 제 생각은 "심고드리겠습니다."로 하는 것이 옳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집례자들이 그동안 입에 붙은 습관과 나름대로의 교리해석이 바뀌지
않다보니 아직까지 "심고하겠습니다."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고는 내몸에 모신 한울님의 성령에게 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부모님께 고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심고의 대상이 한울님이라고 생각하여 존칭의 표현인 "심고드린다."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만일 "심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는 심고의 대상이 없이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로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심고의 대상이
한울님과 스승님이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스런 표현일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심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분들의 취지는 천도교가 기복신앙이 아니라 자율적
신앙이기 때문에 심고의 대상과 내가 성령상 하나이므로 심고의 대상을 별도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문제점은 한울님에게 대한
경외지심은 물론 한울님과 스승님에 대한 보은지심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한울님을 생각할 때 부모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심의
깊이를 더할 수가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해 나갈 때 비로소 한울님과
스승님과 내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는 인내천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인내천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천도교신앙의 참맛을 느끼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생각에 의한
신앙을 하는 것이지 느낌에 의한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느낌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고드립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각자의 느낌에 의해서 스스로 이해할 수밖에는 없는 문제
라고 생각합니다.

봉암장님, 제가 대교당 시일식 집행에 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집례자가 "심고하겠습니다." 라고 사용하는 용어 문제에 대하여 서울교구내에서도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번 임기때 교화부에서 집례자의 용어를 통일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심고드리겠습니다."라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해서 제가 집례를 볼
때는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구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장님과 제 생각은 "심고드리겠습니다."로 하는 것이 옳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집례자들이 그동안 입에 붙은 습관과 나름대로의 교리해석이 바뀌지
않다보니 아직까지 "심고하겠습니다."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고는 내몸에 모신 한울님의 성령에게 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부모님께 고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심고의 대상이 한울님이라고 생각하여 존칭의 표현인 "심고드린다."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만일 "심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는 심고의 대상이 없이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로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심고의 대상이
한울님과 스승님이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스런 표현일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심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분들의 취지는 천도교가 기복신앙이 아니라 자율적
신앙이기 때문에 심고의 대상과 내가 성령상 하나이므로 심고의 대상을 별도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문제점은 한울님에게 대한
경외지심은 물론 한울님과 스승님에 대한 보은지심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한울님을 생각할 때 부모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심의
깊이를 더할 수가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해 나갈 때 비로소 한울님과
스승님과 내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는 인내천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인내천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천도교신앙의 참맛을 느끼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생각에 의한
신앙을 하는 것이지 느낌에 의한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느낌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고드립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각자의 느낌에 의해서 스스로 이해할 수밖에는 없는 문제
라고 생각합니다.

봉암장님, 제가 대교당 시일식 집행에 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집례자가 "심고하겠습니다." 라고 사용하는 용어 문제에 대하여 서울교구내에서도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번 임기때 교화부에서 집례자의 용어를 통일하기로 하면서 이렇게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심고드리겠습니다."라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해서 제가 집례를 볼
때는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구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장님과 제 생각은 "심고드리겠습니다."로 하는 것이 옳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집례자들이 그동안 입에 붙은 습관과 나름대로의 교리해석이 바뀌지
않다보니 아직까지 "심고하겠습니다."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고는 내몸에 모신 한울님의 성령에게 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부모님께 고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심고의 대상이 한울님이라고 생각하여 존칭의 표현인 "심고드린다."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만일 "심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이는 심고의 대상이 없이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로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심고의 대상이
한울님과 스승님이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스런 표현일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심고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분들의 취지는 천도교가 기복신앙이 아니라 자율적
신앙이기 때문에 심고의 대상과 내가 성령상 하나이므로 심고의 대상을 별도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문제점은 한울님에게 대한
경외지심은 물론 한울님과 스승님에 대한 보은지심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한울님을 생각할 때 부모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심의
깊이를 더할 수가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해 나갈 때 비로소 한울님과
스승님과 내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는 인내천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인내천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천도교신앙의 참맛을 느끼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생각에 의한
신앙을 하는 것이지 느낌에 의한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느낌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고드립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가 있는 문제가 아니고 각자의 느낌에 의해서 스스로 이해할 수밖에는 없는 문제
라고 생각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