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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214) - 을분이

작성자신용호|작성시간21.02.12|조회수394 목록 댓글 0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214) - 을분이

 

최 진사네 침모 손녀딸 을분이

최 진사 셋째딸 송월의 혼례날 아가씨 몸종으로 따라가는데


대궐 같은 최 진사네 집 옆,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초가삼간 한채가 기대어 있다. 최 진사네 늙은 침모가 사는 집이다. 늙은 침모는 아침밥상만 치우면 최 진사네 집으로 와 옷을 짓고 바느질을 하고 다림질에 빨래까지도 한다. 늙은 침모에게는 기구한 사연으로 식구라고는 열두살 먹은 손녀 하나뿐. 손녀 을분이도 제 할머니 따라 최 진사네 집에서 살다시피 한다.

최 진사네 셋째딸 송월은 을분이보다 다섯살 많은 열일곱으로, 시집갈 준비를 하느라 들떠 있다. 저잣거리 포목점에서 비단이다 옥양목이다 바리바리 싣고 온 탓에 침모는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있다.

침모가 항상 가슴 아파하는 것은 일이 고돼서가 아니라 어린 손녀 을분이를 최 진사네 식구 모두가 몸종처럼 부려먹기 때문이다. 뒤뜰 별당에서 송월이가 을분이를 불러서 가보면 고사리손에 엽전을 쥐여주고 “을분아, 깨엿 좀 사오너라” 한다. 두말없이 대문을 나가 찬바람이 몰아치는 둑길을 걸어 두식경이나 떨어진 엿집에 가서 손을 호호 불면서 깨엿을 사다준다. 송월 아가씨는 별당문을 빼꼼히 열고 깨엿을 받아 들고는 문을 콩 닫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는데, 침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날벼락을 맞았다. 송월 아씨가 시집갈 때 을분이를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침모가 을분이를 껴안고 손을 가로젓자 최 진사 안방마님까지 합세해서 설득 반 협박 반으로 압박을 가했다. 침모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도 했다. 오년 후 을분이가 열일곱이 되면 혼수를 부끄럽지 않게 장만해서 시집을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혼례식을 떠들썩하게 치르고 신행길에 올랐다. 을분이가 누비옷을 차려입고 가마 옆에 붙어 자박자박 걸어가자 침모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송월의 시집은 친정집보다 더 지체 높은 양반 대갓집이다. 시아버지는 당상관을 지냈고 새신랑은 소과에 급제하고 대과를 준비 중인 민 초시다. 가문 좋고 천석꾼 부자지만 손이 귀해 새신랑 민 초시가 삼대독자인 게 아쉬운 대목이다.

혼담이 오갈 때 시아버지가 신중하게 고려한 것은 집안 혈통이 ‘풍산성(豊産性)인가, 아닌가’였다. 집사를 시켜 뒷조사했더니 신붓감 새색시의 언니들은 시집가서 맏딸은 고추 넷을 뽑아냈고, 둘째는 고추 둘을 벌써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혼례 올린 지 한달도 채 안됐는데 새색시가 입덧을 하기 시작해 시어머니가 뛸 듯이 기뻐하고 소식을 들은 시아버지는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그 귀한 감귤을 구해주고 곰국을 끓여 올리고 임부에 좋다는 탕제를 달여주자 송월은 태아의 발길질이 예사가 아니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동짓달에 낳은 아기는 고추가 아니었다. 유모를 구해오자 이듬해 아기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을분이는 쉴 틈 없이 송월 아씨 수발을 들고 아기들을 돌봤다. 다섯해가 지나자 딸이 넷이 되었고 스물다섯이 된 민 초시는 계속 대과에 낙방, 조바심만 끓였다.

을분이 열일곱이 되었지만 송월은 그때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알고도 모른 척하는지, 시댁의 눈치를 을분이한테 화풀이했다. 삼년이 더 지나자 송월은 딸들을 더 낳아 바글바글 딸 여섯이 되고, 을분이는 스무살 노처녀가 되고, 민 초시는 계속 낙방이다.

을분이가 부고를 받고 한걸음에 사십리길을 달려갔더니 싸늘한 방에 할머니가 흰 천을 덮고 있었다. 송월이 친정어머니 왈, “약 쓸 사이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하지만 동네 이웃 이야기로는 아파 누운 지 한달 넘게 을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사정했건만 다른 귀로 흘렸다는 것이다. 을분이는 송월 아씨 친정 뒷산 자락에 제 할미를 묻고 말 없이 송월이 시댁으로 돌아갔다.

을분이의 한을 떨치고 춘하추동 세월은 흘러갔다. 을분이는 해가 바뀔 때마다 열일곱에 시집보내주겠다던 그 약속을 깨우치지만 돌아오는 것은 송월의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는 악담뿐이다.

을분이 열두살에 송월 아씨를 따라와 십년, 스물두살 되던 해 송월 아씨 시집에 집 공사가 벌어졌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담이 처지고 사랑채에 깔끔하게 부엌이 달렸다. 사랑채에서 우렁차게 고추 달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 어미가 들어가 민 초시가 안고 있는 아기를 받아 젖을 물렸다. 어미는 을분이다. 그해 민 초시는 알성급제를 했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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