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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안도현-외롭고 높고 쓸쓸한

작성자토묵이|작성시간00.04.10|조회수498 목록 댓글 0
안도현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서울로 가는 全琫準"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全琫準",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가 있다.
안도현의 시들은 세상과 뜨겁게 몸비비는 자리에서 나온다. 범속한 일상
속에 시의 뿌리를 박음으로써 시인은 우리의 삶을 지탱시키고 있는
구체적인 힘의 질서를 시의 경험 속으로 이끌어들이려 한다.
현실의 질서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꿋꿋이 걸어가려는 시인의 의지와 곧잘
충돌하지만 안도현 시의 힘과 아름다움은 삶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에 의지하여 그러한 충돌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돌파하려는 노력 속에서
얻어지고 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제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했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는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에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
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마늘밭 가에서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옵니다
마늘순이 한 뼘씩 쑥쑥 자랍니다
나는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 끝을 알알하게 쏘고 말
삼겹살에도 쌈 싸서 먹고
장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겨울 밤에 시쓰기

연탄불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
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연탄집게 한번 잡아 보지 않고 삶을 안다고 하지 말라,
이렇게 썼다가는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
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자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잔 하고는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연탄냄새에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 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 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제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
다, 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 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
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연애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 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가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나에게 보내는 노래

너를 위해 내가 불러줄 노래가 있으니
아직은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가야 할 길이 많아서 철길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철도노동자는 푸른 제복을 벗지 않고 있다
기다리는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대합실을 이대로 비워 둘 수는 없다
죽어도 누울 곳이 없는 껌팔이 소년과
귀싸대기 빨간 능금들을 좌판대 위에 두고
아직은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집이란, 돌아가 편히 쉬는 곳이 아니라
단지 떠나야 할 때 구두끈을 조여매는 곳
떠나지 않고는 돌아올 수 없으니
정작 돌아오려거든 늘 떠나야 한다
나 아닌 것들을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한번도 목숨 걸고 살아 본 적 없었다
다가오는 겨울의 발자국소리만큼 덜컹대는
유리창 앞에서 아아,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
갈탄난로를 피우지 않았다고 투덜대는 것보다는
세상은 내 한 몸이라도 들이밀어 바람구멍을 막아야 하는 곳
너를 위해 버려도 좋은 내 몸뚱아리 식지 않았으니
아직은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내가 불려야 할 노래는 끝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시내버스가 간다

시내버스가 왔다
뒷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시내버스는 잠시 두리번대는 듯하지만
어느 틈엔가 앞문으로 사람들을 태운다
멈추라고 손 흔들리지 않아도
서야 할 곳에 설 줄 알고
오라이, 하는 단발머리 아가씨가 없어도
떠날 때가 되면 깨끗이 떠날 줄 아는 시내버스는
결코 혼자서는 먼 밤길 가지 않으며
이 강산 낙화유수 눈썹 삼삼한 계집이 꼬드긴다 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기만 했지
나 아닌 사람을 태우고 달려보지 못했다
부릉부릉 소리를 크게 한번 내질렀다가
빠진 단추 없나, 다시 둘러보는 국민학생처럼
뒷문도 앞문도 닫고
시내버스가 간다
나는 이제껏 떠나지도 못하고
왜 여기 이대로 서 있는 것이냐



기관차를 위하여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 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챦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 일까지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차가 타고 서울역에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구나
가령 객차에 한 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 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고 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이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 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 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 섬일 뿐이야

내 어린 시절, 기차를 몇 번 타봤는지
얼마만큼 먼 곳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 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 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 줄 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을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고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처럼
앞으로 남은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 위에 버티고 서 있지 말고
새 길을 만들어 달릴 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 간다 싶을 때 힘을 내
달릴 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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