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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남행시초 1,2,3 / 김수영

작성자플로우|작성시간16.03.11|조회수276 목록 댓글 0

 

남행시초 1

   귀향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 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 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는 마을의 불빛

눈을 뒤집으며 주먹다짐하기도 하면서

파도가 높음, 파도가 높음, 긴급구조 요망, 긴급구조......

깜박깜박 이 많은 골짜기를 감춘 세파에 자물쳐도*

기다려라, 또 계속 가라

바람 없는 낮엔 뜬구름만 소줏병에 담아 띄우기도 했어

때로는 잊혀지기도 해야 할 젊은날처럼요

아버지에게도 바다는 길흉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을까

이미 예정된 깊이가 보이는 여정이었을까

하루 필요한 물과 기름을 받으면서

할망구 짝 난 발동기로 툴툴거리는 배가

언제 덜컹 무심한 돌섬에 묻힐지 모르는 일

나는 같이 늙어가는 박씨의 사투리가 좋다

살아갈 날이 아침 안개 속 첩첩으로 걸리믄

달포씩 밭그늘에 묵었던 지게가 낙락장송으로 뵈이고

지겟다리에 걸쳐둔 호멩이도 학 모가지로 보이능 거

아버지의 그리움도 갈수록 바람의 주먹이 매운

물주름으로 되돌아왔을까

한순간 바라다보고 있던 황량한 벌이

손바닥을 펴서 보여준

풀씨들의 집만 무수히 뚫린 외길로 통하는 끝없는 황혼

담배만 되새김질하던 염소새끼까지도

흙먼지에 섞여 놓여나기만 하면

같은 피붙이를 기막히게 찾아가는

떠도는 것만이 제몫인 뿌리들이

이제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 '까무러치다'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

 

 

 

남행시초 2

       남면 방파제에서

 

모과나무 그늘 아래서

토종개가 느긋하게 자고 있다

숨소리처럼 흙먼지를 풀썩이며 길게 누운 길도 자고

길 위에서 꾸는 꿈

끝물까지 완전히 마른

가랑잎을 긁어 태운다

빈 껍질만 남아서 이렇게

뜨거운 돌이 되어 자갈밭을 넘어가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소리로 울어주는 저녁해

마을 안고 돌아서 이미 섬이 아닌 다른 마을로

길을 따라 가며

낡고 닳아서 헐렁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기다리는 것

양철지붕 위의 뜨거운 바람처럼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내게 길을 묻는다

 

 

 

남행시초 3

     남면 고구마밭에서

 

옛날에 살던 사람들이 까먹은 꿈이 묻힌

패총 같은 섬들이 눈에 밟힌다

세월이 변해도 살아남아라

아득한 저녁해만 머물 뿐인 팡팡한 바다

나무 그늘에 숨어 유자 속같이 젖앓이를 하면서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맥질해 따올리던 전복

전복처럼 바위를 안고 씨를 받는

사람들의 힘센 어깨로 밀어붙인

거침없는 벌과 사투리가 좋다

오늘은 붉은 고구마밭에서 불거지는

흐벅지게 물도 많고 살도 좋은 밑뿌리

입동 지나 끝물인 밭고랑에서

노파가 방뇨를 한다

은밀한 세월의 몸내를 읽는다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 창작과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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