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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정작 정작에 / 김혜순

작성자플로우|작성시간16.03.21|조회수428 목록 댓글 1

 

 

정작 꽃집에는 없는 것, 흙

정작 새집에는 없는 것, 하늘

정작 물고기 집에는 없는 것, 바다

 

우리집에 없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겠지?

 

쥐와 벼룩과 바퀴벌레를 힘껏 밀어내고

엎드려서 웅얼웅얼 글씨 읊조리고 있는 우리집

잡초와 빗줄기와 유령의 머리칼을 밀어내고

바람에 움찔움찔 계단을 터는 우리집

 

높은 집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추락한 인부의 이빨이 들어 있네

먼 집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담벼락에 붙은 늙은 엄마의 손바닥이 들어 있네

 

즐거운 집이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소름끼치도록 말말랑말랑해 두 주먹을 꽉 쥐지도 못하는

시시로 치미는 악령의 눈동자가 한 벌 들어 있네

 

하나님의 집에는 태어나라 죽어라 동사님들만 살고

우리집에는 나 나 나 나 인칭대명사들만 살고

자연의 집에는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형용사님들만 살고

 

검은 샘 깊은 집엔 누가 누가 사나

뱀처럼 땅속에서 깨어난 수맥이 살지

 

어느 날 장황한 소설이 지리멸렬하게 끝나듯

식구들 지상에서 모두 떠나고

꽃이 피고

나비 날고

저녁 가고

봄 오고

식사 같이 하실래요

영원히 죽지 않는 시계에 사는 망치가 시간 맞춰 때려주는 집

이생에 태어나 몇몇 집에 살다 가게 되는지 헤아리다가 잊어버렸네

이다음에 귀신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어느 집에 제일 자주 출몰하게 될까?

 

꿈 밖에서는 알아들었는데 꿈속에서는

정작  못 알아듣는 말, 우리집

모여 살 때는 알아들었는데 정작 정작에

나 죽은 다음에는 못 알아듣는 말, 우리집

다음 생에선 엄마아빠오빠동생 우리 우리 어떻게 알아볼까?

 

그러나 그러나 배 가라앉고

바닷속으로 잠겨가면서도 눈 감지 못하던 눈동자들!

 

집에 가고 싶어 ! 하던 눈동자들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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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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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래투 | 작성시간 16.03.23 마지막 연 땜에 또 한번 생각하네요.
    세월이 약 이겠죠.
    그럼에도 잊을 수 없는 것 이겠죠.
    수고하심에 감사합니다.
    다래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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