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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작성자JOOFE|작성시간17.11.01|조회수306 목록 댓글 0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살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 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 뉘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뒤켠으로 사라진 것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니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 것이네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 2011






* 신촌의 위트앤시니컬,이라는 서점 겸 카페는 유희경시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작년 가을 정모를 거기서 했는데

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자 좋아하는 시인을 얘기했다.

나는 천양희 시인을 말했는데

한 詩友가 나중에 조용히 물어온다.

- 아까 천양자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천양희인거죠?

아, 맞아요. 천양희!

그 일은 나에게 큰 쇼크가 되었는데 한번 외운 이름이나 숫자나

모든 걸 잊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다.

점점 뇌세포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라서 그렇다.

회사에 찾아온 거래처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명합첩을 찾는다거나

동창회에 나온 친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친한 친구에게 슬쩍 물어본다거나......

나의 뇌에 저장되었던 것들이 점점 유효기간이 지나 사라지고 있음이

슬프고 서글프다.

나도 모르게 구멍속으로 빨려들어간 것들이 많았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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