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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 김이듬

작성자플로우|작성시간19.06.14|조회수323 목록 댓글 0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에요

 

대충 만년필로 휘갈긴 것도 있고

침 묻힌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빨간 밑줄을 그은 것도 있네요

 

나는 안경을 쓰고 세심하게 윤문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때문에 제멋대로 몇 자 넣을 때도 있어요

간혹 자기소개서 대행업체 직원같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을 때도 있답니다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난 혼자 피크닉을 떠났어요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고 죽은 새의 깃털이 펄럭일 때

숲 속의 가지 끝에서 누군가 웁니다

 

리본을 풀고 붉은 책을 펼칩니다

나는 당신을 만집니다

 

뺨의 체온 머리칼의 감촉

나는 당신을 다 꺼내놓을 수 없습니다

시럽에 빠뜨린 크래커를 건지듯

따뜻한 틀 속의 쿠키를 꺼내듯

단지 나는 당신을 가지고 만든 책을 봅니다

 

당신은 키스로 봉한 편지처럼 오래된 노래

나를 봉하는 데 실패한 사람

보석처럼 빛나는 유골

없는 발로 꾹꾹 눌러쓴 책

단지 나는 당신을 여과하고 퇴고하고

나와 상관없이 흐르는 당신을 옮겨 적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침묵한 당신은 내 말의 시작

이 시의 끝이고 한계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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