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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도 병인 양 / 심재휘

작성자플로우|작성시간19.10.14|조회수278 목록 댓글 0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관 짜는 일과 화살 만드는 일을 미워했던 옛 성인의 시절에 여행 가이드는 없었겠지 이명주씨는 입술이 말라서 말이 빠른 현지 가이드 비엔나에 온 지는 십 년이 훨씬 넘었다 한다 음악 공부 하러 왔다가 악보를 다 잃고 도돌이표 하나만 손에 쥔 채 서른 여섯 노처녀가 되도록 길안내만 한다는 그녀 하루짜리 동행들을 만나고 무수히 헤어지면서 인연에 무심해지는 방법을 일찍 눈치챈 여자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너스레도 희미한 낮달의 거죽처럼 낡고 닳았는데 이 더운 여름날 여행객들이 죽은 사람의 집을 사진 찍느라 고개를 쳐들 때 명주씨 그늘 속에서 혼자 몸을 식히고 있다 고개 숙여 사소하게 정든 마음도 발밑으로 털어내고 있다 다정도 병인 양 무정해져야 살 수 있는 직업의 이명주씨야 너는 오늘도 무엇을 가이드하느냐 집을 떠나 멀리 간 사람들 모두 그 초행길을 익숙하게 따라 가고 있구나 저들도 집에서는 제 삶을 가이드 한 탓이리라만 오래 묵힌 음표들도 건들면 음악이고 썩어가는 낙과의 마음은 언제나 꽃이다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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