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이곳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차가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는
나만 모르는 세상에서
시시한 고독을 연기하는
와르르 흰빛을 뒤집어쓰면
잘못 떨어진 천사처럼
픽 쓰러지기도 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누군가 빛을 만지는 것 같아"
혼자 온 사람은 팔짱을 끼고
둘이 온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마른 손을 더듬으며
본다, 보고 있는 것 같아
뒤집어진 무지개가 잠깐 피어오를 때
우리는 빛으 기울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거나
곧 죽을 것처럼 껴안거나
어쩔 수 없이 기절하고,
벽에 대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림자들은
그림자를 벗고, 또 벗어서
첩첩 쌓인 허물을 밟으며
문과 문 사이를 건너가는 것이다
오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고
너는 이제,
그곳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침대의 반쪽을 잃어버린
너만 아는 세상에서
밤의 뒤척임을 기다리는
하나, 둘 박수 칠 때 사라지자
긴 편지 대신 귓속말로
말린 꽃보다 시드는 입술로
으깨지는 밥알처럼 무해하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주전자에 든 물을 흘리며 걷자
울면서 뒷발을 무는 개처럼
불 켜진 계단을 향해
자꾸자꾸 내려가자
더 낮은 곳, 더 더 낮은 곳
닫힌 문, 또 닫힌 문
더 높은 곳, 더 더 높은 곳
열린 문, 내내 열린 문
환호 소리. 먼지 소리.
남겨진 발들은 서성이고 있다
들어오는 문이, 나가는 문이 될 때까지
누구세요,
그런 대사는 없었지만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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