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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베껴먹다 / 마경덕

작성자박제영|작성시간20.06.22|조회수441 목록 댓글 2

소통의 월요시편지_714호

 

베껴먹다


 
마경덕

 

 


어머니는 할머니를 나는 어머니를 베껴먹었다 내 딸도 나를 베껴먹는다 태초에 아담도 하나님을 베껴먹었다 아담 갈비뼈에는 하와가 있고 내가 있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은 하와의 사본이다 금성 목성 토성 화성… 모두 지구의 유사품이다


바람개비는 풍차를 국자는 북두칠성을, 너훈아는 나훈아를 슈퍼는 구멍가게를 베껴먹었다 하이힐은 돼지발의 본을 떠서 완성되고 샤워꼭지는 연밥을 복사하고 밤송이는 성게를, 별은 불가사리를 탁본했지만 한 번도 시비에 걸린 적이 없었다 복숭아는 개복숭아를 표절하고 드디어 팔자를 폈다 아직도 개복숭아인 것들은 눈치가 없다
 

나는 수년 간 산과 바다를 베껴먹었다 그러므로 내 시는 모작이다 나는 오늘도 늙은 어머니와 맛있는 당신을 즐겁게 베껴먹는다
 

― 『그녀의 외로움은 B형』(상상인, 2020)




 

*
마경덕 시인의 신작 시집 - 신작 시집이긴 한데 "新 글러브 중독자"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그러니까 시집 『글러브 중독자』의 리메이크판 시집이지요. - 에서 한 편 띄웁니다.

 
<베껴먹다>

 
"시인은 지금 <벗겨먹다>에서 <베껴먹다>까지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철학을 전공한 누군가는 보드리야르와 들뢰즈를 들먹거리며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렵게 이야기할 게 뭐 있겠나. 당신도 그저 즐겁고 상큼 발랄한 시인의 저 상상력을 살짝, 달콤하게, 베껴먹으면 되겠다. 벗겨먹는 것은 다소 야비한 일이지만 베껴먹는 것은 여간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2008년 7월 8일 메모해두었던 것을 오늘 아침 베껴먹습니다.


시인이 맛있게 당신을 베껴먹는 마당에 독자인 제가 제 옛글을 베껴먹는 것쯤이야 무에 대수이겠습니까.^^

 

정한용 시인은 "자기야, 날 벗겨봐 / 애인들은 밤마다 서로를 베낀다"(「베끼다」)며 베끼는 것을 야하게 노래하기도 했고,

위선환 시인은 "맞부닥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새떼를 베끼다」)며 비움과 공중을 노래하기도 했지요.

 

제대로 베끼면 위대한 창작물이 되기도 하고

잘못 베끼면 위험한 표절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시인이란 창작과 표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0. 6. 22.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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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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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joofe | 작성시간 20.06.22 ㅎㅎ 지난주 급히 제주출장을 가신다 해서 장미여관에 가서 지난주 시를 베껴먹었습니다.
    베껴먹는 일은 참 쉽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제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29 잘 지내시지요? 덥고 흉흉한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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