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자나무 [장석주]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연민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
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
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
마다 술집을 순례하지 말 것. 서양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
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절벽, 세계사, 2007
* 며칠 전 동네에 있는 현충사를 거닐었다.
무료로 개방하는 현충사는 나무들이 잘 버티며 서 있고
눈을 아주 즐겁게 해준다.
붉게 타오르던 단풍도 많이 말랐지만 햇빛에 비치는 것들은
제법 가을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거닐던 중 발견한 명자나무, 붉은꽃이 몇송이 피었다.
야, 명자야, 너 미쳤니? 가을의 끝자락에 꽃을 피우다니!
가을이 가니 불행하다 생각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달의 뒤편에서 토끼눈처럼 충혈되어 명자나무가 지구의 명자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명자가 명자를 내려다보는 늦가을의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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