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나비를 보는 마음 [김승희]
봄에는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다
스웨터의 뜨개실이 배꼽에서부터 고요히 풀리고 있다
몽롱한 아스피린 하얀 분말 같은 대기
노인들이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은 중력이 약해서
나비처럼 가벼운 것 같다
봄에는 새 옷을 사려고 했는데
봉은사역 3번 출구 앞 옷가게가 폐업하고 있다
순댓국 식당 옆 '자매패션'
일꾼들이 옷상자를 들고 나가고
쇼윈도 앞에 마네킹이 몇개 서 있다
마네킹의 옷을 벗기고 여자를 분해하려고 한다
노란색 가발 빨간색 가발 흑색 가발
검은 눈 갈색 눈 파란 눈
모가지 팔다리 가슴 배 허벅지 손가락 발가락 뚝뚝 꺾고
몸을 정리해서 야단법석을 한다
입관을 한다
어제
골목길을 지나갈 때 살아있는 여자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봄에는 중력이 약해서 삶과 죽음이 뒤죽박죽한다
스웨터의 뜨개실이 배꼽에서부터 입까지 조용히 풀려 나가는데
현실과 초현실과 비현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봄에는 내가 나를 다 내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 빵점 같은 힘찬 자유, 창비,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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