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거리 [박지혜]
회색 길을 걸어 세상의 끝을 향해 햇빛을 자르고
바람을 자르며 하얀 옷을 입고 검은 눈을 가리고 얼
어가는 심장에 종이꽃을 꽂고 종이꽃의 적정 온도는
낮아 사람이 만지면 서서히 타들어가는데 회색 길을
걸어 이상한 모자가 나를 쫓아오고 이상한 모자와
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것은 모든 상징을 싫
어하고 세상의 끝은 상징이 아니라고 하고 무기력한
빛이 쏟아지는 회색 길을 걸어 건널목을 건너 담쟁
이 담을 돌아 세상의 끝을 향해 걸음이 빨라지고 심
장이 빨라지고 끝과 공원을 쓰기로 했던 우리의 시
절은 아름다웠나 영원한 언덕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회색 길을 걸어 햇빛을 자르고 바람을 자르며 이상
한 모자와 나의 거리만큼 그리움이 생기고 알 수 없
는 그리움이 생기고 그리운 그림자 그림자에 그림자
를 더하고 계단도 없고 언덕도 없고 회랑도 없는 회
색 길을 펼치며 얇은 공기 얼어가는 심장에 칼을 꽂
아 종이꽃의 온도를 올리고 불붙는 종이꽃의 온도를
올리고
- 햇빛, 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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