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시사랑

루꼴라 재배 일기 / 김상희

작성자플로우|작성시간26.09.16|조회수38 목록 댓글 0

 생략할 수 있는 것은 다 생략하게 된다

 괜찮다는 말이나 몇통의 부재중 전화에 대한 답신이나 우

리가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이나

 

 루꼴라는 자란다

 우적우적 씹어 먹어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다

 베란다 화분에 피부 조직 같은 잎이 보인다

 너의 발등을 떠 온 것 같은

 

 여름 햇볕을 너무 세게 쬐면 쓴맛이 많이 올라온다

 그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

 생략할 수 있는 건 다 생략해도 좋다

 이 얇은 조직은 절대 소리 내지 않는다는 것이나 아무리

씹어도 멍들지 않는다는 것이나 그래서 더 슬프다는 것이나

 

 올리브오일을 팬에 두른다

 루꼴라를 세 주먹 올리고 볶는다

 토마토를 썰어서 넣는다

 

 차가운 햄을 두 겹 쌓는다

 간편하게

 어느 집에나 있는 재료라서

 충분히 익숙한 것들만으로도

 맛있는 루꼴라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다

 

 부서지는 토요일 오후에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문다

 우적우적 씹으면 입에서 비명이 터진다

 루꼴라 잎맥 사이로 너의 말들이 돋아난다

 오랫동안 알 수 없었던 소식이 넘어간다

 

 결코 뱉지 않는다

 삼킬 수 있는 것은 다 삼킨다

 삼킬수록 더부룩해지는 것을

 쉽게 모른 척할 줄 안다

 

 입안에서 다 씹히지 않고 남아 있는 문장을 씹으며

 나는 자란다

생략할 수 있는 것은 다 생략하면서

 네가 없는 곳으로 도피하면서

 내 발등을 물어 가는 너의 감촉을 느끼면서

 

 

[두나 없는 두나],창비,2026.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