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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숲에 들다

개 11

작성자joofe|작성시간26.06.05|조회수61 목록 댓글 0

다저녁때 내리는 눈 [이상국]

 

 

 

 

다저녁때 눈 온다

마을의 개들이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눈 오는 날 피나무로 두리반을 만들거나

손바닥에 침을 뱉어가며 멍석을 맸다

 

술심부름 갔다 오는 아이처럼

겅충겅충 가로등 아래 눈 온다

주전자가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어느 해 겨울

그 멍석으로 기어코 당신의 문상객을 맞았다

 

눈은 아무것도 모르고 와

공평하게 마을의 지붕을 덮는다

불빛 화안한 창들

지저분한 나라도 좋아하겠다

 

눈은 천방지축 어둑한 골목길로 돌아다닌다

눈은 자기가 눈인 줄도 모르지만

눈에게도 고향이 있어서

거기 가서 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2021

 

 

 

 

노랑 [고명재]

 

 

 

 

루드베키아라는 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노란 꽃인데요

노랑은 독주를 넘길 때 목젖을 치는

모든 술들의 지느러미 색입니다

 

흔들어둔 샴페인을 누르는 엄지죠

지문 밑에서 전갈자리가 간질거려요

들리나요 개들이 흙길을 달리는 소리

우리는 밤하늘에 탄산수를 엎지른 채로

멀리 떨어진 별들의 재채기 소리를 들어요

 

사과를 깎거나 귀를 파거나 참깨를 뿌릴 때

재갈거리는 모든 소리에 노랑이 있어요

당신의 개가 샛노란 털을 두르고 있죠

노랑은 힘차고 당당합니다 절정을 내딛죠

오늘은 창밖으로 이불을 터는 날

 

귀와 귀를 붙잡고 황소를 타듯

입술을 깨물고 힘차게 이불을 털면

섬유의 파도 끝에서

모서리가 열리는

그 순간의 정점도 노랑입니다

 

그러니 나랑 꽃 보러 같이 갈래요

소리 없이 성냥을 켜는 법을 알아요

머리가 무거운 꽃이 허청, 휘청거릴 때

우리의 눈동자엔 혜성의 꼬리가 밝게 스치고

손끝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랑 같이

책 보러 강에 갈래요

 

콩나물처럼 머리를 밝히고 사랑을 말해요

불상처럼 차분하게 눈감은 채로

왼편으론 당신, 강물, 둔덕이 있고

오른편엔 감자 같은 내가 있지요

나는 그래요 그냥 있어요

곁은 그런 것

손 내밀면 확고한 형태로 있을 거예요

수천 년을 건너온 은행나무처럼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문학동네, 2022

 

 

 

 

한때나마 [허림]

 

 

 

 

가덕으로 드는 길

바람에 날리는 벚나무 꽃잎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다가도 문득

한때나마 몸 섞으며 살았던 그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비가 와야 생각나는 우산처럼

한때나마 몸 섞으며 살았던 도시의 한켠

연속극 보며 라면 끓이던 옥탑방

장엄한 노을 불러들이곤  했던

한때나마 꿈으로 궁색을 둘러대던 저녁

이웃집 담장에 쓴

"우리 집 개가 화나면 주인도 못 말린다"는 빨간 문장이

시처럼 따스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그대가 기억날 때처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정표 같은 말들이어서 더 생생했다

한때나마 살아보려고 하면 된다 된다 되뇌던 문장들의 허구

중독처럼 또 라면을 끓이며

그대의 안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어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따뜻했다

 

 

                    - 골말 산지당골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 달아실, 2021

 

 

 

 

도시의 성자 [최종천]

 

 

 

 

골목에 무심히 서 있는 전봇대는 성자(聖者)다

지난밤에는 술 취한 사람이 토하고

오늘 낮에는 개가 오줌을 싼다

사람들이 화풀이를 하며 발로 차기도 한다

뭇 중생들의 투정을 묵묵히 삭이느라

어깨가 메마른 그는

허리춤에 등불 하나 달고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다

월셋방 있음 사람 찾음 광고가 덕지덕지

눈을 가려도 환히 보고 있다

묵묵함 의연하고 초연함 그뿐

사람들을 대신하여

수모를 견디는 그를 보라

그는 보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는 성자다

 

 

                       -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장석주]

 

 

 

 

  저물 무렵 産痛으로 개가 운다.

  자정 무렵 개는

  강아지 다섯 마리를 순산한다.

  개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갓 태어난 것들을 들여다본다.

 

  자정 너머 둥근 금빛 달 아래 그림자도 함께 흐뭇

한 얼굴로 들여다본다.

  아직 눈도 못 뜬 것들이

  어여뿐 분홍 꽃잎 주둥이들을

  냅다 들이대며

  제 어미의 젖꼭지를 향해 돌진한다.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 절벽, 세계사, 2007

 

 

 

 

술도가가 있는 골목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냄새와

시큼덜큰한 막걸리 냄새가 흘러나오는 그 골목을 찾아들면

누런 냄새 위에 쓰러져 누운 술꾼이 있고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비틀거리는 개가 있고

삐끔 열린 솟을대문 안에는 조금쯤 요망한 자세로누워 깔깔거리는 여자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노란 한되들이 술 주전자를 들고

한모금 두모금 마시며 가는 간 큰 애가 되어

미나리꽝이나 앞산이나 저수지가 타박타박

내 눈 속을 아프지도 않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며

하늘과 땅과 마을과 들판 중에서도 내가 참 크다 하고

돌아앉는 뒷산도 그때만큼은 내 편이란 생각을 하며

이런 술도가가 있는 우리 마을을 내가 참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옆집 새댁이 내는 스란치마 소리처럼

조금쯤 은밀하고

조금쯤 세상에서 붕 떠나 있는

그 술도가 골목을 어린 나는 어미의 품처럼 파고 들었으니

지금도 술을 받아놓고 술병을 들고 소재지를 확인하는 나는

술 한잔 마시지도 않고도

어느새 그 많은 술도가를 다 편람한 듯 마음이 화끈해지고

그 골목에서 술꾼들의 오줌을 다 받아먹고 사는 맨드라미 모양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수굿한 고개가 되곤 한다

 

 

                        -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 

 

 

 

 

스모크 [김은경]

 

 

 

 

언제나

우연히 만난 남자가 더 많았다

매립지 위 눈사람 마냥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들

우연히 만난 구두

우연히 만난 화분

우연히 만난 개

 

투병하듯 어쩌면

투약하듯

 

말을 모르는 사람끼리 포옹하면 이런 기분이 될까

 

구름을 만질 수 없어서

불꽃을 가질 수도 없어서

쓸쓸한 부족들이 치르는 단 1분간의 묵녑

 

불을 붙인다

흰 입김 내뿜는다

담배가 타오른다

연기(煙氣),

실오라기처럼 날아가는

집시의 뒷덜미처럼 사라지는

연기(緣起)

 

새카만 비밀을 삼키듯

연기를 삼키는 날들

 

 

                 <문학IN> 2014 여름호.

 

 

 

 

당신이라는 말 [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천암 능인 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이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 계간문예, 2020년 가을호

 

 

 

 

수락산행 [김승하]

 

 

 

 

직장을 그만두고 빈둥거리다가 찾은

오월의 수락산, 아카시아 꽃 피어 있었네.

계곡의 맑은 물에 발을 담그면

촘촘한 잎새들 수런거림으로 반겨주는

푸른 그리움 묻어나는 물푸레나무 숲 지나

턱 턱 숨 차오르는 깔딱 고개 지나,

수락은 굴종을 강요하네.

정상으로 오를수록 두 발로 걷는 것보다

네 발로 기는 것이 편하다는 사실을,

힘겹게 올라간 정상에는 시원한 바람뿐이지만

산행은 얼마나 상쾌한 고통인가.

끊임없이 수락을 오르는 사람들 뒤로하며

하산하는 길, 다리가 후들거린다.

내려가는 길 또한 얼마나 더 힘든 것인가.

문득, 오월의 수락은 내게 무위를 일러주네.

소박한 꿈 숨긴 채 순긴 도토리를 품고 있는

신갈나무 숲 사이, 만개한 아카시아 향

가끔 내 무딘 감성 가시로 콕, 콕 찔러주어도

개처럼 꼬리 흔들 수 없는,

오월의 수락산엔, 내 얼굴처럼 하얗게 질린

만개한 아카시아 꽃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네.

 

 

                   - 저문 바다에 길을 물어, 달아실, 2018

 

 

 

 

A day in the life [황혜경]

 

 

 

 

 집에 없는 것처럼

 숨죽여 살면

 비누도 딱딱

 그릇도 담지 않고

 갇힌 것도 아닌데

 가둔 것도 아닌데

 관리하는 것의

 소리가 압도적인 날이 있다

 

 없어진 나는

 소란의 주범이었다고

 뜨겁게 애태우고 있던 것에 치우친

 고장 난 견본이라고

 

 사람의 시간으로 개와 산 게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개를 보내고 개의 시간으로 산다 데리고

 

  5월의 장미가 거느리고

  10월의 단풍이 거느리고

                   풍기고

 사람의 말이니까

 맞는 말도 있고 틀린 말도 있고

 없을 때는 태양과 달의 대용을 구하면서

 빛의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없어진 것이라 보였던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기

에 있다

 

 

 *   비틀즈의 노래. 곡의 끝에 15초의 침묵이 흐른다. 그것은 개들의 들

을 권리를 위해 개들만 들을 수 있는 20헤르츠 이하의 낮은 소리, 또는

1만5천 헤르츠 이상의 높은 음으로 이루어진 구간. 개들만 들을 수 있

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는지 시험 삼아 넣어보았다고 한다.

 

 

                    - 겨를의 미들,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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