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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숲에 들다

개 12

작성자joofe|작성시간26.06.07|조회수57 목록 댓글 0

Nothing [최문자]  

―봄에는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감정이 생기고 제목도 모르면서

새로운 거짓말이 되고 싶다 겨울 끝에서 내 처음의 꽃이

떼로 몰려온다는 것 꽃이 돌멩이처럼 잊었던 기억을 찍어

내고 무더기 무더기 떼로 몰려온다는 것  꽃은 구름이 가

득한 동쪽으로 가는 길이랬어 잘 아는 꽃이었어 알다가도

실금 같은 것 눈동자 같은 것 붉은 벽돌 같은 것 미지근한

어떤 기억과 방향이 생기는 게 그 꽃 같았어 깊은 밤 파랄

수록 무수히 돋아나던 별들이 맹렬하게 반짝인다 아무리

그 개처럼 크게 울어도 반짝여지는 이 무한한 뭇별의 고요

함은 밤인지 봄인지 꽃인지 무채색 구름인지 죽음인지 대

답이 뒤섞인다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갑자기 누구의 꽃

이 될까 비명이 될까 흐를까 무릎으로 남아 있을까 우르르

일어나는 것을 발로 차 보고 있다

 

 

                   - 해바라기밭의 리토를넬로, 민음사, 2022

 

 

 

 

개가 사라진 쪽 [고영민]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 쯤

어린 장어는 강에 오르고

열 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불은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정비소로 뛰어 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 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 시와편견, 실천, 2021가을호

 

 

 

 

마지막 사랑 노래 [문충성]

 

 

 

 

젊은 날부터

나의 우주였습니까

나의 하늘

어딜 가나

언제나

만날 수  있었습니까

목이 말라도

배가 고파도

행복했습니까

 

마지막

고갯길 넘어가며

숨 막히며 오늘도

당신을 그리워합니까 반세기를

함께

살면서

사랑하고

때로

싸우면서

눈물이 마르도록

그 사랑 완성하지 못했습니까

 

저무는 날

나 병들어도

처음대로 눈뜹니까

하늘이 땅이

검게

누렇게

 

마침내

내가 꿈꿔온

나의 우주가 한 잎

영원이 그리움이 됩니까 아아!

사랑하는 이여!

꽃이 져도 아름다운 색깔 지닌 꽃씨 남기듯

개가 허공을 날다 떨어져 죽어도

새하얗게

허공 한 녘에

빛나는 슬픔 남기듯

 

 

               - 마지막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16

 

 

 

 

뿔소라 [김현]

 

 

 

 

깊은 밤에

귀를 대보면

나는 무시무시한 것을 앞두고 있다

 

파도에 휩쓸려 가는 비치볼처럼

잡지 못해 이끌려 가는 영원한 사랑

 

개는 한동안

그대로 그렇게

허공을 향해 짖다가

가녀린 인간의 어깨

삐뚤어진 입술

빛바랜 눈동자

한 줌 영혼

여름 바다에 빠져 죽진 못하고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텅 빈 것을

믿고 따른다

 

혼자 꾸는 꿈이

대관절 멀리 가는 이유는

알맹이가 없어서

 

껍데기는 껍데기를 알아보고

 

개는 얌전히

사랑의 앞니가 빠져

헤벌쭉 웃는 인간을 품에 안고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존나 쿨한 척하는 인간치고 진짜 쿨한 인간 없음

죄다 암에 걸리고

손수건을 쥐어주면 눈물 흘리고

게딱지에 밥 바벼 먹는

애쓸수록 사랑스럽다

사람의 사람됨이여

 

뿔소라의 내장에는 독이 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날뛰는 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뿔이 난 것에 입술을 대면

진실을 말하고 싶어서

개소리를 지껄인다

 

우리는 개같이 사랑하지

아무 데서나 붙어서

이 새끼들이 재수 없게

돌멩이는 날아들고

붉게

헐떡이는 걸 감추지도 못하고

줄행랑쳐서

모래성에 숨어서

숨죽이고 본다

죽으려고 환장한 이 빠진 바보 곁에

개 한 마리

눈이 부셔서 흥얼거리지

사랑으로 눈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귀를 대보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

월트 휘트먼의 시보다 영화가 더 먼저 생각나는 건

김민희와 홍상수 때문

 

세상에 불륜이고 싶지 않은 사랑도 있니

 

껍데기에 대고 기원하면 껍데기를 얻고

알맹이에 대고 기원하면 알맹이를 잃는다

 

잘 잤어요

분리수거 다 해 놓았어요

오늘은 일곱 시 삼십 분 퇴근

저녁 같이 먹어요

 

사실 개는 여기 없다

이미 멀리 도망갔다

 

 

* 최진희, 「사랑의 미로」에서 인용.

 

 

                  - 낮의 해변에서 혼자, 현대문학, 2021

 

 

 

 

빈티지인 이유 [임지은]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말해준다니까

너는 외국 도시 이름 같다고 한다

외국에서는 슬픔도 머플러가 될 수 있다고

햔겨울 목에 두르면

부러운 나머지 북극곰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고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말해준다니까

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겨울이 취미인 그들은 체크무늬 장갑을 샀고

하나씩 나눠 낀 채 동물원을 빠져나갔다고

내 손 위에 너의 손을 포갠다

 

우리가 슬픔을 숨기지 않고 가꿀 수 있다면

창틀 위에 쌓인 눈

눈이 가득히 덮인 숲

그 흰 색에 가까운 따뜻함으로

서로를 쓰다듬었을 텐데

 

우리는 등이 가려운 묵극곰처럼 마주 앉아서

빈티지를 말한다

겨울이 녹고 있으니까 슬프고

기르던 개를 만날 수 없어 슬프다

오래된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슬픔이 빈티지인 이유를 찾으려니까

이제 슬픔은 새롭지 않아서

우리는 동네에 하나뿐인 세탁소에 간다

 

계절이 바뀌어도 찾아가지 않는 옷들 위로

차곡차곡 슬픔이 쌓인다

더러는 버려지거나

뒤늦게 주인이 찾아가거나

외국에 사는 누군가의 머플러가 되겠지

 

아빠의 옷장에서 모자를 꺼내 쓴 내가

할머니의 조끼를 입은 너에게 빈티지를 말한다

 

휴가지에 두고 온 애완동물처럼

새까만 발바닥을 하고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도로의 표정을 하고서

 

 

                - 무구함과 소보로, 문학과지성사, 2019

 

 

 

 

옥춘 [이혜미]

 

 

 

 

  다정에도 핏빛이 어리던 봄꿈이었을까

 

  몸이 있던 봄을 기억하는 방식이었어 피가 너무 달아 어지럼증을 앓던 아

침, 주머니에 어린 새를 감춰두고 입을 다물면 끈적해진 숨이 붉게 물든 잇

몸을 타고 고여들었다

 

  양말을 찾아 신고 뒤돌아서 기다렸지 투명한 무리들이 찾아와 국을 뜨고

과육을 베어 무는 소리를 개가 짖기 시작하면 일제히 시계를 바라보며 오래

된 약속에 대해 생각했다 홑이불을 덮고 자다 죽었다는 어린 조상을

 

  우리는 사라진 것들만을 두려움 없이 사랑했으니까

퍼져나가는 단것의 무늬로 길흉을 점치며

 

  예쁜 입술을 가지면 좋은 나라에 입장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 아무리 베어

물어도 사라지지 않는 죽음을 핥으며 마음껏 달아지고 싶어서, 달라지고 싶

어서

 

  몸을 벗을 수 있을까 색색으로 물든 이 작은 껍질을 털고

 

  그만둘 수 있을까

  피라는 직업을

 

  웅크린 새를 달래어 꺼내놓으면 입에 단내가 돌고, 알 속에서 조금씩 펼쳐

지는 날개를 생각해 흩어진 육체에게도 선연한 색들이 필요했다고

 

  옥춘, 다녀간 혼이 흘려둔 흰빛처럼

  피와 숨이 겹치는 상서로운 병이어서

 

 

          - 월간 현대문학, 2021년 4월호

 

 

 

 

불이 있었다 [안희연]

 

 

 

 

그는 날이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은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뒤통수 연가 [문성해]

 

 

 

 

나는 점점 마주 오는 사람과 눈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개하고나 눈 마주치다 

그 개가 그르릉거리는 소리라도 하면

얼른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깐다

나는 점점 마주 오는 사람이나

마주 오는 개보다는 오히려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가 이리 편안해지니

나는 이제 안전하고 무고하리라

아침 공원에서 뒤통수들과 안면을 트고 

뒤통수들을 품평하고 뒤통수들과 사랑을 한 지 여러달

이제 낯익은 뒤통수라도 만나면

달려가서 뒤통수를 치고 싶어진다

연신 삐딱거리다가 끄덕거리는 것을 보니

그도 나를 알아본 모양

내 뒤통수가 괜히 가렵거나 스멀거린다면

내 것도 누군가를 알아보았단 증거

그때는 조용히 뒤통수의 일은 뒤통수에게 맡긴 채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내 뒤통수는 이제 많은 것들과 실실거릴 것이다

이것이 뒤태를 가진 자들의 살아가는 힘

마음에 드는 뒤통수를 만나면 쫓아가서 알은 체를 해보라

우리는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으니

 

 

          - 입술을 건너간 이름, 창비, 2012

 

 

 

 

겨울 시금치 밭 [장석남]

 

 

 

 

이 시금치들아

이 시금치들아

 

돌팔매로 들어온 돌이 간혹은 구르고 있어도

끼니는 좀 걸렀어도

이 시금치들아

 

무슨 새를 기다리나

무슨 새소리를 기다리나

새파랗기를......

 

寂寞도 소슬함도

달디 단 同級生

개똥도 개발자국도

아껴서 얼려둔

 

이 웃음 이 웃음

울 것 같은 이 웃음

 

시금치들아

시금치들아

 

얼다 녹고 다시 어는

2월 중순 밭머리에

칼칼한 餘情을 이총이총 꾸며놓은

시금치 밭 밭머리에 한참을 섰어라

 

가마를 기다리는 옛 신부의 심정을

그림자를 포개 나누고 섰어라

 

 

                 - 뺨에서 쪽을 빛내다, 창비, 2010

 

 

 

 

질문의 동네 [박해람]



 
이 동네에 살면서
질문을 먼저 배웠는지
대답을 먼저 연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대답이란 꽃피는 방식이고
질문이란 임박한 즈음 같은 것이라
꽃의 앞뒤는 햇볕만 알고 있을 것이다
동네에는 쪼그려앉는 사람이 있고
그는 아이들의 질문을 모아다
곤충채집 판에 실핀으로 꽂아 놓길 즐긴다
또 동네에는 불구의 옷장을 수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추렴으로 모은 뼈로
사람 하나를 만들어 놓고
대답을 내놓아라, 다그친다
한밤엔 소용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꽃,
질문은 두서없고
대답은 더듬더듬 칠흑의 사설을 읽는다
질문놀이를 하겠다고 해 놓고
종용하는 놀이를 겸한다
이를테면 확인하는 가구 수들과
의문에 묶어 둔 개들의 수가 같거나 한 일들
모르는 것을 틀리는 일들이란
법칙이 만들어진 이후의 일들일 테니
꽃을 질문하고 돌팔매를 맞는 일쯤 허다하다
장님이 던진 돌이
눈 뜬 우연에 가서 맞는 일 같은
  


              - 여름밤위원회, 시인의일요일,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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