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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숲에 들다

개 13

작성자joofe|작성시간26.06.09|조회수55 목록 댓글 0

그리운 나라 [장석주]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묘비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2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달의 엉덩이가 구릉에 걸리고

너도밤나무 숲속 위의 하늘에도 그리운

물고기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아내의 지느러미는 여전히 매끄럽고 그동안

낳은 딸들은 낙엽 밑에 잠들어 있으리 내 아내는

여전히 낮엔 박쥐들을 재우고

밤엔 붉고 검은 땅에 엎드려 알을 낳으리

아내의 삶에 약간의 이끼가 낀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내 앞가슴의

거추장스러운 의문의 단추들이 툭툭 떨어진다

 

 

3

나는 밤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의 장마로 끊긴 다리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눈치 빠른 새앙쥐들은 낯선 침입자를

힐끗거리고 무심한 아내는 자전거만 타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흰 종아리가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때마다

스커트자락 밑으로 아름답게 드러나곤 한다 아아

너무 늦게 돌아왔구나 내 경솔함 때문에

빠르게 날이 어두워진다 그동안 아내의

입덧은 얼마나 심하였던가 유실수의

성한 열매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최후의 시장에서 인신매매업으로 치부를 할 때

아내는 날개 달린 다람쥐처럼 날아다녔으리라

너도밤나무 과의 북가시나무 숲속 위로 열린 하늘엔

죽은 사람의 장례가 나가고 바람을 방목하는

언덕의 숲속에서 누가 지느러미도 달리지 않은

사람의 아들을 낳는다 그림처럼 누운 아내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기도 전 아내는 힘없이 부서져내린다

그리움은 그렇게 컸구나

머릿속의 우글거리는 딱정벌레들을 한 마리씩 풀어 주어

내 머릿속은 빈 병실 같다 피안교를 건너서

내일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시 최후의 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 그리운 나라, 평민사, 1986

 

 

 

 

자주 틀리는  맞춤법 [한연희]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 언니는 자주 모서리에 부딪힌다 나는 현명하다 골목은 흔한 배경이다 옆집 개는 죽는다 똥개야 살지 마 언니야 던지지 마 휘갈겨 쓴 문장들을 언니는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낮은 계단에게나, 새는 물컵에게나, 쭈그려 앉은 개에게나, 길 한복판에서 내게. 너는 왜 늘 네 멋대로니?

 

곧 바뀔 거라고 믿은 빨강은 멈췄다. 행인들이 그냥 건너가버렸다. 언니가 틀렸다. 나는 운이 많은 아이니까. 셋만 세면 언니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나는 숫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사거리에서 언니가 뒤돌아봤다. 내가 알고 있던 언니는 없었다. 언니야 괘찬지마 언니야 도라오지 마 어떡게 어떻해 멈추지 마

 

건너편 간판엔 각종 찌개 팜니다 어름있읍니다 나으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옳바른 행동교정 이상한 글자들이 좋았다. 내 이야기가 비뚤어질수록 좋았다. 아무도 날 교정하지 못하는 게 좋았다. 정답과 멀어진 내가 좋았다. 틀린 간판은 어디에든 걸려 있고. 언제든 글자를 거꾸로 읽을 수 있으니까. 사라진 언니를 떠올리는 대신 오늘의 날씨를 읽었다.

 

맞춤법은 틀렸어, 기상예보는 틀렸어, 앨리스가 틀렸어, 대통령은 모르지, 언니가 옳았지, 백과사전이 옳았지, 철학자마저 옳았지, 그러니 내가 틀렸어, 뭐가 틀렸는지 몰랐고 아무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옳았어, 틀렸으니까 모르고 모르니까 웃기고, 불가능하게 구름이 툭 떨어져버리고, 꽉 막힌 도로에 싱크홀이 생겼다. 이제 나는 영영 틀린 사람이 되었다.

 

 

                - 2016년 제 16회 "창비" 신인상 수상작중에서 

 

 

 

 

눈물의 방향 [황성희]

 

 

 

 

아직 이 세계를 다 걷지 못했는데

발바닥은 벌써 너덜너덜하다

 

낡은 바짓단처럼 몸 여기저기

올이 풀리고 있다

 

그래도 일기는 쓰기 싫다

이 세계의 시간에 기대는 것은 싫다

 

거울 속에 거울이 있는 것도 싫다

플라타너스가 플라타너스인 것도 싫다

 

편지 봉투에 받는 사람을 쓴다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끼운다

옆집 할머니와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래도 목줄을 끌며 돌아다니는 개는 싫다

난간에 걸터앉아 시시덕대는 아이들은 싫다

결국에는 집이 튀어나오는 뻔한 골목은 싫다

 

그래도 잠은 온다

 

잠이 오는 모든 곳에는 언제나

꿈에 중독된 눈동자가 있고

 

어젯밤의 눈물 위로 다시

오늘밤의 눈물이 흐른다

아무리 싫어해도 흐른다

 

오래전 사과가 그러했던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문학동네, 2021

 

 

 

 

개가 물어뜯은 시집 [조경선]



 


우편으로 배달된 시집을 옆집 개가 물어뜯고 있다
제목은 찢겨져나갔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다
시 제목이 반쯤 남아 땅 위에 너덜거린다


한 끼에 9,000원짜리 독상


침 흘리고 먹다 버린 첫 장 시인의 말이
마당에 흩어져 있다
귀퉁이 구겨진 시인의 얼굴은 웃는다
시집을 먹어치운 개가 맛을 아는지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든다


배불리 먹었을까


씹어 넘기다가 맛있는 부위만 골라 핥았을까
유명한 견이니
겉장만 보고 가려서 맛보았겠지
간신히 찾아낸 이름 한 글자와 제목이
대문 앞에 적멸로 앉아 있었다

 


                - 개가 물어뜯은 시집, 달아실시선 38

 

 

 

 

양산 [장승리]

 

 

 

 

잘 지내냐고 묻지 마세요

기회가 되면 보자는

바늘구멍 같은 말도 이제 그만

낙타의 앞발을 개 대신 핥고 싶어요

뒷발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

웃고 있는 꿈속의 개처럼 등으로

당신 등을 내려가고 싶을 뿐

베일과 베일 안쪽 풍경이

분리되지 않는 곳에서

신기루에 깃발을 꽂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지 마세요

멈출 수 없으니까

눈부시니까

백열등 아래에서 나는

양산을 펴겠어요

 

 

                 - 무표정, 문학과지성사, 2021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리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0                             

 

 

 

북한강 [고영섭]

 

 

 

 

강물은 언제나 회초리를 들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말을 안다면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 하라고

강은 힘주어 설한다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들리게

담장을 낮추고 살라 한다

그러나 강둑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강물은 이내

물결을 일으켜 회초리가 된다

철썩, 철썩 내 종아리가

발갛게 부어오른다

내 마을에는 홍수가 든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다녀보면 안다

무릎 밑이 얼마나 쓰린지를, 강물은

말할 것은 말하고

말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않는다

 

강물은 말없이 말을 한다

 

 

          - 몸이라는 화두, 연기사, 2000

 

 

 

 

개밥바라기별 [허문영]

 

 

 

 

샛별이라는

예쁜 이름을 놔두고

하필이면 개밥바라기별이라니요

 

바라기는 사기그릇

그렇다면 개밥바라기는

개밥그릇이라는 뜻인데요

 

누군가 별을 바라보며

저녁 끼니를 생각했나요

 

누군가 에둘러

제 밥그릇을 개밥그릇으로 불렀나요

 

서로 통할 듯 말 듯한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처럼

마음 속에 반짝이는 말

 

밥이 희망이 되던 시절

어스름처럼 번져오는 허기

별이 되어 서녘 하늘에 떠오르고요

 

개밥그릇에 담긴 별

내 밥그릇에 담긴 별

 

새벽녘엔 샛별로 떠서

누군가의 희망이 되었으면!

 

 

           - 별을 삽질하다, 달아실, 2019

 

 

 

 

여름 서정 [강혜빈]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우리는 만난다

내가 사려던 반지는 너의 손가락에 꼭 맞는다

 

따라붙은 시간이 등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다

눅눅한 바람을 가르며 숨 가쁠 때까지 달리고 달린다

 

"모든 게 끝장날지도 몰라"

 

무너져 내리는 계단에 앉아

너는루쉰을 읽고 나는 프레베르를 읽는다

 

버리는 것 없는 부랑자의 도시에서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

 

미묘하게 새는 발음과 풀벌레 소리가 마침

멈췄다가 다시 읽는다

 

장마 기찻길 위스키 개의 숨소리

개나리 돗자리 병아리 유리 항아리……

 

어두운 극장 안에서 우리는 만나다

아무도 웃지 않는 장면에서 웃다가 머리를 부딪히고

 

주먹보다 두꺼운 감정은 처음이야

내 안은 돌멩이로 가득 찬 줄 알았는데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

 

그곳은 넓어지는 여름

그곳은 조금씩 필사적으로

깊이를 가지게 되는 여름

 

우리는 한 세기를 건너가고 있어서

볼에 이르는 진동을 느낄 수 있지만

 

순한 애인을 나누어 가져서

가끔은 기쁘지 않다

 

손가락에 난 점을 세어본다

한 그루 두 그루, 너도 다 알잖아

 

눈부신 여름 안에서

다만 조용한 사랑이 지속되었다

 

브로치 같은 비밀을 가슴에 달 때마다

초록색 혓바닥이 돋아났다

 

플라타너스처럼 무성하게

쏟아지는 햇빛

 

 

                 -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2020

 

 

 

 

빙하와 어둠의 기록 [남진우]

 

 

 

 

  북극을 향해 떠난 탐험대에 관한 기록을 읽었다.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강철 같은 얼음의 싸늘한 추위를 견디며 멀

리 지구의 꼭대기를 향해 전진했다. 배는 얼음에 갇혔고 개

들이 끄는 썰매도 빙하의 해안 어딘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고 버려졌다. 장교들 선원들 사냥꾼들은 서로를 증오하

면서 극한의 기후 속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고래기름으로 밝힌 등불 밑에서 그들은 전해지지도 못할 기

록을 써 갈겼고 가끔 획득한 곰과 물개 고기로 생명을 연장

시키면서 침묵과 함께 독한 술을 들이켰다. 그들의 시선이

가닿는 사방은 오직 서슬 푸른 빙벽 빙벽일 뿐. 얼음 구덩이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그들은 마침내 미지의 극점에 도달했

다. 아니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지나온 빙산

과 빙해에 황제의 이름을 붙였고 그것이 그들과 그들이 태

어난 땅에 영광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북극권의

기후변화로 얼음이 녹아 없어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대륙의 여기저기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임으로 해서 그것이

그들의 영토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얼음 위에 꽂은 깃

대가 누더기가 되어 사라지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썰매개들이 짖어대며 달리는 얼음의 땅 저편에서 그

들이 행진하며 내는 발자국 소리가 지금도 울려퍼지고 있

다. 그들은 아직도 전진중이며 북극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

았다. 우주의 캄캄한 어둠 속을 돌고 있는 이 행성에서 북국

이란 남극이란 얼마나 가없는 미지의 지점일 따름인가. 유

빙이 떠내려오는 불모의 땅에서 그들은 지금도 사실과 허구

의 기록을 써나가고 있다. 멀리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꼭대

기에 눈으로 뒤덮인 궁전이 보인다. 저기 영원히 지지 않을

오로라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지평선에서 하늘로 한없이 뻗

어오르고 있다. 바람이 죽은 자의 이름을 속삭이며 불어온

다. 마지막 원정대가 사라져간 눈보라를 응시하며 책을 덮

는다. 빙하에 묻힌 시신들이 페이지를 넘어 내 손가락 사이

로 흥건히 녹아 흘러내린다.

 

 

                   -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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