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이원하]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오 분 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세계에 대해, 조금 더 적은 측면으로 [유희경]
그 이름은
옆으로 옆으로 걸어가
벽에 어깨를 기댄다
사실은 떠밀린 것이다
밤에 밤의 무게에
무게의 매력에
고양이가 자세를 낮추고
귀를 세우는 것처럼
그 이름은 대개 그러하듯
세 글자로 되어 있다
네 글자는 어색하고
다섯 글자는 신기해서
벽을 더듬는다 다행히
낙서 하나 없이 깨끗하므로
이제 그런 이름은 없어
낭만과 추억이 되어버렸지
반도덕 선언처럼
교과서를 읽듯
그 이름은 벽에 의존하여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깨가 쓸리는 것도 모른 채
실은 실연을 했습니다
실은 곰탕을 먹었습니다
실은 걸레질을 하고
청소기를 돌렸습니다
실은 버스를 탔습니다
종점에는 열 살 먹은 개
똘이가 묶여 있습니다
똘이는 밥그릇 위로
눈이 내립니다 똘이는
왕왕 짖습니다
이 여름에 생각하는
지난 겨울 이야기입니다
실은 모두 지난겨울
지난겨울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 이름을 쫓아간다
열 걸음쯤 떨어져서
그 이름이 걸음을 멈추면
나도 멈추고
그 이름이 걸어가면
나도 따라 나아간다
둘의 그림자는 길고
길고 밤은 한곳을 향한다
그것은 미래의 방향
물길처럼 스스로
소리를 내면서 운다
이름이 입술을 만지면 늘
입술이 내 것이 아닌 기분
다행이야 이름이 있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닫히지 않은 세계의
조금 더 적은 측면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처럼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이름은 아니다
그것은 나여서도 안 된다
- 2020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9
당분간 [조용미]
지루하고 괴로운 삶이 지속된다
집요하게 너는 생의 괴로움에 집중하고 있다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여긴 생이라는 현장이다
이렇게 생생하므로 다른 곳일 수 없다
무서운 집중 앞에 미망과 무명이 사나운 개의 이빨 앞
에 선 어린아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를 바란다
통쾌하다 비명을 지를수록 생은 더욱 싱싱해지고, 생
생해지고
지루한 열정이 나를 지치게 한다
이 괴로움은 완벽하게 독자적이고 완벽하게 물질적
이다
누구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
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복성루 [임솔아]
문발의 구슬이 짤랑거린다.
귀퉁이에 깍두기 한 대야가 놓여 있다.
뭘 먹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 옛날 애인은 짜장면, 짜장면이라
했다. 끈적끈적한 물기가 그릇에 흥건했다. 거기에다 밥까지 말
아 철벅철벅 비벼 먹으면 옛날 애인은 한입만 먹어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양푼에 짜장면이 담겨 온다.
나는 비닐 장판에 앉아 있다.
옛날 짜장은 짜장보다 시커멓고
옛날 짜장은 짜장보다 달다.
머리 없는 개 한 마리가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누워 있어 재래
시장은 가기가 싫었다. 옆에서 복실개 한 마리가 흔드는 꼬리도
보기가 싫었다. 할머니가 까서 쥐어주던 귤은 뜨근뜨근해서 먹기
싫었고 나를 혼내고서 엄마는 뜨끈한 손바닥으로 밤새도록 내 머
리를 쓰다듬었다. 엄마의 얼굴에서 개의 혓바닥이 드넓게 삐져나
와 내 머리를 핥는 꿈을 꾸었다.
조선족 아가씨가 손으로 잔반을 긁어모은다. 오늘 힘들다, 빨간
다라이에 쏟아부으며 중얼거린다. 여기 콜라 주세요. 없어요. 그
럼 사이다 주세요. 없어요. 짜장 소스가 범벅된 손으로 조선족 아
가씨는 보리차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는다.
밤이면 구토를 쏟아놓는 취객이 있고 아침이면 조잘거리는 참
새 떼가 축제처럼 토사물 위에 모여든다. 밥풀과 오징어 조각 위
를 찰박찰박 걸어 다니며 신나게 쪼아 먹는다.
맛있었어? 응. 옛날 애인의 버릇대로 나는 보리차로 입을 헹군
다. 다음에 또 올 만큼? 아니. 온정은 매번 끔찍함과 엉겨 붙어서
끈적거리는 입과 손을 물티슈로 싹싹 닦아야 한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날아오는 총알을 늦추려거든 [이서하]
내려가지 말고 올라갈 것
눈에 띄지 말고
어느 돌에 숨지 말고
흐르는 물에 돌을 던질 것
숲이 깨어날 때까지
작은 돌로
큰 돌을 깰 것
그것은 적막이 깨지는 소리
숲의 위험을 알리는 소리
그러면 나무는 즉시 새를 보내 온 마을에 알릴 것
그리하여 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서서히 돌 것
질서 지키지 말고
아무도 따르지 말고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길을 덮어야 한다
잎의 정수리로
늘어진 나뭇가지로
햇빛의 맨발로
그러면 길을 잃은 주인은
개를 풀 수 있다
총을 쏠 수도 있다
그러나 총소리에 깜짝 놀란 개는
제가 왔던 곳으로 달아나고
(멍청한 짐승 같으니라고!)
성난 주인이 개를 탓하는 동안
까마득히 달리던 개는 주인에게 돌아가기에
길은 이미 엉켜 버린 것이다
빽빽하게 둘러 있는 나무가 벽이라면
새는 하늘을 가리는 지붕일 것
사방이 어둡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여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눈치 없는 인간은 옆구리에 총을 낀 채
신을 찾거나 동이 트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공포를 만든 것 또한 신의 과제였음으로
한 발짝 물러난 약탈자를 향해
숲이 전부 모이면
문이 없는 집으로
숲의 진짜 주인이 걸어 나온다
* 그림일지라도 새의 털을 건드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자크 프레베르의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을 변용.
- 진짜 같은 마음, 민음사, 2020
이름 없음 [강혜빈]
나는 이제,
이곳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차가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는
나만 모르는 세상에서
시시한 고독을 연기하는
와르르 흰빛을 뒤집어쓰면
잘못 떨어진 천사처럼
픽 쓰러지기도 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누군가 빛을 만지는 것 같아"
혼자 온 사람은 팔짱을 끼고
둘이 온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마른 손을 더듬으며
본다, 보고 있는 것 같아
뒤집어진 무지개가 잠깐 피어오를 때
우리는 빛의 기울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거나
곧 죽을 것처럼 껴안거나
어쩔 수 없이 기절하고,
벽에 대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림자들은
그림자를 벗고, 또 벗어서
첩첩 쌓인 허물을 밟으며
문과 문 사이를 건너가는 것이다
오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고
너는 이제,
그곳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침대의 반쪽을 잃어버린
너만 아는 세상에서
밤의 뒤척임을 기다리는
하나, 둘 박수 칠 때 사라지자
긴 편지 대신 귓속말로
말린 꽃보다 시드는 입술로
으깨지는 밥알처럼 무해하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주전자에 든 물을 흘리며 걷자
울면서 뒷발을 무는 개처럼
불 켜진 계단을 향해
자꾸자꾸 내려가자
더 낮은 곳, 더 더 낮은 곳
닫힌 문, 또 닫힌 문
더 높은 곳, 더 더 높은 곳
열린 문, 내내 열린 문
환호 소리. 먼지 소리.
남겨진 발들은 서성이고 있다
들어오는 문이, 나가는 문이 될 때까지
누구세요,
그런 대사는 없었지만
-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2020
목도目睹 [황혜경]
가봤어 가보면 분명해질 것 같아서
죽기 전날 가장 예쁜 얼굴이 된다고 했지 젊을 때
처럼
밖에만 서 있던 당신을 이해해
밖에서 멍하니 기다려보고 나서야
가장 마지막에 귀가 닫힌다고 했지
죽음을 지키던 호스피스 병동의 상징어였지
계속 끝까지 소곤거리라고 했어
비누를 쪼아 먹고 죽은 새
남은 말이 없는 변호사
망치질을 멈춘 목수
나는 보았다
사람들은 묻었다고 하는데 날아오르는 것들을
바득바득 규칙을 지키는 개
다친 발을 핥다가 지정된 욕실로 들어가 배설을 하고
한 남자는 전봇대 뒤에서 싸고 있다
나는 예의 없는 추례한 욕구를 다시 바라보았다
과감해진다는 것은 갖춰 입었다가 갖추려 한 것을 한
번에
벗는 일이었을까
정말 마지막은 쉬운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것을
남아 있는 자들은 못 봐서 모르나 보다
번민과 회한이 제대로 눈을 뜨고 이끌어나가던 날들을
오늘만 사는 자들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나 보다
삶에 부족한 것이 시간이니까 거기까지 관심은 없었나
보다
나는 눈알을 파먹는 생태계의 모든 동물이 궁금해졌으며
너의 언어가 나의 언어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너를 바라본다 너의 눈초리와 비슷하게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지
우고
두 눈을 뜨고도 분별하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는 때가
오고 있다
눈여겨보려고 한다
-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
공가空家 [이설야]
함부로 꽃이 피고 있었다
낡은 철문에 붉은 글씨,
공가(空家)
버리고 간 집들이 도시를 이룬
가정오거리 재개발지구 루원씨티
어서오십시오 장터할인마트 팻말에도
위험 접근 금지 써 붙인 낚시집 썬팅에도
목련왕대폿집과 정아호프 부서진 문에도
책임 중개 새시대부동산 건물에도, 있었다
꽃나라유치원 구름다리 앞
개나리 이마 으깨어진 노란 줄이 쳐졌다
안전망에 갇힌 빌딩
깨진 유리창 안에서 굶주린 개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비전축복교회 뒷마당에서는 부러진 의자가 못을 버렸다
드림빌라 사람들 모두 사라졌는데
붉은 글씨, 전체공가(全體空家)
방범 초소도 불을 끄고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데
뾰족구두가 허물어진 집을 찾아 다급하게 걸어간다
담쟁이들 손 꼭 잡고
녹슨 첨탑 십자가 위로
버림 받기 위해
올라가고 있었다
- 우리 좀 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2016
술을 삼키는 목구멍의 기분으로 [박은정]
어제는 슬픈 주정뱅이의 문장을 오래 더듬었다 보이지
않아도 만질 수 있다고 믿는 동료들처럼 보이지 않는 문장
을 지우고 술잔을 채웠다 아침이 와도 책상 위의 술잔은
계속 늘어났다 거듭되는 손이 있었고 거듭되지 않는 문장
이 있었다 잿더미 위에서 피어오르는 문장, 혀를 내밀면 울
어 버리는 문장, 저를 아껴 주지 못해 저를 망가트리는 문
장, 나는 못하겠네 더 이상 바보가 될 수 없네 힘차게 이마
를 문지르면 잔돈을 쥐어 주며 사랑해, 하여 나는 유리병
에 문장을 모으는 사람, 유리병을 채워서 빛과 사랑이 없
는 곳으로 달아나는 사람, 우리는 충분히 슬펐고 외로웠고
화가 났으나 그런 건 하룻밤 울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만난 적 없는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깃발을 올릴 때, 나
부끼는 깃발 사이로 스러지는 밤을 본다 오래전 바람을 타
고 들어온 영혼은 사람의 입 속에서만 살았다 입속에서 천
국을 보고 입속에서 삶과 죽음을 다 살았다 이름을 부르
면 머리칼 사이로 빠져나가는 영혼, 나는 하릴없이 소녀가
되었다 노인이 되어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잊어 간다 연민
없이 시간의 살이 불어나는 동안 서로의 가장 나약한 문
장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 바람이 불어 갈 곳 없는 개의 두
눈이 흥건하게 젖어 든다 이봐, 영원이 아니라면 겁먹지 않
아도 돼 매일 밤 감기는 눈을 울먹이며 버티는 사람이 있
다 꺾어진 고개에 술잔이 넘어지도록 아직 못다 한 문장이
기어이 흩어지도록, 어디서도 실패하지 않을 고독은 나의
재능, 속수무책 하룻밤을 영혼 없이 구르는 동안에도 밤은
지나갈 테니, 술을 삼키는 목구멍의 기분 따위는 잠시 잊
은 채.
- 밤과 꿈의 뉘앙스, 민음사, 2020
적막황홀의 아침에 [고형렬]
눈을 뜨면 먼저 손목시계를 찾는다
철커덕, 한뭉치의 늘어진 시곗줄과 시계
눈 감고 왼손 팔목에 채운다
아내가 사준 크리스털의 렌즈만 한 시계
하지만 오늘도
저 과거로부터 있어온 지루한 삶의
그 환하고 눈부신 아침이다
대대로 시간과 희망에 속아서 은빛 시곗줄은
살이 되었다, 한 뭉치의 살
나의 시간은 태양의 햇살처럼 간다
이젠 태엽도 풀리지 않으면서
우라늄이든 빛이든 한조각의 티끌로
재깍, 재깍, 재깍, 재깍
방 안에 햇살 들어오는 눈거울에
오늘은 무사 일출 이 시나 한편 짓는다
옛 시인들처럼
시골은 조용해서
간혹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 뿐
-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창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