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 [황인찬]
맞아, 그 여름의 바닷가에선 물새들이 끊임없이 울고 있었어 젊은 사람들이 해변을 뛰어다녔고 맞아, 우리는 개를 끌고 나왔어 그런데 그 개는 어디로 갔지
쌓인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
작은 것들이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다
우리는 그때 맨발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걷고 있었어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신발을 잃어버리고도 서로를 보며 그저 웃었고 그때 우리는 두 사람이었지
한 사람의 발자국이 흰 눈 위로 길게 이어져 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서로를 보며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을 보고 또 알았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보며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름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젖은 발이 뜨거운 지면에 남긴 발자국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겨울 호수를 따라 맨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내 영혼을 먼저 끌어내 요 [송승언]
나의 말을 기다리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기 전에
천국에 묶여 있는 개를 만나기 전에
올해의 첫눈이 내리기 전에
두 눈동자가 새하얗게 뒤덮이기 전에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이 들어오기 전에
당신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기 전에
최종 단어를 발음하기 전에
싸늘한 손을 내밀기 전에
그러기 전에
- 사랑과 교육, 민음사, 2019
개의 정치적 입장 [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 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 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 시사사 2018년 9~10월호
견주, 라는 말 [김선우]
주인 없는 개, 라는 말을 들을 때 슬프다.
주인이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
주인이 있다고 믿어져서 슬프다.
개의 주인은 개일 뿐인 거지.
개와 함께 사는 당신은 개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뿐인 거지.
이 개의 주인이 누구냐고요?
그야 개, 아닐는지?
이 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아는 좀 멋진 절친쯤 될 수 있겠소만.
- 녹턴, 문학과지성사, 2016
과일가게 앞의 개들 [최금진]
생선의 해진 살점처럼 구름 떠다니는 거리는 비릿하다
러닝셔츠만 걸치고 여름을 나던 시절이
사내를 거쳐 지나와
다시 과일가게 앞에서 모기향을 피우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색깔을 뒤집어쓰고 파리들은 맴돈다
사내가 펼쳐드는 부채는
잎맥까지 다 말라버린 나뭇잎 같다
바람이 코앞에서 우수수 떨어져 꼼짝도 않는다
몽롱해진 정신 속에 이따금 손님처럼 졸음이 찾아오고
검은 씨들이 검버섯으로 박혀 있는 사내의 꿈이
깜짝 놀라 깨어질 때,
수박 속살을 파먹는 파리들은
아무리 쫓아도 얼굴과 수박의 붉은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내가 러닝셔츠를 들춰올리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배꼽만 남아 배꼽이 썩어가는 배꼽참외들의 냄새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느냐는 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으름장을 놓는
사내의 가게 앞으로
비루먹은 개들이 떼지어 지나간다
제 몸을 다 토해내기라도 할 듯 헐떡이며
입 안 가득 상한 생선냄새를 질질 흘리며
사내는 사과를 하나 집어 러닝셔츠 안쪽으로 닦는다
바라보는 시선들을 깔보며 으적으적 깨물어 먹는다
목구멍까지 주름이 잡힐 갈증들이 바닥에 고개 떨군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오후가
툭, 비닐봉지 속으로 던져진다
- 새들의 역사, 창비, 2007
우기 [최문자]
오늘 비는 아무에게나 슬픔을 나눠 준다 우기에는 네 말이 옳았다 오래오래 젖다가 수채화 같은 슬픔이 온다는 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사과나무 가지 끝 풋사과 옆이 무너졌다 나도 저렇게 아픈 데를 씻다가 무너졌다 슬픔이 없다면 슬픈 게 여럿이던 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줄곧 믿어왔던 이 많은 책들과 수없이 눌렀던 어두운 버튼들, 맘에 내내 서 있던 사람 서랍 속의 흉터들
모두 혼자일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 죽을 것처럼 들고 온 것들, 저렇게 말할 수 없어서 짧게 말할 수 없어서 슬픔은 머리카락이 길고 형용사처럼 영롱하다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점 하나 없는 슬픔 언제 그칠까? 슬픔 곁을 개처럼 지키고 있다
-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민음사, 2019
소금기둥 [박철]
아무래도 나는 롯의 아내가 되지 않기 위해 이 얘길 전
해야만 하겠다.
어린 자식들 먹여야 하니 네가 대신 남으로 가라. 죽을
고비 서너번에 고무신까지 갯벌에 벗어준 채 교동서 김포
로 오빠 찾아가는 먼짓길이다. 흰둥이 검둥이 태운 미군
트럭이 지날 때마다 연백 촌것이 보따리 들고 갓길도 아
닌 굴렁밭으로 뛰어내리지 않았겠니. 흰 저고리 검정치마
는 또 얼마나 볼만했을고. 그때마다 그게 우스워 양키들이
손가락질하며 크게 웃곤 하더구나. 고촌에 당도해 올케가
처매준 복대 속 돈주머니를 친척 앞에 풀었다. 애들은 위
험하니 간수하마 가져가 영 달아나버리더구나. 어둠을 지
고 들어온 오디 얼굴의 오빠는 첫마디가 올케는 안 오고
왜 네가 왔냐 소리부터 지르더라. 피난살이 고되고 젊은
아내가 보고 싶기도 했겠지. 올케가 전해주라던 그 잃어버
린 전대 오십만환 얘기를 보따리처럼 안고 평생 끙끙 앓았
다. 50년이 지난 언젠가 큰오빠 세상 뜨기 전 맥 놓듯 고백
을 하자 그랬구나 하고 검불처럼 털어버리고 떠나더구나.
그렇게 내처 김포서 시집살이하면서도 고향 연백은 아직
가고 싶은 마음 하나 없더라. 어디 간들 이 한 몸 반길 곳은
없다 믿고 살아왔다. 이제 저승도 두렵지 않구나. 아니다
두렵다.
이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인기피증으로 평생 집 밖 출
입을 두려워 한 내 어머니의 손가락 마디만 한 발병 원인
이다. 다행히 유전이 아니라 내게서 대물림이 끝나는 짧
고 고마운 내력이기도 하다. 삼팔따라지 사팔따라지 돌아
봐야 부지깽이만도 못한 세월. 그러나 나는 앞으로 앞으로
돌진하리니 이제 더이상 소금기둥 될 일은 없어진 것이다.
돌아볼 일은 없다. 어느날 정신 나간 늙은 개처럼 비명처
럼 통일이 오든 말든 괴여할 바 아주 아주 없이.
-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창비, 2018
악의 조금 [민왕기]
너무 선해진 날에는 기둥 하나가 뽑혀나간 집이 되니
악을 조금 데려다 살아야지
선한 것들의 거처에는 사람이 자주 들지 않으니
마음을 흐려줄 악이 조금 필요하고
새끼 앞에 선 개에게 이빨을 드러낸 어미고양이처럼 악이 필요하고
그 먼 옛날 악까지 데려다 골목을 채워야지
하늘이 흐리다 구름이 온다 저것은 깨끗한 하늘에
조금의 악이 오는 것
선한 물, 선한 바람 아래 더러워진 발 담근 자신이
이 세상 조금의 악이 되고, 악의 조금이 되어 살 일을 채우는 것
그러니, 조금의 악이 있는 당신에게만 가서
악의 조금이 있는 당신에게만 흐려지려고 했다
-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달아실, 2019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함동선]
또랑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잠깐 일게다 이 살림
두구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마구 내몰다 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 물이 빠져 누
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 집으로
가게 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
어 있었습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
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
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이 안 닿은 곳 없고 손 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
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 함동선시선집, 황금알, 2010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안도현]
화암사 안마당에는
스님 모시고 노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 귀가 하도 맑고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습니다
간혹 귀 쫑긋 세우고 쌩 하니 달려갔다가는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올 때가 있는데
귓전에 닿는 소리에
덕지덕지 욕심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냥 한 번 그래 본 것입니다
바람이, 일없이 풍경소리를 내는 물고기 꼬리를
그저 그냥 한 번 툭 치고 가듯이
- 그리운 여우, 창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