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국숫집 [이근화]
이 도시는 너무 푹 익었다
들어 올리면 살점을 쏟아낼 것 같아서 발걸음이 빨라졌는데
빠른 걸음으로 다다른 곳은 밤의 국숫집
말이 없고 큰 대접에 담겨 쉽게 안개의 식구가 된다*
뜨거운 국물과 가지런한 면발에 마음이 녹지만
밤의 좌표가 바뀌면 어지러운 탁자들 조금씩 삐걱거리고
들썩거리는 별의 입술은 점점 붉어진다
도시의 불빛이 천천히 무너지는 동안
순한 미소로 밤의 다정한 친구를 만들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다만 배고픈 친구들
이 도시를 푹 찌를 것인가
길 위의 환하게 터지는 어둠을 개의 긴 혓바닥이 핥는다
누군가 밤에 도달하기 전에 나는 중얼거리고
조용하게 순서를 기다린다
의도도 목적도 없이 선택된 뒤통수는 나의 것
젓가락 넓이 만큼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면 착실하게 흐려지는 창문들
들러붙는 습기를 물리치기 어렵다
건져올린 면발은 여전히 부드럽고 빛나는 것이어서
더 이상 흐려질 수 없는 눈을 감으면 비로소 적의가 환하게 눈을 뜬다
이 도시는 아직 덜 익었는지도 모른다
- 어느 푸른 저녁, 문학과지성사, 2019
산복도로들 [성윤석]
자산동에서 월영동까지 산복도로 불빛들이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갈 때 흘러내리며 무슨 짐숭처럼 꾸불텅거리는
저 어두운 길들이
지나온 모든 길들로 남겨질 때
오징어튀김집 여주인도 재고가 생기면 슬픈데
남겨진 옛일들이야
월영동 벚꽃길에 벚나무들은 하안거에
들어가 골목 골목 무슨 무슨 가정집 같은 절들과
불상만으론 못 살아 무슨 무슨 점집들도 가려주고
속까지 더워지는 병을 비닐봉지에 담아 부둣가에서
통발이나 바다에 던져두는 것은 그깟 장어 몇 마리
기다리려고 한 건 아닌데
자산동에서 교방동까지 산복도로 불빛들이 말하지 못한
문장들을 일기장처럼 감출 때
지나가는 개를 불러서라도 길을 물어보지 못한 일도 아쉬운데
잠처럼 쏟아지던 쓰지 못할 시들이야
- 멍게, 문학과지성사, 2014
경(經)을 먹는 개 [이용한]
경전은 맛있다
오래된 경전은 질겨서 더욱 맛있다
사원을 어슬렁거리던 개는 경을 물고 벌판으로 내달린다
이런 경은 하도 읽어서 너무 뻔하다는 듯
표지를 한 장 뜯어 맛을 본다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겨 질겅질겅 씹는다
경전은 맛있다
맛있는 경전은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다
마침내 한 권의 경을 다 뜯어먹은 이빨에도
경이 잔뜩 끼어 있다
크엉크엉 짖을 때마다 경들이 운다
벌판을 울리는 한밤의 독경 소리
스님이 알면 경을 칠 일이지만,
엄연히 개는 경을 먹고
온 들판에 경을 싸고 다닌다
벌판의 모래 한 알, 햇빛 한 줌에서도 경전 냄새가 난다
그것은 가끔 눈보라처럼 몰려가
설산에서 밤새 울기도 한다
-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문학동네, 2018
춘천, 씨놉시스 [안현미]
#1 청량리역 혹은 뽀르뚜갈 광장
경춘선을 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봄이었으므로. 그러나 곧바로 떠나는 기차는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즉흥적인 여행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청량리역 광장이 아닌 뽀루뚜갈 광장에 서 있는 이국의 여행자들처럼 밤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리는 낮과 밤의 경계 위를 어슬렁거리며 광장의 시계탑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을 공유하며.
#2 기차 안과 밖
어두운 차창 밖으로 몇겁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다. 당신과 나는 그 어둠속에서 전생 혹은 전전생을 시청 중이다. 홍익회의 삶은 계란과 캔맥주를 홀짝이며. 이어폰의 리시버를 한쪽씩 나누어 꽂고 우리가 듣는 음악은 부에나 비스따 쏘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가 부르는 「 Dos Gardenias」. 이국적인 그 음악은 전생의 당신을 닮았다. 당신은 노래한다. "치자꽃 두송이를 그대에게 주었네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서 잘 돌봐주세요 그것은 당신과 나의 마음입니다."
#3 새춘천교회 그리고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우리는 예배당을 찾아간다. 성경책도 믿음도 없이. 그러나 당신을 향한 찬송가처럼 몇개의 빗방울 흩뿌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말한다. " 이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어."
#4 공지천과 이디오피아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에. 사랑을 시작해도 부동산 투기를 시작해도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도 실패하기 딱 좋은 나이, 실패해도 상관없는 나이, 즉흥적이어서 아름다운 나이, 열아홉 혹은 스무살 봄.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찬송가를 불렀지. 찬송가책도 미래도 없이.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언젠가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전생 혹은 전쟁 같았던 그 봄 춘천에.
-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폭우와 어제 [안미옥]
우산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다
모자를 쓴 사람이 있다
그건 나였을 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
뿌리가 깊어서
꺾이지 않는 나무구나
비는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불투명한 얼굴
내일 또 공원에 갈 것이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잠깐씩 어제를 생각할 것이다
어제는 구름 같고., 쟁반 같고, 빙하 같고, 비탈 같고, 녹고 있는 소금 같다. 햇빛에 투명해지는 초록 같고, 안부를 묻는 부케 같고, 부은 손 같다. 상한 빵 같고, 어린 개의 솜털 같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다.
어제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공원 앞 찻집에 앉으면
또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제는 어제를 버릴 수가 없었다
가방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묶어둔 사람은 잊지 못하고
언제까지 착한 나무가 되어야 할까
얼마나 더 큰 나무가 되어야 할까
오늘은 기필코 가방을 열어보기로 한다
가방을 열어보려고 손잡이를 잡는다
또 손잡이를
영원히 손잡이를 잡는다
영원히
이젠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어제가 다 닳아서
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나누지 않고 돌보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그런 이야기
누군가가
제멋대로 들어도 좋을 이야기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행을 가서는 여행만 하고
돌아올 땐 돌아오기만 하고
집에서는 집에만 있었다
어제는
- 2019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8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물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 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민음사, 2018
손금 [장석주]
손금이란 참 이상한 선물이야.
우리는 국수를 먹고 그다음에 커피를 마셨지. 거짓말이 생의 우연에 일관성을 만든다. 월요일은 다른 요일보다 더 빨리 왔다. 좋은 예감은 늘 빗나간다. 늦은 자는 늦고 실패한 자는 또 실패한다. 악은 너무 평범해. 그건 당신 상상력이 진부하거나 밋밋한 탓이야. 우리의 교양을 만드는 건 읽지 않은 책들이었지. 고향을 떠날 때 고향이 발명되듯이. 누군가는 마루 거실을 좋아했다. 나는 정의를 부르짖는 여자를 믿지 않았지. 방구석에서 칩거하는 자가 가장 먼 나라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납게 짖는 개는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일 거야.
늘 알 수 없는 패를 쥔 당신.
자, 손을 내밀어봐,
내가 패를 봐줄게.
-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겨울 길음동 [천양희]
골목이 텅 비었다 개들도 주정꾼도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 육교 쪽 가로등이 뿌옇다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담을 넘는다 파출소 뒷길 부산상회 탁씨 갈매기 바다 위에…… 콧노래 부르며 덧문을 닫고 있다 늦은 밤 버스 종점 바람이 차다 빈 택시 한 대 총알처럼 지나간다 지가 빠르면 세월보다 빠름감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 돌리며 중얼거린다 세상에는 왜 이리 고칠 것이 많은가 나도 나를 고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걸려 있는 빨랫줄 무슨 악연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그 집의 내력 끌고 왔을 것이다 마당 깊고 언덕길 너무 가파르다 누구나 절벽 하나쯤 품고 산다는 것일까 발끝이 벼랑이다 날마다 벼랑 끝을 기어오른다 정상 정복할 등산가처럼.
- 벌새가 사는 법,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자정의 작용 [함순례]
웃는 별이 있다
우는 별이 있다
오래 걸어온 자들은 안다
광장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부르튼 발 주무르며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혼잣말은 앞으로도
첫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
거대한 파도에 밀려 헤진 옷
훌훌 벗어놓고 등을 말고 잠든
순간에도 심장은 뛰고 있어서
그것이 슬퍼 웃고
그것이 아파 울지 못하는
별들이 참 뜨겁고도 서늘하게 반짝인다
도시의 우듬지가 별들의 박동을 들으며 출렁이는 시간
도시의 파도는 거세고 무거우니
어두운 손 뻗어 입을 틀어막는 짐승들아
개 같은 날들을 치워라
우리는 슬프고 아픈 기미 찾아
온 마음으로 꿈을 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일이면 또 별들이 나와
생의 스크럼을 짤 것이다
-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애지, 2018
별내 옆 갈매*로 옮겨 가기 [김은경]
볕이 좋은 날이다
이불을 빨고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까무룩 잠을 자다 일어나
식은 죽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머지않은 미래엔 주정뱅이 사내를 피해
도박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여자들끼리 모여 사는 집을 하나 장만해야지
배신을 모르는 안개꽃을 사야지
코코넛향 세숫비누를 사고
흰 머리는 그냥 두어도 괜찮지
부지런히 분갈이를 하고
쌀독에 쌀을 채우고
손톱으로 벌레를 짓이기는 대신 단추를 돌려
가만히 라디오를 켜야지
김광석이 오고
퀸과 이글스가 오고
어떤 새는 죽고
어떤 개로부터 새끼는 태어나고
궁금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간신히 떠올리는 동안
저녁이 바투 오겠지
일몰이 올 때 봉숭아꽃 발그레한 낯빛이 좋아
모르는 데로 열차가 떠나듯 찻물 끓는 소리가 좋아
집으로 향하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좋아
숨소리를 죽이고 사뿐사뿐 지나가는
공룡 모양 구름도
애끓는 시간은 찻잔 바닥에 가라앉고
한 모금 두 모금
한 계절 두 계절
한 사람 두 사람
한 잎 두 잎
죽음은 그렇게
별내 옆 갈매로 옮겨 가듯,
* 별내동, 갈매동 : 남양주와 구리 경계에 이웃한 동네
-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 실천문학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