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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숲에 들다

개 17

작성자joofe|작성시간26.06.20|조회수50 목록 댓글 0

비의 뜨개질 [길상호]

 

 

 

 

너는 비를 가지고 뜨개질을 한다,

중간 중간 바람을 날실로 넣어 짠

비의 목도리가, 밤이 지나면

저 거리에 길게 펼쳐질 것이다,

엉킨 구름을 풀어 만들어내는

비의 가닥들은 너무나 차가워서

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사람

그리 흔하지 않다,

거리 귀퉁이에서 잠들었던 여자가

새벽녘 딱딱하게 굳은 몸에

그 목도리를 두르고 떠났다던가,

버려진 개들이 물어뜯어

올이 터진 목도리를 보았다던가,

가끔 소문이 들려오지만

확실한 건 없다,

비의 뜨개질이 시작되는 너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것 말고,

빗줄기가 뜨거운 네 눈물이었다는 것 말고는

 

 

                 - 모르는 척, 천년의시작, 2016

 

 

 

 

의자와 자두나무 [신미균]

 

 

 

 

시골 집 앞

먼지 잔뜩 묻은

의자가 있다

 

하루 종일

개 한 마리

지나가지 않고

떨어진 나뭇잎 하나

굴러가지 않는다

 

어째서 아무도 안 올까?

 

의자가 너무 심심해 하니까

 

집 앞 자두나무 그림자

슬며시

의자에 앉아준다

 

 

                    - 2018년 한국시문학상 수상작

 

 

 

 

헤어지는 기분 [유계영] 

 

 

 

 

뚜껑 달린 컵처럼

때로는 선택받았다는 느낌

물건을 살 때마다 흰것을 골랐다

 

36색 크레파스 중 끝까지 닳지 않던 색

꿈속에서 사람들이 분분히 펼쳤던 손바닥

모두 나와 악수하고 나를 지나쳐 간다

 

모르는 사람들

왜 자꾸 따라오지 나는 지웠어

 

깨어나고 나서야 슬픈 꿈

빛나는 구석이 없었다

 

나일론 끈으로 동여맨 상자가 버려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본뜬 모양인가

버리면서 가벼워지면서

 

더 무거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

유리가 나를 경멸할 때 지어 보였던 표정

 

혼자 남아 연습했다

빛나는 구석이 없었다

 

여행지에서 커튼을 치지 않고 잤다

아무도 나에게 잘못하지 않았다

 

불쑥 들어온 햇살이 흰 것을 들고 나간다

원래 내 것이니까 다시 가져 간다

 

해년마다 겨울 기후가 반복된다

겨울 안에 시간이 멈춰 있다고 믿으며

겨울의 일들이 잊히지 않았다

 

목격자가 없는 꿈들은

쉽게 없던 일이 되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영혼들이

개로 태어나 짧게 삶을 반복하고 갔다

빛나는 구석이 없었다

 

 

                -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문학, 2018

 

 

 

 

너의 라디오 [하재연]

 

 

 

 

주파수를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라디오는

아직 라디오라고 불리고 있다

라디오로 남아 나의 머릿속에 작은 구멍들을 낸다.

 

라디오는 내가 사랑하는

라디오는

검고 수많은 구멍이 뚫린 라디오였는데

검고 수많은 뚫린 구멍들의 라디오로 남아

나에게 현실의 음악을 들려주지 않는다.

 

라디오는 라디오가 아닌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의 검고 수많은 구멍이 이제 무엇에 소용되는지

알지 못한다.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개의 꿈을 대신 꾸고

나는 도둑개를 내쫓았지만,

그건 진짜 개의 꿈은 아니었고,

소시지를 훔쳐 간 것은 개가 아니었고,

나는 진짜 도둑이 아닌 개의 가짜 꿈을 꾼

개 주인이었고,

 

쫓겨난 개는 한없이 나라는 주인의 오두막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이상하게 끝나지 않은 겨울에.

 

 

              - 우주적인 안녕, 문학과지성사, 2019

 

 

 

 

언제 끝나는 돌림노래인 줄도 모르고 [유계영]

 

 

 

 

불행을 느낄 때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탓하기

다지증의 발가락처럼 달랑거리는

다섯 아닌 여섯, 외롭지 않게

 

모르는 사람의 기념사진에 찍힌

나를 발견하듯이

 

오늘날의 태양은 상상의 동물이 되었다

 

아름다운 건 죄다 남의 살이고 남의 피일까

강물에 돌을 던지고 물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던진 돌을 잊어버린다

 

컵 안을 응시하면서 컵에 담긴 것을 마시기

너밖에 없어 같은 말을 믿는 짝눈이 되기

안색이 왜 그 모양이냐

바깥에서 형형색색이 묻는다

잠든 사람의 감긴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에서

내가 거의 완성될 것 같은 기분으로 느껴요

 

꼭 길이 아닌 곳으로만 가려 하는 개와 어린이가

수풀 속으로 뛰어든다

검정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사라지면서 휘날리면서

 

나의 내부에 더 깊고 긴 팔이 나를 끌어안고

강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돌

여섯 아닌 일곱, 외롭지 않게

 

 

                -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문학, 2018

 

 

 

 

국수 [이근화]

 

 

 

 

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 좋다

 

퉁퉁 부은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길 위에 자동차 꿈쩍도 하지 않고

길 위에 몇몇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오렌지색 휘장이 커튼처럼 출렁인다

빗물을 튕기며 논다

알 수 없는 때 소나기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소주를 곁들일까

뜨거운 것을 뜨거운 대로

찬 것을 찬 대로

 

 

             - 차가운 잠, 문학과지성사, 2012

 

 

 

 

밤의 그림책 [박서영]

 

 

 

 

지구라는 머나먼 별에서 헐레벌떡 뛰어 너에게 갔다

 

한쪽 발이 없는 비둘기. 한쪽 날개가 없는 나방. 한쪽 눈알이 없는 개. 꼬리가 반쯤 잘린 고양이. 견우와 직녀. 당신과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책을 쓰기 위하여

 

연립빌라 옥상 물탱크 옆에 앉아서
은하수 동창회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추웠지만
웅크리고 앉아 밤의 삽화를 그렸다

 

시간이 약탈해간 아름다운 별들을 모았다
어떻게 그 많은 순간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멸종 위기에 처한 침묵이 도착하였소
마른 멸치 몇 개 놓고 소주 한잔 하면서

 

우주의 샅을 다 뒤져서 도도새, 바바리사자, 분홍머리오리, 여행비둘기, 큰바다쇠오리, 황금박쥐와 키위새가 주인공인 이야기책을 쓰기 위하여

 

나처럼 당신을 잘 이해해주는 애인은 없을 거예요

 

지구에서 바로 유턴하자마자
우주의 옥상 보호구역 노란 물탱크 옆에서 반짝이게 되었다
그러나 저 반짝거림들
애틋함은 얼마나 빨리 사라져버리는가

 

밤의 그림책을 쓴다
침묵으로 가득 차 있고, 깨어나 보면 이 곳은
이상한 물속의 세계
넌, 아직도 나 때문에 울고 있구나
투명한 해파리들이 쏟아져 그림책을 완성하고 있다

 

 

                       - 실천문학, 2015 여름

 

 

 

 

입장모독 [문보영]

 

 

 

 

 신은 부하들을 시켜, 세계에 입장하는 이들에게 수고비 대신 코스트코 빵을 나눠 주었다 사람들이 태어났다  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우리는 모여 골똘히 생각했다 왜 우리들은 빵을 받지 못한 걸까?

 

 1) 옷이 한 벌 밖에 없었다 목둘레가 해진 런닝구만 걸치고 아랫도리 없이 입장하려 들었다

 2) 영국식 파이프 담배 모양의 영혼을 소망하는 것으로 신성모독을 했다

 3) 성당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그 모습이 상처 난 부위에 딱지 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4) 매일매일 신나는 꿈을 꾸었고 그래서 꿈과 현실을 바꾸꿔치기하고 싶었다

 5) 신을 보며 저 사람은 소화기관에 작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6) 제대로 된 사람, 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7) 그래서 학교를 잘 나가지 않았다

 8) 세상의 모든 도서관이 불에 탔을 때 구하고 싶은 책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9)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10) 그래서 희망을 무서워했다

 11) 그래서 미친 개가 자꾸 쫓아왔다

 12) 그래서 뛰어, 뛰어, 뛰어다녔다

 

 우리가 빵을 기다리고 있다

 

 

                   - 책기둥, 민음사, 2017

 

 

 

 

식물성 [이장욱]

 

 

 

 

햇살이 비닐하우스처럼 드리워지자

우리들은 자란다.

우리는 턱을 치켜들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누군가 이해할 수 없는 外國人처럼 묻지.

 

지금, 당신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입 속에서 기나긴 물관이 보여

늙은 개가 허공에 코를 대고

머나먼 향기를 불러오듯

우리는 열심히 달리고

우리는 이동하지 않네.

꽃은 발생發生하지만 너는 한 번도

혁명을 믿어본 적이 없잖아.

뿌리는 지하를 향해, 줄기는 태양을 향해,

또 꽃은 정기적으로.

 

중력은 무한하다.

우리는 슬로 모션으로 생장하는

낙관주의자들.

추락하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내 친구들.

 

내 몸에도 꽃 피네.

나는 친구들이 피워 올린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외로운 짐승처럼

허공으로 뻗어간다.

기분이 좋다.

 

 

                    -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2006

 

 

 

 

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 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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