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도, 침묵을 품다/김희남
섬에 가 닿으려면 발길보다 먼저 마음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일상의 소음이 지독하게 귓가를 파고들던 날 나는 이름조차 낯선 영광의 포구를 찾아 길을 떠났다. 멀리 칠산바다 위에 말갛게 떠 있는 섬! 송이도(松耳島)가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귀를 닮았다는 그 아담한 섬은 멀리서 볼 때는 그저 고요한 안식처처럼 보였으나 배를 타고 다가설수록 바다는 만만치 않은 기세로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마치 네 안의 소란을 다 내려놓지 못한 채 감히 이 고독의 땅을 밟으려 하느냐고 꾸짖는 듯했다.
하지만 밀려날수록 열망은 더 뜨거워졌다. 마음으로만 그리던 섬이 아니라 소금기에 찌들고 거친 생을 품고 있는 실체의 섬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향화도 선착장을 떠난 배가 마침내 송이도항에 닻을 내렸을 때 섬은 거창한 환대 대신 깊은 침묵으로 나를 맞이했다. 내가 육지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구구절절한 사연들과 억울하고 답답했던 사람의 말들은 섬의 거대한 적막 앞에서 갈 길을 잃고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선착장을 벗어나 섬의 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초록빛이 우거진 왕소사나무 군락지였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마치 내 지친 어깨를 토닥이는 위로처럼 들렸다. 숲을 지나 작은 해변으로 향하는 길 위에는 오롯이 자연의 언어만이 선명하게 차 올랐다.
송이도 최고의 비경이라는 큰내끼 해식동굴 앞에 섰을 때 나는 압도적인 대자연의 가르침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만 년 동안 거센 파도에 깎이고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육중한 몸을 누인 채 바다를 받아내고 있는 기암절벽과 동굴! 세상의 어떤 풍파도 결국은 저렇게 덤덤하게 받아낼 수 있다는 무언의 계시 같았다. 동굴 안에서 거꾸로 바라보는 푸른 바다는 마치 액자에 담긴 한 폭의 명화 같았고 바위 틈새마다 박힌 소금 결정들이 햇살에 반짝일 때 나의 내면도 저렇게 단단하게 굳어 빛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다.
섬의 백미는 단연 마을 앞에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몽돌해변이었다. 모난 모서리 하나 없이 둥글둥글하게 깎인 하얀 돌들이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서글서글'하며 몽돌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온 해안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바다가 섬에게 건네는 은밀한 고백이자 오랜 그리움의 전언이었다. 팽나무 군락지의 커다란 그늘 아래 앉아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가슴 속 엉켜있던 감정의 실타래가 스르르 풀려나가는 듯 했다.
섬을 떠나기 위해 다시 포구로 향하는 길, 나무 사이로 비칠거리는 포구의 전경이 보였다. 큰 손을 벌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던 햇살은 떠나는 자의 뒷모습을 축복하는 듯했고 올 때는 밀쳐내기만 하던 바람이 이제는 나의 등을 가만히 밀어주었다. 그것은 매정하게 쫓아내는 바람이 아니라 이제는 세상으로 돌아가 네 몫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는 훈풍이었다. 배를 타고 멀어지며 뒤돌아보니 송이도는 마치 대처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미의 마음으로 칠산바다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가서 잘 살아라! 힘들면 언제든 이 침묵의 품으로 돌아오너라" 하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섬의 실루엣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마음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섬은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지만 이제 그 섬은 내 가슴 속에 들어와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섬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 어떤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몽돌과 해식동굴을 하나 갖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세상의 소란에 마음이 다시 어지러울 때면 나는 내 가슴 한복판에 앉아 있는 하얀 몽돌 소리를 꺼내어 들을 것이다. 송이도라는 커다란 섬 하나가 내 안에 들어와 앉아 나를 대신해 파도를 맞고 나를 대신해 바람을 견뎌줄 것이기에...,(2026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