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朴在森
출생 - 1933년 4월 10일
도쿄부 미나미타마군 이나기촌 야노쿠치 1004번지
사망 - 1997년 6월 8일 (향년 64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묘소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
학력 - 삼천포일출공립국민학교 (졸업)
삼천포중학교 (졸업)
삼천포고등학교 (1회 / 졸업)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국어국문학[3] / 중퇴)
가족 - 아버지 박찬홍, 어머니 김어지
형 박봉삼, 여동생 박순애, 박순엽
아내 김정립
장남 박상하, 차남 박상규, 장녀 박소영
등단 - 1953년 시조 《강물에서》
경력 - 월간 현대문학 기자
문학춘추 기자
월간 바둑 편집장
대한일보 기자
삼성출판사 편집부장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
재단법인 한국기원 이사
공연윤리위원회 가요음반심의위원
통일민주당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
월간 한겨레문학 편집위원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장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김소월 이후,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한 독보적인 시인으로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섬세하고도 애련한 가락을 노래했다.
1933년 4월 10일, 일본 제국 도쿄부 미나미타마군 이나기촌 야노쿠치[5] 1004번지에서 아버지 박찬홍과 어머니 김어지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4살 때인 1936년 7월에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읍 동서금리[6] 72번지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자랐다.
아버지 박찬홍은 지게 노동으로, 어머니 김어지는 생선 행상으로 가족을 부양하였다고 한다.
1946년, 삼천포일출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학비 3천원이 없어 신설된 삼천포중학교에 진학 하지 못하고 신문배달에 종사하였다.
이후 삼천포여자중학교의 가사 담당 여교사의 도움으로 그 학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고,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인 1947년, 삼천포중학교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일하고 밤에는 삼천포중학교 병설 야간중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1948년, 교내신문 「삼중(三中)」 창간호에 동요 '강아지', 시조 '해인사'를 발표했다.
1949년에는 경영부진으로 야간중학교가 폐쇄되어 주간 중학교로 흡수되었는데, 야간 중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한 덕택에 학비를 면제받고 주간 중학교 학생이 되는 특전을 얻었다.
이후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조 시인 김상옥에게 시를 배웠다.
이후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 '한글 시 백일장'에서 시조 '촉석루'로 차상으로 입상했다.
1950년에는 김재섭, 김동일과 함께 동인지 『군상』을 펴냈다. 1951년, 삼천포중학교를 졸업한 뒤 삼천포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학하였다.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1회)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피난지 경상남도 부산시 동광동[8]에서 삼천포중학교 시절 교장이자 제2대 국회의원이었던 정헌주 선생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고,
같은 해 『문예』에 투고한 시조 「강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다. 1954년, 은사 김상옥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하였다.
1955년,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국문학과에 입학했고, 같은 해 『현대문학』이 창간되자 현대문학에 『현대문학』 편집 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현대문학』에 투고한 시 「정적(靜寂)」과 시조 「섭리(攝理)」가 각각 서정주와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비로소 문단에 데뷔했다.
1957년에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그 해 3학년이 되던 때 고려대학교를 중퇴했다.
1958년,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1년 6개월 복무하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61년에는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함께 '1960년대 사화집(詞華集)' 동인으로 참여했다.
1962년, 김정립 여사와 결혼해 하숙을 하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166-20번지에 새 살림을 차리고 그 해 1962년에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출간했다.
1963년 '문학춘추' 창간에 참여하여 1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어서 1965년 '대한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3년간 근무하다 35세이던 1967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6개월가량 입원했다.
한동안 반신불수, 언어장애로 고생하였다. 그 후 대한일보를 퇴사했다가 1969년에는 삼성출판사에 입사하였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11-83번지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할 때 쯤 다시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1970년에 두번째 시집 '햇빛 속에서'를 펴내고 이때부터 서울신문, 대한일보, 국제신보 등에 바둑 관전기를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글을 쓰고 발표하여 타계할 때까지 시집 15권, 시조집 1권, 수필집 10권, 시선집 13권을 펴냈다.
199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병인 고혈압, 만성신부전으로 타계했다. 향년 64세.
장례는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말년의 투병 당시 박재삼 시인 돕기 운동이 벌어져 문단과 삼천포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모금하여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의 박재삼 시인 집으로 성금 전달식이 열리기도 하였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고등학생 때 제1회 개천예술제에서 차상을 받으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참고로 이 때 장원이 이형기 시인.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과 시 선집을 간행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울밑에 선 봉선화』(1986), 『아름다운 삶의 무늬』(1987),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시 「춘향이 마음」(1956)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59) 등으로 대표된다.
그는 이런 시들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했으며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섬세하고도 애련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는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밤바다에서」 1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자연이란, 삶의 이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세계이다.
그는 그 자연에 의지하여 위로와 지혜를 얻지만, 때로는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박재삼의 시는 1950년대의 주류이던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와는 달리 한국어에 대한 친화력과 재래적인 정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 주어, 전후 전통적인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