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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솔 칼럼 34. <뜻 길 60주년을 맞으며>2

작성자윤덕명|작성시간23.09.27|조회수44 목록 댓글 0

34. 뜻 길 60주년을 맞으며

 

 

중학교 1학년 때 4.19의거 학생혁명이 일어났었다. 멋도 모르고 학교에서 지시하는 것이니까 교문을

나와서 거창의 시가지를 앵무새처럼 외치면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

3.15부정선거를 통해서 폭발되었다. 그는 결국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곧 이어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농경사회가 산업화사회로의 전기가 되어서 새마을운동을 주축으로 하는 잘살기

운동이 벌어졌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비교적 상위권에 머물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인 1963년도

45일 식목일 밤에 거창의 변두리 초라한 초가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협소한 방안의 벽에는 자그 마한 흑판이 걸렸고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72가정 김점순 여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조원리였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두 번의 이사를 하였었다그녀의 후임으로 동혼가정인 박판남 지역장이 부임해 왔다.

62년도 축복 후의 첫 임지가 함양이었고 그곳에서 첫딸을 해산했지만 거창에 와서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가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나를 비롯한 너 넷 명의 학생들이 상살미 과수원의

야산에 초라한 매장을 하게 되었다. 박혜인 아기의 성화는 형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아픔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는 하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여 대학진학의 꿈을 접어야했다. 거창의 향

교가 있는 그 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삼십 여 가구가 촌락을 이룬 곳인데 대부분 초가집으로 된

집들이었고 나의 집은 6.25전쟁 발발 일 년 전에 4칸 기와집을 짓게 되어서 동란 중에는 국군과 인민

군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네 살 때 전쟁이 일어나 일곱 살 때 휴전협정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

. 그 때 고등학생이었던 삼형제 중 막내 삼촌께서 했든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야! 덕명

아 저기 빨갱이가 오고 있다는 그 말에 어린 소견에 진짜로 얼굴이 빨갛게 생긴 줄 알았던 것이다.

 

인민군이 우리 집의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끌고 나가던 모습이 선연하다. 무법천지의 전쟁은 그야말로

약육강식 그 자체였다. 언제 목숨이 끓어질지 모르는 암중모색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때였었지만

인간의 목숨은 끈질기기 때문에 지금까지 무수한 곡절을 겪으면서도 살아온 것은 기적이라고 보겠다.

할아버지께서는 근검절약의 으뜸에 놓아도 될 정도로 당시에 야산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어 작은 동네

에서 부유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었다. 나는 파평 윤가의 대언공파 33대 종손으로 태어났기 때문

에 나에 대한 가족의 기대는 컸다. 졸업도 하기 전에 시골에 논을 팔아서 대학진학 등록금을 마련했

고 교대에 가서 선생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선생이 가장 크게 보일 때기도 하였다.

 

성화학생 10회를 수료함과 동시에 나는 196631일 부로 경남지구 진주지역의 미천면 구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에 농촌지도소에 근무하였던 정 선호 선생께서 농촌 4H운동을 계기로 면단위

의 젊을 지도자들을 발탁하여 수련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구역장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당시 유

종영 경남지구장께서는 그를 경남지구 전도부장으로 발탁하였고 진양군 16개 면단위에 구역장을 배치

하기에 이르렀다. 임지에서 지역본부까지 회의를 갈 때는 먼지가 폴폴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서 세 시

간을 가야만 했고 사무친 심정으로 성가를 부르며 때로는 단심가나 신 아리랑을 부르다가 보면 어느

듯 진주시내에 입성을 하게 되었다.

 

당시 지역본부는 진주성내 지금의 충혼탑 바로 아래 위치한 일본식 건물이었다. 임지 부임 3개월째인

57일은 구역장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당시 72가정 우 종직지역장께서는 다음날 당시 어머니의 날

새벽에 부모님 방으로 모이게 하였고 17명의 공직자들이 함께 생전에 처음으로 혈서(血書)를 썼던

진풍경이 벌어졌었던 것이다. 말로는 들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모두들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지역장께서 먼저 혈서를 쓰고 난 후 한참 정적이 흐르고 난 뒤에 나도 모르게 제일 먼저 내가 시도 하였고

뒤따라 모든 구역장들이 쓴 모조지 한 장 분량의 혈서는 마무리가 되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생각해 보면 일종이 영적인 역사 같았다.

 

당시에 예화산탄공기총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진주성 입구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었고

나와 같은 또래의 김경명씨가 책임자였다. 구역장 3개월 뒤에 지역장께서는 나를 진주지역 총무로 발

령을 내었고 다음해 3월 고향 거창교회 총무로 부임할 때까지 진주교회의 살림살이를 위해 여러 가

지 온갖 활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후에 나는 거창에서 1년 동안 총무 겸 반공강사로 거창군

면단위를 순회하면서 당시 김성만 430가정 형님과 열성으로 활동을 하였다. 당시 거창은 최재인 지역

장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식구들의 심령을 지도하였다.

 

지금의 거창공원인 충혼탑에 성지가 있었는데 새벽 일찍 기상하여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두 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은 감히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운 최고의 열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중에

1968222430가정 축복 후에 전국적인 목회자 인사이동 때 나는 구역장에서 경남 고성지역장으로

발령을 받는 날짜가 그해의 610일이었다. 당시에 미혼으로는 최이덕 동래지역장과 나 둘 뿐이었었다.

이듬해 6910월 군입대하기 까지 고성에서의 활동은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는 때이기도 했다.

짧지만 많은 활동을 하였다. 교구학생 수련회가 되면 고성에서 가장 많은 수련생을 배출하였다.

공기총 판매와 각 급 학교를 순회하면서 반공강의를 하 여 많은 학생들이 인연이 되었다.

 

지금의 장로 권사들이 생존하고 있다. 2년간의 공직을 착실히 수행하다가 입대를 하였다.

논산훈련소 23연대에서 6주간의 고된 훈련 중에도 매일 밤마다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화제가 되어 졸업 때는 중대장의 표장을 받기도 하였다. 자대배치를 할 때 120으로알고 보니 전차병이었다.

곧바로 광주기갑학교에 입학을 하여 13주간의 고된 훈련을 마쳤다. 기갑병의 군가(軍歌)를 부르며

공동목욕탕으로 갈 때의 제식동작은 주변의 모든 군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엄한군기와 규율 때문에 훈련기간에 조부께서 돌아가셨는데 통보가 되지 않아서

훈련을 끝난 후 늦게야 알게 되었다.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타계하신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종손으로서의 심경은 참담하기도 했다.

 

군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자성어가 바로 멸사봉공(滅私奉)이라는 것이 가슴에 다가왔다.

기갑부대는 탱크라는 중장비를 다루는 특수병과이기 때문에 근 일련 가까이 교육훈련을 받는 병과이다.

광주기갑학교 졸업 후 경기도 가평에서 한 달간 최종의 교육을 받고 이웃한 가평의 1사단직할소속의

전차중대에 배치를 받고 곧바로 임진강변의 최종 임지부대에서남은 기간을 근무하다가 총 33개월의

군대생활을 마무리함으로 군병역의 의무를 완료하였다.

 

내가 경기도 현리의 자대에서 복무하는 중에 777가정 약혼식이 청파동의 원본부교회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6차까지 진해되는 약혼식에 해당하게 된다면서 당시 거창교역장 이홍순(124가정)

배께서 추천을 한 결과 4차의 약혼수련에 참석을 하였다. 당시 군의 비상계엄령 사태가 특별휴가라

난이 하였지만 중대장의 신임을 받아온 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707월 초순에 시작한 특별수

련회지만 일주일간의 휴가 중 약혼이 안 되면 귀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하늘이 보호하여 참아

버님께서 직접주관하시는 약혼식이 712일 밤에 꼭 12쌍을 약혼 후 이날 개통하시는 경부고속도로

를 왕복하셔야 한다고 하셨다. 다행이 나는 그 열 두 쌍 가운데 포함이 되었는데 그 때의 열 두 쌍의

의미를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나름의 의미가 부여 되었다. 그 약혼식에 포함한 동료 중에는 선문대

학에서 함께 정년 은퇴한 김계정 교수도 같은 군인으로서 동석한 것은 유의미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

을 수 없다.

 

1972년 말에 군대제대를 하고 곧 바로 당시 김관혜 경남교구장의 추천으로 경남교구 부산교회(박판

남 교역장) 부교회장 겸 경남교구 학생부장으로 부임을 하였다. 축복가정 3년 임지생활을 개근으로

끝내고 첫 신혼살림을 한 곳이 지금의 범냇골 성지로 당시 토담집은 아버님이 사셨던 그 곳에서 가정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정확히 일 년이 지나고 1974년도 31일부 진주교역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

데 나의 전임자는 조봉제 교역장(430가장)이였다. 당시 교회는 진주여고 앞의 자그마한 2층 전세였

고 그 때 이백임 논산할머니의 조상 해원을 한 곳이기도 했다. 그해 전국의 A타입 교회를 막 짓기 시

작하여 지금의 교회부지인 칠암동에 부지 선정을 위하여 당시 김영휘 협회장과 박종구 전도부장께서

두 곳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지금의 장소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경남의 밀양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진주교회를 건립하게 되었다. 처음 미천면 구역장 발령을 받고 출발한 진주교회를 군재제후 7

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 신축을 하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가정들이 거처간 곳 진주

교회 헌당식은 참으로 내게는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임종에 이르기까지를 일생이라고 한다. 나의 유소년의 시절은 전후 피폐한 상황

의 가난한 농경사회였고 청년시절은 일찍이 멋모르고 접어든 목회활동의 삶으로 반공강의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시대로서 산업화의 시대였다면 중장년을 넘어서면서 지식 정보화의 시대가 되었다.

모든 시대를 두루두루 섭렵하여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삶의 보석과도 같다고 할 것이다. 목회공직을

경남에서만 12년을 하였다. 그후 사회활동으로 국제승공연합에서 경남도지부장을 거쳐서 연합본부

기획부장을 거처서 서울시 부지부장 겸 강북지부장으로 4년간 시무하면서 통.반 조직과 연수교육과

민반위강사로서 종횡무진 뛰었다. 9년간의 대사회활동을 끝으로 교육계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1989년 6월10부로 선문대학교 교목으로 부임을 하였다. 구 감리교제단의 성화신학교를 인수받아

신학과 40명, 해외선교학과 40명, 사회복지학과 40명 총 120명으로 출발한 신학교가 4년제 선문

대학교로 발전하기까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지금은 학부와 대학원까지 약 1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켐퍼스의 불을 밝히고 있다. 42세에 부임하여 65세 정년을 하게 되었으니 인생의 황금기를

상아탑 쌓기에 올인 하였다. 정년  이후에도 5년 간을 더 강의를 하였으니 약 30년을 교육계에서

종사한 셈이다. 교목실은 주로 건학이념과목과 채플을 담당하는 부서로서 교직원의 신앙을 상담하고

학교의 영성을 함양하는 역할이 그 주요 임무다. 아산캠퍼스의 모든 건물이 완성될 때마다 성별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설립자 선생을 모시고 숱한 행사도 하였다.

 

이제 정년을 한 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지났으니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하여도 황혼에 이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주변에 지인들이 제법 많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뜻길 60년을 맞았다.

열 일곱에 입교하여 희수를 맞이하였으니 살아온 삶보다는 살아갈 날이 점점 짧아지고 있음으로

하루하루가 촌음처럼 느껴진다. 살아온 생을 뒤돌아보면 모두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섭리에 부응한 삶이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사재인이고 성사재천인

것임을 체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인사대천명이란 자세로 살아온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20231001(일) 관악산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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